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76화 (76/202)

제76화 은밀한 제안

서울 뒷골목 가정식 백반집.

음침한 골목에 접어든 데이비드 오 교수가 간판도 없는 허름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누리끼리한 벽지와 고작 두 개뿐인 테이블.

그 한 곳에 이상민 문체부 장관이 앉아 있었다.

“이런. 이게 얼마만 인가, 데이비드!”

이상민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네, 선배님. 20년만인 것 같습니다.”

“그래그래. 그동안 너무 왕래가 없었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식당 주인이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게 누군가! 자네도 왔구먼.”

데이비드 오 교수가 주인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식당 주인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등을 두드리며 인자한 노인이 미소를 보였다.

“괜찮아. 삶은 추억으로 버티는 거 아닌가. 자네들 생각을 간간이 하면서 이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게 내 삶인 거야. 그나저나 이제 자네들도 늙었구먼.”

이상민 장관이 김치찌개를 떠서 한입 크게 먹었다.

“와우, 사장님 솜씨는 여전히 훌륭하네요.”

“나야 항상 똑같이 만드니까. 아, 이 늙은이가 주책이지. 자네들도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어여 얘기 나누시게나.”

뒤돌아 주방으로 향하는 식당 주인. 이제는 완연한 노인이 된 사장의 뒷모습에 데이비드 오는 씁쓸함과 애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이비드 오가 수저를 들고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이 칼칼한 맛. 풍부한 돼지기름에 아낌없이 들이부은 양념장. 무엇보다 새콤한 주인장의 신김치에서 나오는 풍미가 일품이었다.

20년 전 맛 그대로였다.

이상민 장관이 데이비드 오 교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어떤가, 옛날 생각나지?”

이상민 장관은 S대 서양화과 선배였다.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으며 부쩍 친해진 두 사람은 낮에는 작품 준비를 하고 밤에는 논문 작업을 이어가며 치열한 청춘을 함께 보냈다.

소주를 좋아했던 두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곳 허름한 백반집에서 불안한 예술가의 미래를 잊곤 했다.

이상민 선배는 예술에 진심이었고 데이비드 오는 그런 선배를 존경했었다.

이상민 장관이 소주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곳이 항상 그리웠네. 그때 우리가 논했던 수많은 예술 담론을 기억하나? 나는 한순간도 그걸 잊은 적이 없어.”

데이비드 오 교수도 술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그땐 저는 선배도 예술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민 장관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지. 그랬었지.”

박사 학위 취득 후 두 사람의 행보는 달랐다.

데이비드 오는 원래 계획했던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지독한 가난과 더러운 인종차별을 버텨야 했던 뉴욕 생활. 아무도 찾는 않는 전시를 이어가며 악착같이 버틴 결과, 세계적인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반면 이상민 선배는 안정된 삶을 선택했다.

작은 갤러리에 취업해 행정업무를 시작했고, 각종 미술 단체 부장, 국장, 이사,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직함을 달며 실질적인 예술계 실세로 자리 잡았다.

이상민 장관이 데이비드 오 교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솔직히 자네 만큼 예술적 재능은 없었으니까. 자네가 알아둘 게 있어. 나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훌륭한 예술가들이 마음껏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거라네. 작가는 혼자 잘나서 되는 게 아니야. 안 그런가?”

데이비드 오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교수가 되어보니 알겠더군요.”

하지만 20년 전, 그때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박사를 취득한 데이비드 오는 이상민 선배에게 함께 뉴욕에서 예술을 해보자고 제안했었다. 그때 그가 쏟아냈던 현실적인 조언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철없는 이상주의자’라는 쓴소리였다.

배신감을 느꼈던 걸까?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예술가를 꿈꿨다는 선배의 지난 말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좋은 예술가 동료이자, 함께 어려움을 극복할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선배와 치열하게 싸우고, 홀로 뉴욕으로 떠난 데이비드 오.

뉴욕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갈 무렵, 이상민 선배의 현실적 선택이 부러우면서도 배신이라는 선택을 한 그를 원망했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데이비드 오도 교수로서 예술 행정에 몸을 담게 됐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이상민 선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선배 덕분에 한국 예술계가 이렇게 자리 잡았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하하하하.”

이상민 장관이 호쾌하게 웃으며 출렁거리는 잔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지하군, 데이비드.”

“…….”

찌개 속 돼지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이상민 장관이 말했다.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방어적 자세를 취했다.

“주변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상민 장관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오한결 작가가 필요한 걸세.”

“!!”

물을 한 모금 마신 이상민 장관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말했다.

“오한결 작가의 정체가 뭐지?”

“…….”

“학교 후배인가 싶어 찾아봤더니, 이름도 낯선 지방대 출신이더군.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친구도 아니었고 말이지. 그런데 불현듯 나타나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당선되고 완벽한 개인전으로 잡음을 없애버렸지. 그 뒤 예술로 프랑스를 뒤집어 놓았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고민하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직접 연락해 보시죠.”

“섣불리 다가갔다간 반감을 살 수 있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데이비드 오 교수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말했다.

“왜 반감을 산다고 생각하죠?”

잠시 뜸을 들인 이상민 장관이 나직이 말했다.

“자네를 닮았을까 봐. 오로지 힘든 길만이 예술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게 왜 문제가 되죠?”

“내 제안은 좀 파격적이거든. 험난한 인생 따위 겪지 않아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예술가로 살 수 있는 거지. 내 사람이 된다면 말이야.”

이상민 장관의 거침없는 말에 데이비드 오 교수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부끄러운 삶을 제안하시는군요.”

이상민 장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훗, 재밌구먼. 솔직히 말하게, 자네가 과거에 겪은 그 고통을 다시 겪으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나?”

“!!”

“거봐,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지.”

데이비드 오 교수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오한결 작가를 통해 얻으려는 게 뭔가요?”

이상민 장관이 데이비드 오를 순진한 아이처럼 바라봤다.

“데이비드, 정말 모르겠나? 문체부 장관 좋지. 하지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란 말이야. 세상을 바꾸려면 법을 만들 힘이 필요하네. 행정관료가 아니라 법을 통해 예술계에 영구적 혜택을 주고 싶단 말일세.”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거군요.”

“겨우 알아듣는구먼. 하하.”

“결국 오한결 작가는 홍보용이군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예상했지만……. 저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다시 앉게나. 20년 만에 만난 자리를 이렇게 끝내지 말게.”

데이비드 오 교수가 가게 문을 열고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오한결 작가는 저처럼 모진 고난을 겪는 작가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대접받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고 있죠. 선배님이 생각한 미끼들은 다 소용없을 겁니다.”

쾅!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는 데이비드 오 교수.

이상민 장관은 닫힌 가게 문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구나. 데이비드.”

이상민 장관이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찌개를 맛보았다.

‘꺄! 여전히 너무 맛있구먼.’

이상민 장관이 수저를 들고 가게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공깃밥 좀 주시겠어요? 너무 배가 고프네요.”

잠시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보며 이상민 장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짜식, 좀 먹고 가지, 까칠하기는.’

* * *

오한결이 피자와 치킨을 양손 가득 들고 연습실 문을 열자, 발레 연습을 하던 단원들이 코를 킁킁대며 소리를 질렀다.

“와! 이 냄새는!!”

노진홍이 재빨리 다가와 음식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작가님, 드디어 한국에 오셨군요.”

노진홍의 어깨를 토닥인 오한결이 단원들을 힐끔거렸다.

“잘하고 있지? 우선 간식 포장부터 풀자. 다들 배고픈 눈치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간식을 받아 들고 연습실 구석 테이블에 펼쳐놓았다.

오한수가 닭 다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형, 고마워. 잘 먹을게!!”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노진홍을 바라봤다.

“진홍 씨도 가서 먹어요. 배고플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요즘 식단관리를 하고 있어서요.”

“아……. 개인 연습량이 꽤 될 텐데, 관리도 해야 하는군요.”

“제가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 하하.”

나란히 의자에 앉은 오한결과 노진홍은 허겁지겁 간식을 먹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오한결이 물었다.

“좀 어때요? 단원들 실력이 늘었나요?”

“네, 기대 이상이에요. 솔직히 너무 열심히 연습해서 놀랐어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덕분에 저도 많은 자극을 받고 있고요.”

“목표가 있으니까 열심히 하는 거겠죠.”

“목표라…….”

오한결이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수가 그러던데요. 진홍 씨가 발레 뮤지컬을 해보자고 했다고.”

잠시 뜸을 들인 노진홍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오한결이 고개 돌려 노진홍을 바라봤다. 근심 어린 눈빛과 굳게 닫힌 그의 입술이 노진홍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단원들의 실력에 확신이 없는 건가요? 그거라면 더 연습하면…….”

노진홍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노진홍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저예요. 제가 뮤지컬 공연을 기획할 능력이 없다는 거죠. 저 또한 학생일 뿐입니다. 아직 번듯한 공연 한번 한 적 없는 애송이인걸요. 발레 동작 정도는 가르칠 수 있지만, 공연을 기획하고 안무를 짜는 건 제 능력 밖입니다.”

피자와 치킨을 입에 마구 쑤셔 넣는 동생을 보며 오한결이 말했다.

“음……. 어쨌든 한수는 무척 기대하고 있어요.”

“……솔직히, 지금 후회 중이랍니다.”

오한결이 단호하게 물었다.

“노진홍 씨는 발레가 즐겁습니까?”

노진홍이 고개를 돌려 오한결을 바라봤다.

“네. 최근에 단원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았어요.”

“그 깨달음을 표현하면 어떨까요?”

“네? 그게 무슨…….”

“노진홍 씨는 아직 학생 신분이라 경험과 실력이 부족하죠. 하지만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

“흥분과 기대로 가득했던 발레의 시작. 피나는 노력 끝에 입학한 국내 최고 예술대.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친 재능에 대한 회의. 우연히 찾아온 단원들과의 인연 그리고 깨달음.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요.”

생각에 빠진 노진홍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흔해 빠진 거 아닙니까? 분명 제겐 의미 있지만, 따지고 보면 누구나 겪는 변화라고 생각하는데요.”

“누구나요? 자신의 경험을 너무 깎아내리는 거 아닙니까?”

“…….”

오한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건 느낌입니다. 모든 과정에서 느꼈던 노진홍 학생의 감정을 춤으로 표현해달라는 겁니다.”

“!!”

“노진홍 학생의 이야기를 창작뮤지컬로 구성해보세요. 음악과 춤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노진홍의 인생 이야기를 하나의 연극으로 만드는 겁니다. 경쾌한 리듬과 통통 튀는 멜로디, 현대적 비트를 섞어서 말이죠. 자유롭고 유쾌한 안무는 물론 박진감 넘치는 강렬한 퍼포먼스도 필요하겠죠.”

잠시 생각에 잠긴 노진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전해보고 싶어요!”

오한결이 중얼거렸다.

“빌리 엘리어트처럼.”

노진홍이 씨익 웃으며 말을 따라 했다.

“빌리 엘리어트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