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70화 (70/202)

제70화 미술사 세미나

파리 보자르로 향하는 길.

길을 잘 아는 왕 팀장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오한결과 최하늘이 부지런히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골목마다 물씬 풍기는 유럽의 감성에 매료된 최하늘이 결국 멈춰 서서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앞서 걷던 왕 팀장이 최하늘에게 소리쳤다.

“하늘 씨, 이러다가 늦겠어요!!”

최하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오한결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잠시 쉬었다 가시죠.”

아쉬움이 가득한 두 사람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왕 팀장이 말했다.

“저기 분수대 앞에서 마지막 한 장만 찍읍시다. 됐죠?”

“정말요?”

최하늘이 환하게 웃으며 분수대를 향해 총총총 걸어갔다.

어느새 최하늘을 따라 분수대 앞에 선 오한결이 말했다.

“왕 팀장님도 어서 오세요.”

“두 분만 찍으세요. 아저씨는 빠지렵니다.”

찰칵. 찰칵. 찰칵.

왕 팀장이 묵묵히 사진을 찍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찰칵. 찰칵.

‘그런데 분명 한 장만 찍기로 한 거 아니었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자 왕 팀장이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만!!”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보인 왕 팀장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최하늘과 오하늘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한 장을 더 찍고 나서야 일행은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잠시 뒤, 골목 어귀를 돌자 오랜 역사의 거대한 캠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학교 건물과 삼삼오오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한결 작가! 여깁니다.”

알랭이 손을 흔들며 오한결 일행을 맞아줬다.

“여기가 파리 보자르군요. 소문만큼 꽤 멋지네요.”

“맞습니다. 파리 보자르는 전통 있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예요. 이곳에 한국 학생들도 많이 다닙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마주칠 거예요.”

왕 팀장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캠퍼스 투어군요. 그렇다면 오늘은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몇 번 와봤거든요.”

알랭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요. 오늘 교수 세미나가 있어서 방문한 겁니다. 파리 보자르 교수들은 해외에서도 유명한 예술 학자들이라, 오한결 작가님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알랭의 말에 의욕이 꺾인 왕 팀장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아……. 그렇군요…….”

어느새 총장실 앞에 도착하자 알랭이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총장실 문을 열자,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중년 남성이 격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의 친구 알랭! 이게 얼마 만인가!”

알랭이 총장과 악수를 나뉜 뒤 오한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분이 내가 말한 그분일세. 한국에서 온 오한결 작가.”

“오! 오한결 작가!”

총장이 성큼 다가와 오한결을 거칠게 포옹하며 말했다.

“반가워요, 작가님! 미디어를 통해 작가님의 작품을 접하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를 겁니다. 프랑스 예술계가 작가님 때문에 들썩이고 있어요.”

알랭이 거들었다.

“물론 놀랄 수밖에. 센강에서 그린 <도둑맞은 문화재>와 힘이 느껴지는 그래피티 <흰소>를 직접 보면 더 놀랄 걸세!”

오한결이 총장을 슬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진심을 담은 예술은 국경을 초월하는 법이죠.”

총장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명언입니다. 자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총장실 구석에 마련된 원형 테이블에 오한결 일행이 둘러앉자, 총장이 푸른색 팸플릿을 나눠주었다.

“파리 보자르 홍보자료예요. 이왕 오셨으니까, 참고해주세요.”

오한결은 두꺼운 홍보자료를 뒤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미술 유학생들의 꿈인 프랑스 파리 보자르. 회귀 전 오한결이었다면 감히 쳐다볼 수 없었던 명문 미술학교였다. 인생 참 재밌지 않은가? 한국 대표 작가로서 파리 보자르 총장과 이렇게 면담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니.

알랭이 자료를 대충 뒤적이며 말했다.

“내가 다닐 때하고 별반 달라진 게 없군.”

최하늘이 알랭을 쳐다봤다.

“어머, 여기 학교 출신이세요?”

알랭이 거들먹거렸다.

“제가 말 안 했나요?”

“네.”

“……그렇군요. 암튼, 여기 나왔습니다…….”

“아, 네…….”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커리큘럼을 보니까 수업이 별로 없어요. 이건 왜 그런 거죠?”

총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중요한 걸 지적해 주셨어요.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유 시간을 늘려서 그런 겁니다. 우리는 학생들을 강의실에 앉혀 놓고 주입식 교육 따위 하지 않아요. 그런 억지 배움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죠.”

오한결은 자신의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교수와 학생들 간의 일방적인 소통 방식. 제왕적 교수가 내주는 과제와 주관적인 평가들.

빽빽한 수업과 과제에 치여 살면서 언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때마침 최하늘이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하고 많이 다르네요. 아는 동생도 매일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우거든요.”

알랭이 최하늘을 바라봤다.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프랑스 학생들도 매일 밤샘 작업을 한답니다. 대신 교수가 내주는 과제가 아니라 학생 개인이 작업을 찾아서 하는 거죠. 매년 프로젝트 단위로 수업이 진행됩니다.”

생소한 수업 방식에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자 총장이 입을 열었다.

“파리 보자르 수업은 아뜰리에 작업 방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학생이 알아서 해당 아뜰리에를 방문하고 담당 교수와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이죠. 모두 학생의 선택에 달렸고 자연스레 작업 종류도 제각각입니다. 물론 작업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할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죠.”

왕 팀장이 총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에이, 그러면 땡땡이치는 학생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졸업할 수 있겠네요. 그럼 불공평한 게 아닌가요? 누구는 놀면서 졸업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랭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학교를 왔는데 왜 놀아요?”

당황해서 항변하지 못하는 왕 팀장 대신 오한결이 말했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학생 개개인의 꿈과 성향 대신 입시 성적으로 전공을 결정하다 보니, 전공 공부를 소홀하게 되죠. 자연스레 졸업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왕 팀장님 시절만 해도 심했을 겁니다. 편하게 졸업하는 게 목표인 사람들 말이죠.”

오한결의 설명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알랭.

“그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왕 팀장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저는 안 그랬는데요…….”

총장이 잔뜩 양심에 찔린 얼굴을 한 왕 팀장과 알랭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런, 이런. 무슨 얘기를 하다가 거기까지 갔는지. 하하. 아무튼, 계속 설명 드릴게요. 파리 보자르는 학생들의 자율을 존중하면서 예술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수준 높은 이론 수업도 함께 병행합니다. 이게 다 우리 교수님들이 프랑스 최고 예술학 학자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총장의 설명이 끝나자 오한결이 학교 홍보물을 덮으며 말했다.

“세미나는 몇 시에 시작하나요? 총장님 설명을 듣고 나니 교수님들이 궁금해졌어요. 마침 오늘 모두 모인다고 하니 빨리 만나보고 싶군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총장이 말했다.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요. 지금쯤 모두 모였을 겁니다.”

오한결 일행은 기대감을 품고 총장을 따라 세미나실로 이동했다.

묵중한 세미나실 문을 열자, 어두운 배경에 빔프로젝트 화면만 덩그러니 보였다.

그 모습에 총장이 당황했다.

“이런, 벌써 시작했군요. 시간을 잘못 알았나 봅니다…….”

알랭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조용히 들어갑시다. 다행히 방금 시작한 것 같네요.”

총장과 알랭, 오한결 일행은 슬그머니 뒷좌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봤다.

연단 구석에서 안경 낀 교수가 레이저 포인터로 프로젝트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총장이 넌지시 말했다.

“오! 루이즈 교수군요. 미술사 이론을 전공한 프랑스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우린 정말 운이 좋네요. 훌륭한 연구 결과를 직접 들을 수 있으니까요!”

오한결은 화면에 떠 있는 그림을 단번에 알아봤다.

<알제리의 여인들>, 외젠 들라크루아 작품이었다.

루이스 교수가 낭랑한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갔다.

“이 작품을 잘 이해하려면 ‘이성’보단 ‘감각’에 의존해야 합니다. 유럽과는 다르게 열정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모로코 문화를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들라크루아는 이 근동지역의 오묘한 아름다움에 깊이 감명을 받은 거겠죠.”

오한결은 이맛살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문화를 이해하려면 ‘이성’보다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고? 저 교수 제정신인가?’

전형적으로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하는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오한결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이스 교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차분히 발표를 이어갔다.

“<알제리의 연인들>은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하렘’을 배경으로 하고 있죠. 그곳에서 베일에 싸인 여성의 내밀한 모습을 ‘실질적인 재현’을 통해 용기 있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이건 해방적 의미를 담은 명작 중에 명작이니까요.”

오한결은 불편한 심기에 입술을 삐뚤거렸다.

‘‘실질적인 재현’을 한 작품이라고? 베일 싸인 여성의 모습을 드러낸 용기 있는 작품이자 일종의 해방적 결과라고? 교수가 미쳤네.’

오한결이 한숨을 푹푹 쉬자, 최하늘이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작가님! 어디 아프세요?”

최하늘의 말을 들은 총장이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오한결 작가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오한결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저 발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총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발표 같습니다만.”

오한결이 총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렇군요. 제가 볼 땐 형편없는 연구 같은데요.”

“!!”

총장이 몹시 놀라 버벅거렸다.

“아, 아니. 그, 그게 무슨 말입니다. 루이스 교수는 미술사 권위자입니다.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나요? 아무리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동양의 작은 나라 작가라지만, 이건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군요.”

그동안 친절했던 총장이 얼굴을 구기며 오한결을 노려봤다.

하지만 오한결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미소를 보였다.

“동양의 작은 나라 작가요? 꽤 신선한 표현을 쓰시는군요.”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최하늘이 왕 팀장을 쿡 찔렀다.

“우리가 말려볼까요? 이러다 싸움 나겠어요.”

“아니, 그냥 교수 한 사람 의견일 뿐인데, 왜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죠? 기껏 초대해주신 총장님 당황하시게…….”

최하늘이 왕 팀장을 째려봤다.

“팀장님!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알랭이 최하늘 곁으로 슬쩍 다가와서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왜 저러는지 알겠어요. 기다려 봅시다. 분명 이번에도 오한결 작가 특유의 기가 막힌 문제 해결 방식을 보여줄 것 같군요. 너무 기대됩니다. 하하.”

최하늘과 왕 팀장은 ‘지금 뭐하는 거냐’고 알랭에게 한 마디 쏴주고 싶었지만,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말을 참아냈다.

오한결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죄송하지만, 발표에 심각한 오류가 있어 보이네요.”

황당한 표정의 루이스 교수가 말을 멈추고 오한결을 바라봤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논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럼에도 너무 확정적으로 발표하셔서 너무 놀랐습니다.”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몇몇 교수들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루이스 교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시죠?”

“오한결 작가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왔고요.”

오한결의 정체가 밝혀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세미나실을 가득 채웠다.

“어머, 오한결 작가님이시군요. 저는 루이스 교수입니다. 당신 작품에 열렬한 팬이죠.”

물을 한 모금 마신 루이스 교수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발표의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지금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군요.”

진지한 루이스 교수의 말에 오한결이 의도적으로 강경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교수님 작품해석은 편협한 이데올로기를 차용한 제국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배와 착취 문화를 인정하고 문화사대주의를 찬양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또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급기야 어떤 교수는 모욕적이라고 느꼈는지 고성까지 질러댔다.

루이스 교수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 조용히 하세요! 오한결 작가님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더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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