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74화 (74/202)

제74화 인왕제색도

파리 보자르 본관에 들어선 오한결 일행.

먼저 도착한 알랭이 과장된 몸짓으로 오한결을 맞이했다.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어요. 저는 누구 편이라고 말은 못 하겠으나, 오한결 작가의 천재적인 능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오한결이 히죽 웃었다.

“이 학교 교수들이 참 보수적이더군요. 참 피곤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알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성취한 사람들은 지켜야 할 게 많은 법이죠. 오한결 작가님 실력으로 변화를 이끌어 주세요.”

총장이 슬쩍 다가와 오한결에게 악수를 청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알랭의 손님이라 저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총장을 잡은 손에 힘주며 오한결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총장님은 자신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뿐이죠. 다만, 오늘을 기점으로 교수들이 동양 예술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해야 할 겁니다. 그게 학생들을 위해 좋을 테니까요.”

총장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만만하군요.”

“물론이죠. 저는 ‘미디어 광대’니까요.”

“!!”

오한결과 총장은 서로의 눈을 오랫동안 피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선뜻 그들의 팽팽한 기 싸움을 말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인들에게 예술은 자존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였다.

프랑스 교수들은 오한결의 당당한 태도, 무엇보다 가르치려는 그 말투가 몹시 불쾌하고 싫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명문 미술학교는 동양의 작은 나라의 작가 충고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신했다.

미디어가 오한결을 찬양한 건 실력이 아닌 호기심 때문일 것이라고.

곧 오한결의 실체가 드러날 예정이다.

프랑스가 들썩이고 있다.

오한결이 먼저 총장의 손을 놓고 방긋 웃어 보였다.

“안내해주세요. 이제 시작해야죠.”

총장의 안내로 실기실에 도착한 오한결 일행들.

오한결의 요청대로 대형 붓과 5미터가 넘는 화선지가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실기실 천장 구석마다 고화질 카메라가 보였는데, 오한결의 퍼포먼스를 입체적으로 담기 위해 설치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무대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대략 30개 정도의 의자들이 보였다.

왕 팀장이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교수들이 저곳에 앉아서 구경하나요?”

최하늘이 역정을 냈다.

“학생 실기를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하는 거 아닌가요?”

총장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최소한의 인원을 배치한 것뿐입니다. 구경거리로 만들려 했다면 더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겠지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한결이 최하늘을 바라봤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상관없으니까.”

잠시 뒤, 실기실 문이 열리고 파리 보자르 교수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왔다.

실기실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그들은 학생 실기를 평가하는 눈빛으로 오한결을 응시했다.

붉은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루이스 교수가 오한결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오늘이군요. 오한결 작가님.”

오한결이 팔짱을 끼고 루이스 교수를 쳐다봤다.

“그동안 제 의견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알제리의 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라……. 그거라면 충분히 고민해 봤어요. 관점에 따라 오한결 작가님 생각이 맞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어요. 역사적으로 서양은 언제나 우세했고 폐쇄적 사회를 이룬 동양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역할도 분명히 수행했으니까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적 세계관을 긍정적으로 대변하는 하나의 이론일 뿐입니다.”

“서양 예술이 더 우월하다는 말로 들리네요.”

루이스 교수가 어깨를 삐쭉 올렸다.

“뭐, 서양인이 보기엔 동양 미술이 흥미롭긴 하죠.”

“아직 동양의 진짜 작품을 보지 못했나 보군요.”

루이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러게요. 오늘 오한결 작가님 작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까요?”

루이스 교수가 뒤돌아 자리로 돌아가는데 오한결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교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 하찮은 일에 관심 없습니다. 무엇보다 착각은 개인의 자유니까요.”

오한결을 등진 루이스 교수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최하늘과 왕 팀장은 고소해 죽겠다는 듯 킥킥킥 대놓고 웃어댔다.

파리 시각 오후 1시.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맨발로 화선지를 밟고 올라선 오한결.

대형 붓을 꼭 쥐고 생각에 잠겼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보여주자. 한국의 미와 정서가 물씬 풍기는 걸작을 이곳에 펼쳐 놓는 것이다.

동양화의 가치를 일깨워주어야 한다.

오한결의 머릿속에 오로지 한 작품만 떠올랐다.

한국의 ‘국보’로 지정된 위대한 그림.

<인왕제색도>

조선의 천재 화가 겸재 정선의 작품!

한국의 국보를 이곳 프랑스 한복판에서 퍼포먼스로 재연해보자.

먹은 잔뜩 묻힌 대형 붓을 화선지 상단에 찍어 눌러 그어버리는 오한결.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에서 녹화를 알리는 붉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수직으로 붓을 세운 오한결이 다시금 화선지 상단을 거칠게 찍어댔다.

거침없는 그의 행보에 교수들은 오우, 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인왕제색도>는 오랜 장맛비가 그친 뒤 안개가 가득한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오한결은 눈을 감고 인왕산의 모습을 떠올렸다.

산을 가득 메우는 바위 봉우리들과 산허리를 감싸는 울창한 수풀.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재연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겸재 정선은 왜 인왕산을 그렸는가!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인왕제색도>에서 느껴지는 간절함과 슬픔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오한결이 그림 상단 가득 바위 봉우리를 시커멓게 칠하자, 그 거대한 모습에 압도감이 느껴졌다.

몇몇 교수는 그림을 자세히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가족 같은 벗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정선의 비통함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정선의 벗, 시인 이병연.

여든이 넘은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나려 한다.

수십 년간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눴던 그들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완성한 며칠 뒤, 시인 이병연은 세상을 떠난다.

오한결은 과감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림을 계속 그려나갔다.

먹물이 채 마르기 전에 긋고 또 그어 일부를 뭉개자, 화면 하단에 울창한 소나무와 활엽수가 존재를 드러냈다.

다시금 이어지는 힘차고 거친 붓질.

오랜 세월을 이겨낸 화강암 봉우리는 인왕산이 내뿜는 천기의 상징이리라.

그 아래로 하얀 연운이 가득 피어오른다.

자욱이 깔린 연운은 여백으로 남아 음과 양의 조화, 흑과 백의 효과를 만들어 냈다.

수직적 붓질로 그린 봉우리와 연무를 표현한 여백, 소나무와 활엽수 숲의 수평적 조화까지. 수직과 수평의 자연스러운 결합을 만들어 낸 조선의 천재 화가 겸재 정선.

교수들이 감탄한 얼굴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산 위는 올려다보는 시점, 산 아래는 내려다보는 시점이군요.”

“그렇군요. 바로 앞에서 산을 보는 듯한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굉장합니다. 한국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요? 왜 우리는 몰랐습니까?”

교수들이 웅성거리며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이,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던 날카로운 인상의 교수가 중압감 있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처음부터 옳았습니다. 그는 동양 미술의 예술성을 훌륭하게 증명해 냈어요.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그가 이런 수고를 감수해야 했으니까요.”

중간에서 이런 분위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였으나, 모두가 오한결이 보여준 기백에 밀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한 표정의 루이스 교수가 오한결 곁으로 다가갔다.

“증명했군요. 오한결 작가님.”

땀을 닦고 생수를 벌컥 들이킨 오한결이 미소 지었다.

“이제 좀 보이시나요?”

“네. 거친 바위가 가득한 이 산에는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고 하단에 위치한 울창한 숲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자연의 모습을 몇 번의 붓질만으로 표현하셨어요. 보고도 믿을 수 없네요.”

루이스 교수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백을 중요시하는 다른 동양화와 다르게 바위산으로 가득 채운 것도 꽤 흥미롭군요. 그래서인지 굉장히 강렬해 보여요. 실제로는 바위 봉우리는 흰색일 텐데 저렇게 흑색으로 칠해 놓으니 그 묵중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림 곳곳에 드러나는 흑과 백의 조화, 수직 수평적 붓 터치, 올려다보는 시점, 내려다보는 시점, 짧고 긴 선들의 어울림. 그리고 먹먹해지는 감성적 느낌까지.”

루이스 교수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완벽합니다.”

* * *

데이비드 오 교수가 연구실 책상에 앉아 오한결의 퍼포먼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영상이 끝나자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오한결. 오한결. 오한결!

데이비드 오 교수가 피식 웃었다.

굉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표현이군.

오한결의 한계란 대체 어디까지란 말인가.

과연 그에게 한계가 있긴 한 걸까?

해외 예술계에서 인정받는 데이비드 오도 뿌리 깊은 동양 예술인 차별을 피할 수 없었다.

최고의 대처 방법은 무시하면서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하는 거였다.

하지만 기분 나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라면 분명 거짓말일 테니까.

데이비드 오 뿐만 아니라 서양에 진출한 동양 작가들은 소위 ‘예술 강대국’이라는 곳에서 그런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제는 중년이 되었지만 한때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도 오한결 같은 패기가 있었다.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한계는 그럴듯한 변명이었는데.

오한결이 그 한계를 오늘 과감하게 부숴버렸다.

이제 변명조차 할 수 없도록.

오한결이 파리 보자르에서 유럽의 예술을 선보였다면, 데비이드 오는 실망했을 것이다.

아무리 완벽하고 이상적인 그림을 선보인다 해도 말이다.

천재적인 실력으로 그들의 예술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동양 예술을 선택했고 그것도 한국의 위대한 걸작을 보여줬다.

오한결의 손에 탄생한 <인왕제색도>는 원본 그 자체였다.

감히 국가 보물을 어설프게 재현했다면, 오한결의 예술 인생도 끝났을 것이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그 작업을 오한결이 완벽하게 해냈다.

화선지에 검은 묵이 층층이 쌓이는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웅. 웅. 웅.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네, 데이비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나 이상민일세. 잘 지냈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배. 아니 장관님…….”

[혹시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했나? 실례가 됐으면 용서하게.]

“……아니요. 아직 학교 연구실에 있습니다.”

[오한결 작가의 영상을 봤던 게로군.]

“……네.”

[다름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나?]

잠시 고민하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그러죠. 시간은 장관님 스케줄에 맞추겠습니다.”

[고맙네. 조만간 비서가 전화할 걸세. 그때 일정을 조율해 보자고.]

전화를 끊은 데이비드 오 교수가 미간에 주름 잔뜩 잡았다.

이상민 문체부 장관.

한때 데이비드 오가 존경했던 선배.

하지만 이제는 끝없는 욕망의 소유자.

다시 그를 만날 때가 다가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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