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문화정책포럼
“유화 붓과 수채화 붓의 차이를 아시나요?”
테이블에 유화용 붓을 올려놓고 오한결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는 그런 오한결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교수도 꽤 어울리겠는걸.’
학생들은 더 가까이 보려고 찔끔찔끔 다가와 테이블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는 공동구매해서 잘 몰라요! 싼 걸로 사거든요. 학생이라.”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너무 엉뚱한 대답이라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오한결도 피식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외형부터 달라요. 자, 보세요. 유화용 붓은 수채화 붓보다 손잡이가 길고 허리가 단단합니다. 그리고 붓끝에 탄성이 강하죠.”
캔버스 한 장을 오한결이 요청하자, 질문한 학생이 재빨리 가지고 왔다.
오한결이 유화 물감이 묻은 붓으로 정성스럽게 선을 하나 그었다.
“이렇게 힘 있는 선과 중후한 표현을 위해서죠.”
학생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오한결이 그은 선을 바라봤다. 분명, 대충 그은 선 같은데, 마치 서예가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 한 줄기 난을 화선지에 옮긴 것 같았다.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유화용 붓에 사용되는 털의 종류를 아시는 분?”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개털?”
“야, 장난하냐. 개털이 뭐냐. 말 털이잖아. 영어로 호스.”
“풋. 말 털이라고? 너 찍은 거지!”
“……아니면 고양이 털인가.”
“와, 엄청 무식하다. 왜, 토끼털이라고 하지!”
“뭐? 무식! 너야말로 우리 과에서 멍청한 걸로 소문나지 않았냐!”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듯 두 학생이 언성을 높이는 사이, 한 여학생이 소리쳤다.
“돼지 털!”
“돼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조용! 손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를……. 학교의 명예를 생각하세요!”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여학생을 바라봤다.
“그래도 정답을 얘기한 학생이 있군요. 맞아요. 돼지 털! 흔히 ‘돈모’라 하죠.”
여학생이 뛸 듯이 기뻐하자, 언성을 높였던 두 학생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화용 붓 끝에 달린 털을 쓸어내리며 오한결이 말했다.
“돈모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어요. 유화 물감은 수채화 물감보다 점도가 강하고 무겁기 때문에 돈모처럼 단단하고 힘 있는 털이 필요한 거죠. 팔레트 물감을 캔버스에 옮기기도 편하고 강한 터치나 물감을 두껍게 칠할 때도 좋습니다. 이렇게 짧은 터치를 반복할 때도 효과적이고요.”
오한결이 붓을 들고 캔버스 구석에 짧은 선을 여러 번 그려대자, 모두 고개를 빼 들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우와, 대충하는 데도 느낌이 우리랑 다른데.”
“그러게 짬이 느껴진다.”
오한결이 정답을 맞혔던 여학생을 쳐다봤다.
“물 좀 떠와 줄래요? 붓 손질법을 직접 보여줄게요.”
“넵!”
물통을 든 여학생이 잽싸게 화장실로 달려가 물을 가득 떠왔다. 그리고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오한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한결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해줬다.
“고마워요. 물이 많긴 하지만……. 암튼 훌륭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듯 여학생의 얼굴에는 행복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오한결이 클리너를 손바닥 위에 덜어 내고 말했다.
“잘 보세요. 클리너를 이렇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붓을 문지르는 겁니다. 살살, 붓이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하고요. 그리고 찬물로 헹궈주면 됩니다.”
찬물에 붓을 넣고 휘휘 저으며 오할결이 말을 이었다.
“그다음 과정도 굉장히 중요해요. 붓 형태를 잘 잡아서 붓 통에 세워서 말립니다. 잘못해서 털이 빠지거나 털이 굽지 않게 유의하세요. 그럼 붓을 못 쓰게 되거든요.”
오한결의 시범이 끝나자,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솔직히 특별한 건 없지만 그래도 오한결이 누구던가. 대가의 시범은 평범함도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법이리라.
데이비드 오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1학년이라 따끔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평소 붓 관리에 소홀한 학생들이 있어요. 오한결 작가가 그 점을 예리하게 지적해줬네요.”
평소 미술 재료를 대충 쓰던 몇몇 학생을 쳐다보며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귀찮아도 습관이 생겨야 합니다. 잘 관리한 붓은 새 붓보다 더 유용하니까요. 사용 후 뒤처리를 잘해야 다음 작품에 차질이 없으니까 반드시 주의하세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대충 ‘네’하고 대답하고는 오한결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작가님! 사인해주세요.”
“저도요!”
초롱초롱한 학생들의 눈을 바라보며 오한결이 말했다.
“줄을 서세요. 한 명씩 캐리커처 그려 줄게요.”
대포 같은 학생들의 고함 소리가 작업실을 울렸다.
“꺄약!”
“대박!”
앞다퉈 선두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끝나고 모두 한 줄로 길게 줄을 섰다. 순위 경쟁에서 밀린 학생이 뚱한 얼굴로 서 있는데, 느낌이 이상해 천천히 뒤돌아봤다. 그러자, 그 뒤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멋쩍은 얼굴로 서 있었다.
“교수님? 설마…… 교수님도 줄을 선거예요?”
검지를 입술에 대고 데이비드 오 교수가 나직이 말했다.
“쉿! 앞만 봐!”
* * *
서울 N호텔 연회장.
어두운 실내를 고급스럽게 비추는 샹들리에 아래 대략 500석의 테이블이 놓였다.
연단 중앙에는 ‘제20차 문화정책포럼’ 현수막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연사들이 앉을 의자 다섯 개와 기다란 테이블에 보였다.
정재계 인사들과 문화 산업 관계자들, 기자들이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입장하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하는 연회장.
곧 포럼이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뚜벅 뚜벅.
묵중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신태진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만으로도 회의장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양 비서의 능숙한 의전으로 신태진 회장이 VIP 지정석으로 걸어가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태진 회장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참석자들은 신태진 회장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십 년 동안 한 번도 포럼에 참석하지 않았던 회장 아닌가.
신태진 회장은 명일그룹 그 자체이다.
명일그룹의 사업 방향에 따라 대한민국 GDP가 출렁이니, 그 누가 신태진 회장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 분명했다. 무심코 던진 신 회장의 한 마디에 국가의 문화 정책 방향이 바뀐 적도 있지 않은가. 십 년 만에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참석자들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회장의 등장이 어떤 의미인지 빨리 파악해야 했다. 그게 바로 그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 사이 연단 바로 앞 지정석에 신태진 회장이 착석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신태진 회장 뒷모습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잠시 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사회자가 연단 위로 올라왔다.
“제20차 문화정책 포럼에 참석해주신 내빈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준비된 순서에 앞서 오늘의 발제 주인공이자 포럼을 주최해주신 이상민 문체부 장관님의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모두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민 장관이 미소 지으며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사합니다. 매년 느끼는 거지만, 우리 포럼은 매우 유쾌해서 좋습니다. 연말 시상식 같다니까요. 항상 제가 상을 받고 있는 기분입니다. 물론 인기상이겠죠!”
“하하하.”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신태진 회장이 한쪽 입술을 삐쭉 올리며 이상민 장관을 바라봤다.
‘대단한 쇼맨십이구먼. 재수 없…….’
그때 이상민 장관의 시선이 신태진 회장을 향했다.
“오늘 귀빈 중에 대단히 중요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글로벌 기업을 이끌고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계신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님! 꽤 오랫동안 우리 포럼에 초청한 결과, 드디어 포럼에 참석해주셨습니다. 무척 영광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보였지만, 이상민 장관의 시선은 벌써 다른 곳을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양 비서가 불안함에 다리를 덜덜덜 떨었다.
이상민 장관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올해 대한민국 예술계는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바로 오한결 작가의 등장으로 말이죠.”
신태진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한결 작가는 대한민국에 기적 같은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은 예술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이제는 세계 경제 10위권 안팎에 머무는 지금도 순수문화예술 성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최근 한류 바람을 타고 K팝과 K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문화 수준의 척도를 순수 예술로 보는 시각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겠죠.”
이상민 장관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명의 천재 예술가의 등장으로 모든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오한결 작가는 예술의 자존심인 프랑스에서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프랑스 사회에 일침을 가했고 그 결과 프랑스의 문화적 보수성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상민 장관은 이후로도 오한결 작가를 찬양하며 연설을 이어갔다.
잠시 뒤 연설 막바지에 이상민 장관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내 친구 오한결 작가! 우리의 우정이 자랑스럽습니다!”
그 말에 기자들이 눈이 크게 뜨며 급하게 장관의 마지막 말을 받아 적었다.
신태진 회장이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양 비서를 쳐다봤다.
“장관이 오늘 작정하고 나왔구먼. 양 비서, 마이크 좀 가지고 오게나.”
양 비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기…… 회장님. 지금은 개회사 중이라……. 나중에 장관과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어허, 가지고 오라 하지 않았나.”
양 비서가 마이크를 건네자, 신태진 회장이 장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주 훌륭한 개회사였습니다. 장관님.”
무척 놀란 이상민 장관이 연설을 멈추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양 비서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상민 장관이 회장을 바라봤다.
“회장님,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신태진 회장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이렇게 중간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 무례한 사람은 아닌데, 너무 궁금한 게 있어서 못 참겠더군요.”
이상민 장관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회장님.”
특종 냄새를 맡은 기자들은 재빨리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귀를 쫑긋 세웠다.
“오한결 작가 얘기를 많이 하셔서 궁금해졌습니다. 오한결 작가님과 무슨 사이입니까?”
이상민 장관이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와 저는…….”
이상민 장관이 뜸을 들이자, 장내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기자들은 특종을 뺏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노트북 위에 올린 손가락에 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신태진 회장은 이상민 장관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상대구나.’
당황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회장의 눈에는 승리에 도취한 장관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질문자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기자를 쳐다보는 장관이라…….
이상민 장관이 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친한 선후배일 뿐입니다. 아끼는 후배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말을 삼가겠습니다.”
기자들이 마이크도 없이 생목으로 소리를 질렀다.
“가까운 선후배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같은 학교 출신인가요?”
“언제부터 친분이 있었던 겁니까?”
“이번 프랑스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도 미리 공유했던 사인가요?”
“공모전 당선 전부터 오한결 작가와 친분이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조용히 기자들의 질문을 듣던 이상민 장관이 대답했다.
“오늘은 정책포럼에 온 것이니, 포럼과 관련 없는 주제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한결 작가와 저는 비슷한 삶의 철학을 공유하는 친구라고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장관님! 그렇다면…….”
대답 대신 꾸벅 인사를 하고 대기실로 퇴장해 버린 이상민 장관.
그 모습을 보던 신태진 회장이 양 비서에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당한 것 같구먼. 나를 자극해 판을 벌이고 딱 원하는 만큼 결과를 얻고 퇴장했어. 오한결 작가의 미래에 먹구름이 끼지 않을까 걱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