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스마트예술마을
아트화랑에 모인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 보지만, 막다른 골목을 만난 듯 답답하기만 했다.
최무열이 테이블에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아, 도저히 모르겠다. 너무 어렵잖아.”
홍철수 사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직도 화랑거리 조각품을 고민하는 거야? 예전에 한결 학생하고 얘기 끝난 거 아닌가?”
노을이 입을 뾰족 내밀고 푸념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그땐 오한결 작가님이 폐자재로 만들라고 조언한 거였어요. 딱 거기서 멈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어요…….”
홍철수 사장이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서정익 작가 생각은 어때? 그래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잖아.”
서정익 작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공공미술에 대해 모르거든요. 작업도 해 본 적 없고……. 도움이 되고 싶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에이, 왜 죄송해……. 이번 기회에 배우면 되지.”
세 사람이 고개를 푹 숙이고 우울해하자, 홍철수 사장이 넌지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브레인스토밍? 그런 거 해 봐.”
최무열이 여전히 엎드린 채 말했다.
“해봤어요. 영양가 없는 아이디어 홍수를 겪었습니다.”
당황한 홍철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했다.
“도서관에 가서 자료 조사는?”
“해봤어요.”
“……인터넷은?”
“다 찾아봤어요.”
답답한 마음에 홍철수 사장이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준비한 거 같은데. 일단 만들어 봐.”
홍철수 사장의 말에 노을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그들도 일단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노을의 옥탑 작업실 모인 세 사람은 밤새도록 폐자재를 자르고 붙이면서 작업에 몰두했는데, 새벽이 밝아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직 준비가 안 됐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물을 보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불타는 열정 없이 억지로 밀어붙인 작품이니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노을이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사장님, 열정 없는 작품은 폐기물에 지나지 않아요. 무작정 만드는 것도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더라고요.”
홍철수 사장이 노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열정이 없지?”
“…….”
홍철수 사장이 넌지시 말했다.
“직접 체험해보는 어때?”
노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아. 자료 찾을 생각만 했지, 실제 공공미술을 찾아 가볼 생각은 못 했잖아.”
잠시 뒤, 최무열이 휴대폰 화면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여기다! 충청도 진남군 ‘스마트예술마을’. 진남군이 상당한 예산을 들여 공공미술 마을을 조성했대!”
노을과 서정익 작가가 최무열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와, 이런 곳이 있었네. 여기에 거리 조각품도 많을 거야. 당장 가자!”
“출발!”
서정익 작가가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오한결 작가님께 같이 가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끼리 가면 좀 부족할 텐데.”
최무열이 서정익 작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형도 유명한 작가잖아. 형만 있어도 충분해. 오한결 작가님은 나중에 작품 만들 때 도움을 받자고.”
“……그래도 될까?”
노을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자! 이럴 시간 없어.”
세 사람이 급히 가게를 나서려는데, 홍미숙이 불쑥 들어왔다.
“어머! 어디를 급히 가는 거니?”
“충청도요!”
세 사람이 후다닥 빠져나가자, 미소를 머금은 홍철수가 테이블을 치우며 말했다.
“이제는 저 아이들도 점점 예술가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어.”
홍미숙이 머그잔을 같이 치우며 말했다.
“오빠 무슨 소리예요. 이미 훌륭한 예술가들인데.”
“그런가? 하하.”
* * *
몇 시간 후.
충청도 진남군에 도착한 노을 일행.
마을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마을 홍보용 간판이 눈에 띄었다.
「스마트예술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노을이 뛸 듯이 기뻐하며 간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스마트예술마을이라. 첫 느낌 나쁘지 않아!”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돌려 마을 입구를 바라봤다.
“스마트예술마을……. 이런 시골과 스마트라는 단어가 어울리나……?”
노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좀 이상하네. 일단 가보자. 직접 보면 알겠지.”
마을 입구로 들어선 노을 일행.
그들이 마주한 건 유럽의 작은 마을 같은 풍경이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중앙 도로가 있었고 그 양옆으로 현대식 모던 하우스와 주황색으로 꾸며진 유럽식 건축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노을이 감탄하며 말했다.
“와, 완전 멋진데? 유럽에 온 것 같아.”
동화 같은 마을 풍경에 최무열도 넋 놓고 바라봤다.
“실제로 보니까 더 멋진데. 예산이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 역시 돈이 최고야.”
한껏 들뜬 두 사람과 다르게 서정익 작가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마을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조각품이 보였다.
최무열이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이야, 진짜 크다. 근데 이게 무슨 모양이지. 설마 바나나인가…….”
노을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대형 바나나 조각이지……?”
작품을 유심히 관찰하던 서정익 작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
“좀 더 돌아다녀 보자. 뭔가 나오겠지.”
부지런히 걸어 마을 어귀에 이르자, 대략 백 미터 거리에 작은 호수가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한껏 기대를 품은 세 사람이 호숫가 주변에 도착했다.
이번엔 백조 조각상이 보였다.
“여기 또 있다. 이번엔 백조네…….”
“으……. 근데 왜 이렇게 때가 탔지? 곧 블랙스완으로 변할 듯.”
심각하게 얼굴이 굳은 서정익 작가가 말했다.
“그러네요. 전혀 관리를 안 한 거 같은데. 그나저나 이 마을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노을과 최무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거리에 사람이 없잖아요. 마치 유령마을처럼.”
“!!”
이색적 마을 풍경에 심취했던 두 사람은 이제야 한 사람도 길에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정익 작가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작품들도 기대 이하고요. 실망이 큽니다.”
최무열이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여길 빨리 나가야 하지 않을까? 완전 무서운데. 잘못 왔나 봐…….”
노을은 최무열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이곳에 오기 위해 들인 시간과 교통비를 생각하면 선뜻 밖으로 나가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더 돌아다녀 보자. 어딘가 좋은 작품이 있겠지. 그리고 사람도…….”
그들은 찜찜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세 사람은 걷고 또 걸었다. 비슷한 건물만 계속 보이자, 이제는 멋있다는 느낌보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가로등을 유심히 바라보던 최무열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가로등, 밤에 불 들어오겠죠?”
노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래, 무섭게. 곧 해도 떨어질 것 같은데, 불 안 들어오면 우린 어둠에 갇히는 거야.”
최무열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그만 갑시다. 이제 다 봤으니까…….”
“안 돼!”
서정익 작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이정표 보니까 이 길로 쭉 가면 중앙 광장이 나온답니다. 분명 작품이 있을 거예요.”
서정익 작가가 광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노을과 최무열은 체념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잠시 뒤 중앙 광장에 도착한 세 사람.
서정익 작가의 말대로 광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팽이 모양의 조각품이 보였다.
노을이 고개를 갸웃했다.
“팽이?”
최무열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우리가 예술적 내공이 부족한가 봐. 뭔가 느낌이 안 오네.”
서정익 작가가 한숨을 푹 쉬며 불만을 쏟아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전형적인 전시 행정의 결과예요. 공공미술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만든 처참한 결과라고요.”
노을이 팽이 조각을 손가락으로 스윽 문댔다.
“되게 비싸 보이긴 하네. 근데 돈을 많이 쓸수록 성공 확률이 높지 않나? 유명한 작가도 섭외할 수 있고.”
“아뇨, 그래서 실패하는 거예요.”
“……아, 공공미술 너무 어렵다. 직접 보면 다를 줄 알았는데, 더 헷갈려.”
서정익 작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팽이 조각상을 바라봤다.
“우리나라도 해외 예술 선진국처럼 1955년에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를 만들고 공공미술을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결국,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없었나 보군요.”
“그게 뭔데?”
“왜, 지나가다 보면 큰 빌딩 앞에 조각품 하나쯤은 있잖아요. 그게 일정 크기 이상의 건축물을 지으면 반드시 미술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게 포함돼 있어서 그런 거거든요.”
“아, 그래서 그렇게 뜬금없는 조각상들이 많았구나.”
“맞아요. 건축비용의 1%를 공공미술품으로 만들거나 문화예술 진흥기금에 출연을 해야 했죠.”
최무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그거랑 저 팽이랑 무슨 상관이지? 부담을 느낀 건축주가 대충 만든 건가?”
노을이 끼어들었다.
“바나나랑 백조는 왜 빼고 말해. 그것도 심각한데.”
“풋.”
노을의 말에 긴장이 풀린 서정익 작가가 히죽 웃자, 노을과 최무열도 같이 따라 웃었다.
“하하하…….”
서정익 작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긴 해요. 뭐든지 억지로 하면 문제가 되잖아요? 법적으로는 공공미술을 보장했지만 골치 아프게 뭐 하러 열심히 작가를 알아보겠어요? 건축주가 친한 사람에게 일감을 몰아준 결과, 이런 작품이 탄생하게 된 거죠.”
“아……. 그래서 거리에서 종종 보이는 미술품들이 그렇게 엉성했구나.”
서정익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비슷한 형식의 단순한 조형물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어요. 경제적 이익에 따라 예술품이 결정되고 만들어지는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최무열이 짜증을 냈다.
“그랬구나! 스마트예술마을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솔직히 예술적 특색이 전혀 없잖아. 어디서 본듯한 멋진 건물만 보이고 거리에 설치된 조각품도 다른 곳에 있을 것만 같고.”
노을도 한마디 보탰다.
“그러게. 지방에 예술 마을을 만들면서 고작 유럽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가져오고 생뚱맞은 모양의 조각품을 설치했잖아. 지역 사회의 특성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얘기네.”
서정익 작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핵심이에요. 공공미술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고,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목적을 둬야 하죠. 지역 사회를 위해 제작하고 소유한다는 의의도 있어요.”
어느덧 해가 저물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공공미술 토론에 흠뻑 빠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노을이 말했다.
“스마트예술마을에서 깨달은 것을 우리 작품에 적용해보자!”
“지역적 특수성, 공공성, 사회적 가치 실현!”
“그리고 주민의 목소리!”
최무열이 말을 보탰다.
“하나 더!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묻어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화랑거리는 원래 예술인들의 집합소였잖아. 그럼 예술적 의의를 담아야 하지 않을까? 사회 비판과 미술 형식의 절묘한 조화!”
서정익이 곰곰이 생각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추상적 형태가 좋을 것 같아요. 화랑거리의 역사성과 문화적 상징성을 나타내고 한국 예술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따끔한 조언과 충고가 담긴 작품! 그게 좋겠어요.”
노을과 최무열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방방 뛰었다.
“드디어 컨셉 나왔다! 이제 작업만 하면 돼!!”
대화를 마치고 나자, 세 사람은 그제야 깨달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가로등 불이 안 들어오네.…….”
노을이 덜덜덜 떨면서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말했다.
“너무 무서워. 아무것도 안 보여. 완전 유령마을이었어.”
최무열이 노을의 어깨를 살짝 툭 쳤다.
“누나!”
“꺄약!!!”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노을이 소리쳤다.
“놀랐잖아! 귀신인 줄.”
서정인 작가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이미 나가는 길을 파악해 놨습니다. 제가 어둠에 익숙해서 길을 잘 찾아요.”
“오!!”
최무열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아, 맞다! 서정익 작가는 아뜰리에 복도 귀신이었잖아!”
노을이 최무열의 입을 틀어막았고, 서정익 작가는 못 들은 척 뒤돌아 씨익 웃었다.
“빨리 가죠. 버스 끊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