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김치찌개
프랑스 샤를 드골 국제공항.
왕 팀장이 눈시울을 붉히며 오한결과 최하늘을 바라봤다.
“너무 서운한데. 이렇게 헤어진다니 말이야.”
최하늘이 눈물을 잽싸게 훔쳤다.
“한국에 도착하면 이사장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너무 고생하신다고.”
“꼭 부탁해요. 적당히 말고 자세히…….”
“아, 그럼요. 그건 제 전문입니다!”
“오! 역시, 최하늘 씨는 유능한 직원인 게 틀림없어요.”
두 사람 대화를 듣던 클로에가 빈정대는 말투로 말했다.
“두 사람 같은 회사 직원이잖아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보는 것 같고. 매번 헤어질 때마다 이랬어요?”
클로에의 말에 왕 팀장과 최하늘이 두 눈을 껌뻑이며 멍을 때렸다. 왜 이렇게 정이 들어버렸지? 솔직히 친해지고 싶은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너무 둔하시다. 정말 모르겠어요?”
클로에가 오한결을 바라봤다.
“오한결 작가님 때문이잖아요. 프랑스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으니까, 문화재단 직원들도 덩달아 일이 많아졌던 거고, 자연스레 추억도 대폭 늘어났겠죠.”
왕 팀장과 최하늘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자, 오한결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좀 나대는 바람에 문화재단 직원분들이 고생 많았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주신 거 정말 고맙고 한편으론 죄송해요.”
왕 팀장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닙니다. 오한결 작가님 덕분에 레지던시 입주 작가 문의가 끊이지 않아요. 오한결 작가님 기운을 받고 싶다나, 뭐라나. 하하하.”
시계를 확인한 오한결이 말했다.
“이제 진짜 가야 해요. 꼭 다음에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오한결이 왕 팀장과 클로에를 살포시 안아 주고 길을 나서는데,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를 받자마자 알랭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공항에 도착했어요.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아직 출발 전입니다만.”
잠시 뒤 알랭과 루이스 교수가 오한결을 발견하고 부랴부랴 뛰어왔다.
땀을 뻘뻘 흘리던 알랭이 오한결 작가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아, 아니……. 왜 갑자기…….”
오한결이 놀라 버벅거리자 알랭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진정한 예술가에 대한 경의입니다, 작가님.”
너무나 열성적인 반응에 오한결이 질색하는 표정을 가까스로 감추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배웅도 해주시고요…….”
“프랑스가 오한결 작가님께 친절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 사죄드립니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재밌는 경험을 했습니다.”
루이스 교수가 슬며시 오한결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저는 처음부터 오한결 작가님이 마음에 들었어요. 저는 당당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회의적입니까?”
“음, 글쎄요. 원래 생각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동양 예술을 연구하고 싶어졌어요. 제가 직접 객관적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면서 말이죠.”
“굉장히 솔직하신 분이시군요.”
루이스 교수가 아이처럼 웃었다.
“그럼요. 솔직하면 좋잖아요. 그럼 조금만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퍼포먼스 이후 작가님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인왕제색도>를 우리 학교에 기증하다니요. 왜 그러신 거죠?”
왕 팀장과 최하늘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오한결을 쳐다봤다. 안 그래도 작품 기증 의사를 밝히는 순간, 오한결은 두 사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간단합니다. 프랑스에 남아야 세계적인 이목을 끌 수 있으니까요.”
“오호라,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언젠가 다시 회수할 겁니다.”
“이런, 학교도 알고 있나요?”
“물론이죠. 조건부 기증이니까요.”
오한결이 시계를 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마지막입니다. 이제 가야 해요.”
오한결이 최하늘과 자리를 뜨려는데, 클로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클로에가 급히 달려와 오한결을 껴안고 볼에 꾹 입술 자국을 남기자, 최하늘은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클로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나자, 이번엔 루이스 교수가 오한결의 다른 쪽 볼에 입술을 들이댔다.
오한결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이, 최하늘은 다리가 풀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왕 팀장이 최하늘 곁에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요? 어제 마신 술이 안 깼나요?”
최하늘이 왕 팀장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으려고 하는데, 두 사람의 품에서 벗어난 오한결이 최하늘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갑작스러운 오한결의 행동에 감동한 최하늘이 중얼거렸다.
“작가님…….”
“가시죠. 최하늘 씨. 갈 길이 멉니다.”
“네…….”
오한결과 최하늘이 멀어져 가자, 왕 팀장, 클로에, 알랭, 루이스 교수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팔을 흔들었다.
* * *
인천국제공항.
오한결과 최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자, 노을과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오한결 작가님!!”
오한결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너희들이 여긴 무슨 일로?”
최무열이 오한결의 캐리어를 낚아채며 말했다.
“와, 엄청 서운하네. 보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온 사람보고 왜 왔냐니?”
노을이 최하늘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
“언니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난 너무 반가운걸.”
오한결이 머리를 긁적이며 눈치를 살폈다.
“너희들 힘들까 봐 그런 거지. 내일 봐도 되는데.”
“일주일을 못 봤는데 그런 서운한 말씀을! 오늘 공항에 마중 가자는 의견이 있어서 바로 수락했죠.”
오한결이 잠시 멈춰서서 물었다.
“누가 그런 제안을 했어?”
“서정익 작가가요.”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를 쳐다보자, 그가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 서정익 작가.”
“……네.”
서정익을 제외한 모두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최하늘이 말했다.
“제 차가 주차장이 있거든요. 이동은 제가 책임질게요. 식사부터 하실까요?”
노을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트화랑으로 가요! 미숙 언니가 식사 준비 다 끝냈대요.”
차량 흐름을 완벽히 읽어내는 능력.
부드러운 곡선 주행, 완벽한 차선 변경까지.
최하늘의 완벽한 운전 실력 덕분에 30분이나 일찍 아트화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트화랑에 들어서자, 음식을 준비하던 홍미숙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한결 학생이구나. 일주일 사이 홀쭉해졌네!”
홍미숙이 홍철수 사장을 부르자, 그가 탕비실에서 재빨리 나왔다.
“이야! 우리 세계적 스타 오한결 작가님 오셨구나!”
오한결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출장 다녀왔습니다. 하하.”
잠시 뒤, 홍미숙의 지시로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세팅했다.
김치찌개, 고추장찌개, 된장찌개.
그리고 갈비찜과 각종 부침까지.
최무열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오늘 무슨 명절이에요? 음식이 대박이네. 피자 만드실 줄 알았는데.”
홍미숙이 간장게장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피자 많이 먹었겠지. 이젠 한국 음식으로 기름칠을 해야 해.”
오한결과 최하늘이 웃으며 눈을 마주쳤다. 왕 팀장 덕분에 피자 대신 프랑스 가정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뿐이었다.
홍철수가 오한결을 바라봤다.
“프랑스 교수들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더구나. 살면서 그렇게 통쾌한 적이 또 있나 싶어.”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고 하던데요.”
“그래……? 고집은…….”
최무열이 주먹을 쥐고 말했다.
“원래 내가 오한결 작가님 전속 카메라맨인데. 아쉽다! 내가 찍었으면 더 멋지게 나왔을 텐데.”
노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상 보니까 그거 찍은 사람 완전 전문가 솜씨던데. 너 너무 자만하는 거 아냐?”
홍철수가 은근 기대하며 물었다.
“혹시 작품을 실물로 볼 수 있을까?”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뇨. 프랑스에 전부 기증했어요.”
“!!”
노을이 최하늘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언니가 말렸어야죠! 아, 너무 아까워.”
홍미숙의 목소리가 넌지시 들려왔다.
“한결이 학생이 그랬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
오한결이 홍철수 사장을 바라봤다.
“<도둑맞은 문화재>와 <인왕제색도>는 프랑스에 있을 때 빛을 발할 수 있어요. 그들만큼 예술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쯤 최고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을 거예요.”
홍철수 사장은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기분이 꼭 뺏긴 것 같단 말이지. 마치 문화재를 약탈당한 것처럼.”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작품 모두 ‘삼각지 거리’로 회수할 겁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홍철수 사장이 물었다.
“뭐라고? 여기로?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오한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직 비밀입니다.”
홍철수 사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쩝, 아쉽구먼. 하하.”
그 사이 최하늘이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노을과 최무열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 부러워!”
“나도 갈래, 프랑스!”
“근데 선물은 없어요?”
최하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에서 산 선물을 꺼냈다.
에펠탑을 품은 ‘스노우볼’과 프랑스 원어의 ‘어린왕자’ 책.
뜻밖의 선물에 모두 충격에 휩싸인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 아……. 선물. 고맙습니다. 좋네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오한결과 다르게 최하늘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말리기에는 작가님이 너무 진지하셨어요…….’
식사가 마무리되자, 각자 커피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눴다.
서정익 작가 혼자 구석에 앉아 있자, 오한결이 다가가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
잠시 뜸을 들인 서정익 작가가 입을 열었다.
“그 그림들을 어떻게 회수할 건데요? 어떤 계획인지 말해주면 안 돼요?”
“아, 그게……. 미술관을 지으려고. 오한결 미술관”
“그렇군요. 역시.”
“생각보다 안 놀라는구나. 보통은 잘 안 믿거든.”
“저는 믿어요. 분명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오한결이 씨익 웃자, 서정익도 웃음으로 대답했다.
* * *
오한결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부모님이 격하게 반겼다.
“왔구나. 한결아!”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헤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머니가 부엌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얼마나 한국 음식이 먹고 싶었을까. 한결이가 좋아하는 갈비찜하고 김치찌개 잔뜩 끓여 놨다. 어서 씻고 밥 먹자.”
몇 시간 전에 비슷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오한결은 내색하지 않고 웃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와! 엄청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아버지가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며 말했다.
“프랑스에서 말도 안 통했을 텐데. 고생이 많았다.”
“저 불어 잘해요. 그리고 문화재단 직원이 도와줘서 재밌게 다녀왔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근데 불어도 하니?”
“……네.”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피해 오한결은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맛있게 갈비를 뜯던 오한결을 어머니가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구나. 아버지는 떨린다고 생방송 안 보고 나중에 봤단다.”
아버지가 짜증을 냈다.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래! 그리고 내가 왜 안 봐! 보긴 봤다고.”
“나한테 결과 어떻게 됐냐고, 방에서 물어볼 땐 언제고! 보긴 뭘 봐요!”
“내가 언제 그랬어!”
“이틀 전에!”
두 분의 갑작스러운 언쟁에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한수는요?”
“걘 요즘 매일 늦게 온단다. 발레 연습을 한다지, 아마.”
오한결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열심히 하나 보네요.”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구나. 잘 돼야 할 텐데.”
오한결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대답했다.
“제가 도와주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