제83화 정리의 신
“아오, 맵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떡볶이를 한 입 베어 문 노을이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떡볶이를 먹던 최무열이 보란 듯이 떡 하나를 입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누나는 매운 거 전혀 못 먹는구나. 실망인데.”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노을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얼마나 잘 먹는데. 아! 맛있다.”
“뭐래, 지금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풋.”
“아냐! 하나도 안 매워!”
최무열이 피식 웃었다.
“아닌 거 같은데.”
노을과 최무열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서정익 작가는 튀김을 대충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밤새 작품을 만들자는 제안에 무척 기대하고 왔는데…….
떡볶이 먹는 일에 저렇게 열중이니 어쩐다…….
원래 팀 작업이 이런 건가……?
서정익 작가는 대학 때도 실력을 인정받아, 학교의 배려로 팀 작업보다 개인 작업에 몰두했었다. 혼자 고민하고 작업하는 그 몰입의 시간이 몹시 즐거웠고 때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메뉴 선정 1시간, 배달 40분, 식사 1시간 총 2시간 40분의 식사 시간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치열하고 열띤 토론을 기대한 자신이 뭔가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서정익 작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떡볶이를 깨작깨작 먹자, 최무열이 물었다.
“왜요? 맛없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노을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말했다.
“표정을 보니 떡볶이 안 좋아하시나 보다.”
노을의 말에 서정익 작가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와 작업 스타일이 많이 달라서 놀랐어요. 저 같은 경우 작품에 몰입하면 식사도 거를 때가 많거든요. 두 분은…… 작업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3시간을 먹는 데 소비하고 있잖아요. 작품 얘기는 언제 하죠?”
노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하나 남은 어묵을 포크로 찍었다.
“무슨 소리예요? 기획은 다 끝났고 작품만 만들면 되는데요.”
“네?”
“그동안 수없이 했던 통화와 문자, 그리고 아뜰리에에서 나눴던 대화는 기억 안 나요?”
서정익 작가도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산발적인 대화와 두서없는 회의로 무엇을 도출할 수 있는단 말인가?
“물론 얘기는 많이 했죠. 저는 나중에 다시 논의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늘이 그 날인 줄 알았는데.”
“아니죠. 이미 충분히 논의했으니까 오늘은 여유를 즐기면 되는 거예요. 식사 후 작업에 쓸 재료도 준비하고요.”
노을의 단호한 대답에 서정익 작가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제가 팀 작업은 처음이라. 원래 이런 건가요?”
대화를 듣던 최무열이 노을에게 투덜거렸다.
“누나! 제대로 알려줘야지. 서정익 작가님 엄청 혼란스러워하잖아.”
최무열이 가방을 열고 두꺼운 공책 하나를 꺼냈다.
“짜잔! 보세요, 작가님.”
서정익 작가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공책을 펼쳤다.
그러자 빼곡히 적힌 글자가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게 보였다.
“!!”
말문이 막힌 서정익 작가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노을과 최무열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흘렸다.
말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너무 놀랐어요.”
공책에는 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삼각지 화랑거리 전시 작품을 의뢰받은 순간부터, 날짜와 시간대별로 그들이 나눴던 모든 대화와 관련 정보가 요약돼 있었다.
더욱이 최무열이 개인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수십 페이지에 걸쳐 있었고, 화랑거리 사장들의 추가적인 요구사항들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렇게까지 정리하다니…….’
무엇보다 ‘스마트예술마을’ 견학일지가 눈에 띄었는데, 잘못된 예술 행정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까지 적혀 있었다.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고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작품을 제작한다.」
「추상적 형태로 제작하되, 화랑거리의 역사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놓치지 않도록 유의한다.」
최무열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공책 뒤쪽을 보세요.”
서정익 작가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뒷부분을 확인했다.
‘어제저녁 단체 문자로 주고받았던 내용이구나. 아, 맞다……. 작품 제작 방향을 확정했었지. 내가 깜빡했네.’
「노을이 ‘파도’를 형상화한 작품을 제안했고 최무열, 서정익 모두 동의했다.」
「끝없이 몰아치는 파도의 ‘무한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무한한 연결을 의미하며 시간을 통합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폐타이어를 잘게 잘라 파도의 움직임을 만들면, 거친 표면의 역동성이 두드러질 것이다.」
「입체적 방식으로 제작하여 관람자들의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일렁이는 파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자.」
「서정익 작가가 조명을 설치할 것. 수시로 변하는 조명은 작품의 무한성과 역동성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공책 내용을 모두 읽은 서정익 작가가 눈시울이 붉히며 말했다.
“몰랐어요. 이렇게까지 준비한 줄.”
서정익 작가 반응에 당황한 최무열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정리를 제가 좀 합니다, 하하. 작가님처럼 주목받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기록하고 정리하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서정익 작가가 최무열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니에요. 최무열 씨도 예술가로서 재능 있어요. 졸업하고 나면 분명 주목받게 되실 거예요.”
“오! 정말요? 제발 그렇게 되길…….”
분위기가 훈훈해지자, 어색해진 노을이 과장해서 말했다.
“이제 걱정 끝? 서정익 작가님도 만족하시죠?”
“그럼요!”
서정익 작가가 양념이 잘 밴 떡볶이를 오물오물 씹으며 말했다.
“와, 너무 맛있네요. 이렇게 맛있는 걸 두 사람만 먹고 있었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셋이서 같이 먹고 있었는데!”
“아…….”
민망해진 서정익 작가가 떡볶이를 오물오물 씹으며 두 사람을 은근히 바라봤다. 팀 작업이란 게 이런 거구나. 이 두 사람만 있으면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에 설레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휴식 시간을 가졌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찾아오자, 모두 옥탑방 작업실 창고 앞에 모였다.
“와, 노을 씨는 이렇게 많은 타이어를 어떻게 구했어요?”
작업실 한쪽에 폐타이어가 쌓인 것을 보며 서정익 작가가 감탄했다.
“화랑거리 사장님들이 보내줬어요. 헤헤.”
서정익 작가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주먹으로 타이어를 쿵쿵 때려보며 말했다.
“와, 엄청 단단하네요. 이걸 어떻게 조각내죠?”
최무열이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발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전공이 조각이라 이런 거 수백 번도 더 해봤어요.”
노을도 지지 않겠다는 듯 소리쳤다.
“난 폐자재로 작품 만들고 전시도 한 사람이라고!”
두 사람의 말에 서정익 작가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우, 두 분은 정말 능력자군요. 저는 페인팅하고 설치 작업만 해서 조각은 잘 몰라요. 전시도 기사님들이 다 알아서 해주셔서 솔직히 몸을 써 본 적도 없고요…….”
노을이 타이어를 하나를 거뜬히 꺼내 바닥에 툭 던져놓았다.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몸 좀 쓰세요. 원래 작품은 노동으로 하는 겁니다.”
서정익 작가가 살짝 당황했다.
“아……. 열심히 해 볼게요.”
최무열이 안전장비를 건네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작업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랍니다.”
“!!”
상태가 좋은 타이어를 선별해 옥탑 마당으로 옮기는 세 사람.
잠시 뒤 층층이 쌓인 타이어를 멀뚱히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저걸 어떤 모양으로 조각내야 하지?”
“파도 모양을 만들 거잖아. 그럼 최대한 잘게 자르되, 양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그 조각들을 이어서 붙이자는 거지?”
“그렇지. 먼저 작품 크기를 정해야 해. 클수록 타이어를 많이 잘라야 하거든.”
“당연히 크게 만들어야지!”
이미 녹초가 된 서정익 작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으로 작업 마칠 수 있나요……?”
노을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밤을 새워서 타이어를 조각낼 거예요. 실제 작업은 따로 날 잡아서 하죠.”
“…….”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서정익 작가가 나직이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노을과 최무열이 뒤돌아보자 서정익 작가가 비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치킨 먹고 하죠. 배고파요.”
“풋. 아까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깝다고 한 사람이…….”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이 짧았어요. 이번에는 배 터지게 먹고 시작할 겁니다.”
서정익 작가의 말에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정익 작가는 맛있는 치킨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몹시 들떠 보였다.
* * *
명일문화재단 회의실.
김명호 피디가 싱글벙글 웃으며 오한결을 쳐다보고 있자, 이나영 팀장이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김명호 피디가 이나영 팀장을 쳐다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적극적으로 도와주시죠. 팀장님.”
이나영 팀장이 고개를 휙 돌려 최하늘을 바라봤다.
“자세히 설명 좀 해봐요. 하늘 씨.”
최하늘이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대답했다.
“그게……. 오한결 작가님께서 개인전 이후 방송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해주시긴 했어요. 아, 저도 잊고 지냈는데……. 이렇게 피디님이 찾아올 줄 예상 못 했습니다.”
이나영 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에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아세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분에게 EBC에서 그림을 시연하라니요. 약속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네요.”
당황해하는 두 사람과 다르게 오한결이 여유롭게 말했다.
“괜찮아요. 팀장님, 약속은 지켜야죠.”
김명호 피디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역시 화끈하십니다. 오한결 작가님!”
준비해온 기획안과 방송 편성표를 들이밀며 김명호 피디가 말을 이었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오한결 작가님이 정하시면 됩니다. 만약 저희 조언이 필요하면 말씀 주세요. 언제든지 외부 미술 전문가를 섭외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편성은 특별 편성으로 우선 하기로 했어요. 안타깝게도 연말까지 편성이 꽉 차 있어서 정규로 가려면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데, 그건 방송국에서도 원치 않고요. 빨리 EBC 화면에서 오한결 작가님을 보고 싶습니다. 하하.”
이나영 팀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기요 피디님. 오한결 작가님이 전문가인데, 누구한테 조언을 구할까요?”
긴장감이 높아지려는데 때마침,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수진 이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바람에 방금까지 싱글벙글 웃던 김명호 피디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버렸다.
신수진 이사장. 그녀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당당한 모습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그 누구라도 굴복할 만큼 강력해 보였다.
명일그룹 회장의 막내딸.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명호 피디가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이사장님.”
“피디님, 오랜만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이사장님.”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 옆에 앉고는 다리를 꼬고 말했다.
“아니요. 저는 좋게 봤어요. 피디님의 열정을.”
그 말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김명호 피디가 여유를 되찾았다.
“오한결 작가님 방송 출연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방송 기획안과 편성 일정입니다.”
서류를 검토한 신수진 이사장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주네요.”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때요? 괜찮겠어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금 아주 재밌는 생각이 났습니다. 방송에서 보여주고 싶은 게 생겼어요.”
김명호 피디가 흥분했다.
“오! 저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에이, 그럼 재미없죠. 분명 아주 신선할 겁니다. 하하.”
기쁨의 감추지 못하는 김명호 피디와 다르게 신수진 이사장의 표정은 무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작품으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불안해.’
신수진 이사장의 표정을 읽은 오한결이 한쪽 입꼬리를 삐쭉 올려보았다.
‘맞아요. 그 생각이.’
오한결의 이런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명호 피디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