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69화 (69/202)

제69화 한국의 힘

파리의 뒷골목.

오래된 도시 골목답게 옛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왕 팀장은 지도를 살피며 길을 찾고 있었고 뒤따르던 오한결과 최하늘은 낯선 이국적 풍경을 만끽하며 걷고 있었다.

골목 어귀를 돌자 거대한 회색 시멘트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수많은 예술가가 흔적을 남긴 듯, 곳곳에 개성 넘치는 그림들이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오한결과 최하늘은 각자 흥미로운 그림들을 찾아 살피기 시작했다.

왕 팀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연맹에서는 아직 아무도 안 온 것 같군요.”

오한결이 손가락으로 벽의 재질을 확인하며 물었다.

“곧 오겠죠. 여기가 그래피티 작업할 장소인가요?”

“맞아요. 연맹에서 제안했어요.”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거리예술만큼 대중과 가까운 예술이 또 있을까? 거리 곳곳이 예술가의 캔버스가 되고 바로 그곳에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새겨진다. 그동안 엘리트 예술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실험적인 거리예술에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작품을 구경하던 오한결의 시선이 검은 스프레이로 정교하게 그린 해골 벽화에 머물렀다. 그림 하단에 작가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보였다.

‘Tony’

토니라…….

오한결은 스프레이가 뿌려진 흔적을 따라 작품이 어떤 식으로 그려졌는지 시간 순서에 따라 유추해보려 했다. 그림이 그러진 방식을 이해한다면 작가의 의도와 그 당시 그의 마음 상태까지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한결이 집중하자, 작가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가 벽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스프레이를 뿌려대기 시작한다.

회색 벽에 칠해지는 짙은 먹물 같은 선들.

스프레이로 무채색의 선들을 교차시켜 대상을 입체감 있게 만든다.

점점 해골의 형태를 갖춰가는데…….

해골.

그것은 일반적으로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깝다.

하지만 오한결의 바라본 이 그림은 삶에 대한 생생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어둠보다 밝음이, 우울함보다 경쾌함이 엿보이는 해골의 모습.

작가의 환영이 미소지으며 섬세한 터치로 그림을 완성한다.

최하늘이 오한결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해골 그림이네요. 무척 용맹한 모습인데요.”

‘용맹함이라고?’

최하늘은 오한결이 봤던 토니의 환영과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둘 중 누가 정답을 말하고 있는 걸까?

잠시 동안 진지한 고민을 하던 오한결이 결론을 내렸다.

정답은 없다.

토니가 그린 해골은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의 개성과 인식의 차이로 매번 다른 예술적 결과를 낳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움직이는 예술’ 아닌가.

왕 팀장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뭘 그리 열심히 보세요? 아, 이거요. 비슷한 그림 많아요. 요즘은 해골이 유행인가?”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그럼 저도 해골을 그려볼까나.”

한껏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때, 저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한결 작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오한결이 뒤돌아보자, 연맹 사무총장 엠마와 왕 팀장에게 화를 냈던 청년이 함께 서 있었다.

엠마가 방긋 웃으며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청년을 알아본 왕 팀장은 은근슬쩍 뒷걸음질 치며 오한결 뒤로 숨어버렸다.

오한결이 엠마에게 다가갔다.

“파리 뒷골목 벽화라. 오늘 컨셉이 좋군요.”

엠마가 회색 벽에 그려진 수많은 낙서와 그림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거리예술연맹이잖아요. 거리예술을 사랑하는 단체가 마련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아닐까요? 작가님의 작품을 이곳에 남겨주세요. 파리 시민들과 전 세계 관광객들이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말이죠.”

청년이 스프레이가 가득 든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재료 준비는 제가 다 했습니다. 작가님은 작품만 그리시면 돼요.”

오한결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청년은 직접 눈앞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해 있었다. 지난번 왕 팀장에게 보였던 분노는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왕 팀장은 청년의 눈치를 슬슬 보며 그가 내려놓은 스프레이 박스를 회색 벽 아래로 옮겨놓았다.

엠마가 오한결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작가님은 어떤 작품을 그리실 건가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오한결의 입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한결은 기대에 부응하듯 자신 있게 말했다.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를 파리에 남기고 싶습니다.”

엠마의 한쪽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오호라, 흥미롭군요.”

두 손을 모은 왕 팀장이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네.”

엠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묻지 않을 수 없군요. 한국적인 이미지가 뭐가 있나요? 유럽은 아직 한국 이미지에 익숙지 않답니다. 일본이나 중국과 많이 다른가요?”

오한결도 엠마의 푸른 눈을 바라봤다.

“오늘 이후 그 말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거대한 회색 벽면 앞에 선 오한결. 스프레이를 든 그의 표정이 비장하다.

눈을 감자, 어떤 묵직한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짓.

단단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에너지.

상대를 노려보는 성난 눈빛.

눈을 뜬 오한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중섭의 <흰소>는 프랑스 파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오한결이 거침없이 스프레이를 뿌리자 그림의 형태가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청년이 호기심을 보였다.

“와우, 소를 그리는군요. 무엇보다 오한결 작가에게서 전에 없던 강력한 힘이 느껴지네요. 그림하고 연관이 있는 거겠죠?”

엠마가 팔짱을 끼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상과 동일시라……. 무척 투박하고 과감한 선을 쓰는군요. 단순한 형태에서 묘한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군요.”

청년이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힘을 잔뜩 모은 소의 앞발이 벽을 뚫고 나갈 것 같아요.”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관찰력 없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그림입니다.”

이중섭 화백.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서양화가.

그는 한국적 소재를 사용해 향토성이 짙은 작품을 남겼고 그의 작품은 인간성과 뚜렷한 개성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중섭 화백의 집념과 우직함은 아주 격렬한 작품을 탄생하게 했다. 거친 야만성을 드러내며 고뇌와 연민을 표현한 그 작품들은 어쩌면 그의 갈망과 광기의 직설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

오한결이 잠시 숨을 고르며 작품을 바라봤다.

‘한국의 소! 프랑스를 점령하다!’

작업을 마치자, 엠마와 청년, 최하늘과 왕 팀장이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냈다.

엠마가 말했다.

“오한결 작가! 당신의 작품은 파리에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 * *

아리 미술관.

이현미 미술관장이 태블릿을 보이며 말했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에 오한결 작가가 소개됐습니다. 다들 보셨나요?”

신수진 이사장이 커피를 우아하게 한 입 마시고 말했다.

“어머니, 아니…… 관장님. 프랑스 출장은 문화재단이 추진한 일이에요. 당연히 그 누구보다 먼저 소식을 접했습니다. 호호.”

데이비드 오 교수가 슬쩍 미소지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이 가네요. ‘천재 예술가’라는 제목이 붙었겠죠.”

이현미 미술관장과 신수진 이사장이 까르르 웃었다.

“역시 데이비드 오 교수님은 감각이 남다르시군요. 맞아요. ‘천재 예술가 오한결, 예술로 프랑스를 점령하다!’ 이게 기사 제목입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물었다.

“고작 일주일의 프랑스 출장. 그 짧은 기간에 작품 활동이 가능합니까?”

신수진 이사장이 미소지었다.

“오한결 작가에겐 시간적 제약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거침 없는 작업 스타일을 아직 모르시나요? 물론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제 친구 알랭에 따르면 오한결 작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동일한 기법으로 <도둑맞은 문화재>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 알랭이 소장하고 있는데, 프랑스 정부와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작품을 구매하려고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다고 하네요. 언론은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기사화했고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루브르가 그 작품을 사려고 했다고요? 세상에!”

이현미 미술관장이 말했다.

“저도 믿기지 않았어요. 루브르가 어떤 곳입니까? 최고의 예술품만 소장한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죠.”

데이비드 오 교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루브르가 그 그림을 손에 넣었습니까?”

“오한결 작가가 조건부로 허락을 했다고 합니다.”

“조건부요?”

이현미 미술관장이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한국에 오한결 미술관이 개관하면 그때 그림을 이전해 주기로요.”

“네? 오한결 미술관이요? 아니…….”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의 데이비드 오 교수와 다르게 이현미 미술관장과 신수진 이사장은 평온한 모습을 보였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을 이었다.

“가끔 보면, 오한결 작가는 엉뚱한 데가 있어요. 뭐, 작은 미술관이라면.”

“아리미술관 보다 규모가 큰 미술관을 생각하나 봅니다. 개인 이름을 딴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 말입니다.”

“!!”

이현미 미술관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불가능하지 않아요. 앞으로 그가 보여줄 모든 예술적 행보가 완벽하다면요.”

신수진 이사장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교수님, 이 벽화를 보시겠어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중섭 작가의 작품이군요. 하지만 더 웅장한 힘이 느껴집니다. 이것도 오한결 작가가 그린 건가요?”

“맞아요. 파리 골목에 그래피티로 작품을 남겼어요. 소식통에 의하면 파리에 한국적 이미지를 남기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이현미 미술관장이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이중섭 화백은 한국의 대표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흰소>는 한국인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그걸 프랑스에 남기다니. 오한결 작가가 작품을 선정하는 감각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제 오한결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프랑스에 간다는 말이 들리겠군요.”

데이비드 오 교수의 말에 이현미 미술관장과 신수진 이사장이 까르르 웃었다.

이현미 미술관장이 신수진 이사장에게 물었다.

“프랑스 출장 이후 오한결 작가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준비한다면 문화재단은 뒤에서 묵묵히 도울 생각입니다.”

“오한결 작가가 너무 빨리 세계적인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한결 미술관이 개관한다면, 아리 미술관은 오한결 작가와 단독으로 일하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아……. 제 욕심만 차렸군요. 호호.”

“오한결 미술관에 오한결 작가 작품만 걸어도 흥행에 성공하겠어요. 그렇게 되려면 앞으로 작품 활동을 더 많이 해야 할 듯싶군요. 솔직히 아직 부족하죠.”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오한결 작가와 공동 프로젝트를 하고 싶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은 흥분으로 입을 열기 힘들었다.

현역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 교수와 이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천재 신인 오한결 작가가 공동 작업을 한다고?

전 세계 수많은 미술계에서 러브콜을 받는 데이비드 오는 절대로 타인과 공동 작업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로지 전시실에 그의 작품만 있어야 한다는 게 미술계의 오랜 룰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성과 실력이 완벽한 두 작가의 만남이라.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보일지, 아니면 파국으로 향하는 지름길인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벌써 미술계가 들썩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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