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미디어 광대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 저택.
무겁게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신태진 회장이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다.
“큰일이군. 오한결 작가가 일을 너무 크게 만들었어요.”
이현미 미술관장이 휴대폰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와 관련된 기사들이 한국과 프랑스 언론사에서 쏟아지고 있어요. 한국 기사는 그를 응원하는 쪽이지만, 프랑스 기사는 대체로 오한결 작가를 헐뜯거나 얕잡아 보고 있어요.”
“한국의 신인 작가가 프랑스 자존심을 건든 겁니다. 그들의 예술적 권위에 도전장은 내민 거죠. 자칫 오한결 작가의 커리어가 끝날 위기에 처해있어요. 이를 어쩐다…….”
회장 부부가 내뿜는 우울함 때문에 복실이도 바닥에 드러누워 축 처져 있었다.
신태진 회장이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유튜브로 실시간 방송을 한다고요?”
“파리에서 오후 1시에 퍼포먼스를 한다고 했으니, 한국 시각으로 오후 9시에 방송될 거예요. 서울과 파리의 시차는 8시간이니까요. 이제 30분 남았어요.”
“그렇군요.”
이어지는 깊은 침묵과 간간이 들리는 회장 부부의 짙은 한숨이 저택의 분위기를 더욱 짓누르고 있었다.
띠리리.
털컥.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신수진 이사장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어요!”
벌떡 일어선 복실이가 꼬리를 마구 흔들며 신수진 이사장을 향해 돌진했다.
“복실아! 이쁜 것. 잘 지냈어? 언니 안 보고 싶었어?”
왈왈!
“보고 싶었다고? 호호, 여기 복실이 간식도 사왔지롱.”
왕왕! 왈왈!
“기다려!”
낑-!
복실이가 혓바닥을 내밀고 헥헥거리자, 신수진 이사장이 간식을 복실이 앞에 놓고 먹으라고 말했다.
“천천히 먹어야지. 그렇게 맛있어?”
왈왈!
복실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던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돌려 과묵하게 앉아 있는 회장 부부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요? 분위가 굉장히 어둡네요.”
한숨을 크게 내쉰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너는 걱정도 안 되느냐? 오한결 작가는 지금 프랑스에서 수모를 겪고 있는데 말이다.”
신수진 이사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수모를 겪는다고?”
이현미 미술관장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파리 보자르 말하는 거잖니. 얘는 잘 알면서 그런다.”
신수진 이사장이 회장 부부 앞자리에 털컥 주저앉고 말했다.
“아주 잘 알죠. 그러니까 이렇게 와인 갖고 온 거잖아요. 오한결 작가의 퍼포먼스를 두 분과 함께 즐기려고요.”
신수진 이사장이 와인병을 흔들며 미소짓자, 신태진 회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수진이 너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구나.”
신수진 이사장이 부모님의 얼굴을 게슴츠레 쳐다봤다.
“설마 두 분, 오한결 작가가 망신당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그걸 이제야 알겠니? 파리 보자르 교수들을 도발했는데 아무리 오한결 작가라도 이번 문제는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야.”
흥분한 아버지의 모습에 신수진 이사장이 냉정하게 대응했다.
“아버지! 오한결 작가를 믿지 못하시면 어떡해요? 그간 보여준 신뢰는 허상이었나요?”
“……그게, 그래도 신인이잖니.”
신수진 이사장이 이현미 미술관장을 쳐다봤다.
“어머니도 믿지 못하셨고요. 그래서 두 분이 이러시는 거군요.”
“프랑스 언론이 심상치 않으니까…….”
잠시 뒤, 신수진 이사장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안면에 힘을 잔뜩 주었다.
“오한결 작가입니다!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자이며 파격적인 개인전으로 아리미술관 역사에 기록된 작가예요.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그가 이미 완성된 작가란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요!”
놀란 신태진 회장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맞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딸의 말대로 오한결 작가는 처음부터 완성된 작가였다.
그가 보여준 모든 작품과 퍼포먼스들은 완벽한 수준을 자랑했었다.
프랑스 파리의 저명한 미술학교 교수들을 상대로 홀로 전투를 벌이는 오한결.
오한결 작가는 프랑스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을 밟고 있을 뿐이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증명 말이다. 그간 보여준 완전무결한 예술적 성취가 그 증거였다.
이현미 미술관장도 신태진 회장과 같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오한결 작가를 의심했던 게 부끄럽게 느껴지는구나.”
신태진 회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문화재단이 지원을 좀 해줘야 하지 않겠니?”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최고의 촬영 감독을 붙여줬어요. 오한결 작가의 퍼포먼스라면 최소한 영화 수준으로 방송돼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오한결 작가에게 딱 한 마디를 해줬어요.”
“뭐라고?”
“본때를 보여주라고.”
긴장이 풀린 회장 부부가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스크린 방으로 가시죠.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곧 시작할 테니까요.”
* * *
같은 시각 아트화랑.
홍미숙의 피자 굽는 냄새가 화랑을 가득 채우고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캔맥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홍철수 사장이 대형 텔레비전을 최무열과 함께 화랑 구석에 설치 중이고 노을과 서정익 작가는 한국과 프랑스 언론을 검색하고 있었다.
서정익 작가가 프랑스 기사를 읽고 말했다.
“와, 오한결 작가님이 파리 보자르 교수들을 엄청 무시했나 봐. 지금 다들 벼르고 있는 것 같은데.”
노을이 콧방귀를 뀌었다.
“칫. 아직 오한결 작가님 실력을 모르는구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텐데. 호호.”
얘기를 엿듣던 최무열이 소리쳤다.
“파리 보자르 교수들 불쌍해서 어쩌냐. 오한결 작가님의 참교육 무서운데. 하하하.”
홍철수 사장이 텔레비전에 케이블을 연결하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형 텔레비전을 준비했잖아. 휴대폰으로 보기엔 너무 훌륭한 퍼포먼스일 텐데. 굉장히 기대되는걸?”
홍미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놓았다.
“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 파티를 준비해야지! 라고 생각했어요.”
최무열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 피자에 넘쳐나는 맥주까지. 오늘은 진짜 파티네요.”
서정익 작가가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파리 보자르면 굉장히 유명한 명문 미술학교인데. 난 좀 걱정되네요. 만약 오한결 작가님이 망신이라도 당하면……. 후폭풍이 굉장할 텐데.”
노을과 최무열이 동시에 외쳤다.
“무슨 소리!”
노을이 서정익 작가를 흘겨봤다.
“오빠, 다시는 그런 멍청한 걱정 따위 하지 말아요. 오한결 작가님이 누군데!”
“……미안. 내가 잘 못 했어…….”
텔레비전 설치를 끝낸 홍철수 사장이 말했다.
“최무열 학생, 유튜브 화면 나오게 세팅해줘요. 이제 곧 퍼포먼스 시작하니까.”
“네!”
* * *
파리 보자르 총장실.
긴장한 표정의 총장에게 파리아트매거진 고든 기자가 질문하고 있다.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는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총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루이스 교수의 연구 발표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놀란 고든 기자가 총장을 바라봤다.
“루이스 교수는 학자로서 꽤 권위가 높으신 분 아닙니까? 그분 발표에 이의를 제기했다고요? 그것도 동양에서 온 이름 없는 작가가요?”
“하하하. 그래서 루이스 교수가 훌륭하다는 겁니다. 보통은 무시하지요.”
“도대체 그 지적사항이 뭡니까?”
잠시 뜸을 들인 총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루이스 교수의 작품 해석이 ‘오리엔탈리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양 미술의 우수성도 시사했고요.”
고든 기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이데올로기 지적은 논쟁의 대상이 되나, 동양 미술의 우수성이요? 총장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재 흐름은 서양과 동양 미술의 고유한 특징을 고려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요. 하지만 현실을 외면한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양 미술이 갖는 미술사적 의미를 너무 축소했어요.”
“동양 미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서양 미술이며, 동양에서조차 미술을 전공한다고 하면 서양 회화를 얘기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서양 회화는 역사를 움직였고 시대를 앞서가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오한결 작가의 동양 미술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작품을 예상해보자면 먹으로 칠한 흑백의 단순한 그림이나, 서양 미술기법을 차용한 퓨전 작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총장의 말에 고든 기자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오한결 작가가 망신을 당하면 작가로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아량을 베풀 순 없는 건가요?”
“본인이 자초했어요. 동양에서 온 손님 정도로 생각했는데, 기어이 선을 넘은 거죠. 뜨거운 맛을 봐야 뜨거운 줄 아니까, 그게 문제지요.”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던 고든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오한결 작가는 누구입니까?”
총장이 피식 웃었다.
“글로벌 기업 명일그룹에서 만든 인터넷 스타입니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광대일 뿐이죠. 하하하.”
미디어 광대라는 말에 고든 기자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같이 웃었다.
* * *
파리 보자르 정문.
수많은 기자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멀리서 오한결이 수많은 인파를 보며 물었다.
“기자들이 왜 저렇게 많아요? 오늘이 무슨 날도 아니고.”
왕 팀장이 펄쩍 뛰었다.
“교수들을 상대로 도발해 놓고 이렇게 태평하면 어쩝니까! 아, 저는 스트레스로 쓰러질 것 같아요…….”
최하늘이 기자들을 살피며 말했다.
“지역신문, 공중파, 케이블, 인터넷 방송까지. 프랑스 언론은 모두 모인 듯싶은데…….”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화면빨 잘 받아야 할 텐데요. 요즘 피부가 좀 거친데, 걱정이네.”
왕 팀장이 오한결을 힐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놔, 도망갈까…….’
오한결이 정문 앞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플래시를 터트렸다.
번쩍. 번쩍.
“오한결 작가님!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무섭지는 않습니까? 본인의 실력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순간인데요.”
“진심으로 동양 미술이 서양 미술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하나요?”
쏟아지는 질문에도 오한결이 여유를 부리며 대답했다.
“저는 오늘 아주 기분이 좋고요, 유튜브에 몇 번 나온 적이 있어서 방송 출연이 무섭지는 않습니다. 하하.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하자면.”
오한결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저는 서양과 동양 미술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양 세계에 뿌리 깊은 동양 미술에 대한 차별과 단순한 호기심에 경종을 울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동양 미술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퍼포먼스를 준비했습니다.”
고든 기자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총장께선 서양 회화가 전 세계 미술시장을 지배한 까닭은 그 우월성에 있다고 하셨는데요. 작가님도 동의하나요?”
오한결이 고든 기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총장님이 생각보다 무식하네요.”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오한결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양 미술이 우위를 점하게 된 건 경제적, 사회적 변수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절대 수준 차이 때문은 아닙니다. 애초에 시작과 발전 방향이 달랐으니까요.”
붉은 머리 기자가 큰 소리로 질문했다.
“그래서 오늘 보여주려고 하는 작품은 뭡니까? 듣자 하니, 대형 붓과 먹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다던데요. 종이에 붓글씨라도 하실 모양인가 보죠? 아니면 난을 그릴 건가요?”
“하하하하.”
“하하하.”
비웃음 소리에 오한결은 동요하지 않고 기자를 바로 쳐다봤다.
“퍼포먼스 후 수많은 인터뷰가 있을 텐데, 당신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
고든 기자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오만하군요. 그러니까 총장이 이런 말을 한 거 아닙니까? ‘유튜브 스타’, ‘미디어 광대’라고.”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최하늘과 왕 팀장이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