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68화 (68/202)

제68화 테르트르 광장

술에 취한 왕 팀장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쌍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소연과 실패한 첫사랑 얘기까지, 끊이지 않는 푸념의 연속이었다.

우울한 하루를 보낸 그를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오한결 뿐이었다. 이미 최하늘과 클로에는 은근슬쩍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엄청난 말을 쏟아 낸 왕 팀장이 결국 테이블에 고꾸라져 잠이 들자, 전쟁 같은 뒤풀이도 끝이 났다.

숙소로 올라온 오한결은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끄응-!

왕 팀장을 업고 올라왔더니, 몸이 남아나질 않는구나…….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 오한결은 이제 그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클로에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붉은 노을이 작열하는 센강에서 현대 무용을 하듯 유연한 춤을 선보였던 클로에.

그녀는 손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관절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듯 보였다. 마치 바람 속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처럼, 물속을 유영하는 인어공주처럼.

그 누가 클로에의 퍼포먼스에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그녀의 몸과 마음은 하나가 되어 춤으로 표현되었다.

그녀는 춤 자체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멋진 예술가 아닌가!

띠링. 띠링.

문자 알람에 오한결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 친구들한테 너무 연락을 안 했구나.’

「노을: 봉주르. 오한결 작가님!」

「최무열: 작가님은 우리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어.」

「서정익: 아, 나도 프랑스 가고 싶다…….」

오한결이 슬쩍 미소 지으며 문자를 입력했다.

「오한결: 미안, 일정이 바빠서 깜빡했네. 다들 잘 지내?」

「노을: 어머! 작가님 살아 있었군요!」

「최무열: 우와 작가님이다!」

「서정익: 안녕하세요.」

오한결이 한숨을 푹 쉬었다.

「오한결: 그래, 미안하다. 이제 됐냐?」

「노을: 농담이에요. 호호. 프랑스 파리는 어때요? 썰 좀 풀어주셈.」

「오한결: 예상한 그대로야. 너무 좋아. 하하.」

「최무열: 부럽. 어디 어디 가셨어요?」

「오한결: 뻔하지 뭐.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 루브르 박물관 등등.」

「노을: 대박! 완전 부럽다. 해외 출장이라면서요. 딱 보니까, 관광인데.」

「서정익: 인정.」

「최무열: 해명해주세요. 작가님.」

「오한결: 뭘…… 해명해야 할까. 난 지금 명일문화재단 파리지부 레지던시에 있어. 솔직히 관광도 좀 하긴 했는데……. 프랑스 작가들하고 작품 협업도 있었다고.」

「노을: 네네. 농담이었어요. 오한결 작가님은 한국을 대표해서 갔는데 당연히 문화재단에서 엄청 이것저것 시킬 듯. 그건 그렇고 우리가 원하는 건 딱 하납니다. 기념품!」

「서정익: 인정.」

친구들의 아우성에 오한결은 탁자 위에 놓인 ‘에펠탑 스노우볼’을 보고 싱긋 웃었다.

「오한결: 이미 준비했지. 그건 걱정하지 마.」

「최무열: 이옙! 싸랑합니다. 작가님!」

「서정익: 감사합니다.」

「노을: 에펠탑 열쇠고리, 모형 그런 것만 아니면 돼요. 감사해용!」

오한결이 침을 꿀꺽 삼켰다. 노을의 노골적인 한 마디에 오한결이 긴장한 것이다.

에펠탑이 싫은 게 아니라, 열쇠고리가 싫은 걸 거야. 그런 걸 거야…….

「오한결: 며칠 후면 서울 가니까. 그때 보자. 모두 건강 조심하고.」

「노을: 넵! 즐거운 여행, 아니 출장 보내세요!」

「최무열: 최하늘 누나한테 안부 전해주시고요.」

「서정익: 안녕히 계세요.」

* * *

“자, 어떤가요? 파리 시내가 한눈에 보이죠?”

왕 팀장이 손끝으로 파리 전경을 가리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왔네요. 몽마르트 언덕!”

오한결이 미소 지으며 언덕 아래 수많은 관광객과 울창한 나무들, 파리 시내를 가득 채운 건물들을 천천히 음미하듯 바라봤다.

해발 130미터 정도의 언덕. 평지가 대부분인 프랑스 지역에서 이 정도 높이면 상당히 높은 산에 속했다.

파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무명화가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다.

한껏 기대를 품은 관광객들은 마음에 드는 화가를 골라 초상화를 주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흥미를 느낀 오한결의 마음은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오한결의 시선을 읽은 왕 팀장이 말했다.

“테르트르 광장에 가면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이 많아요.”

오한결이 호기심을 보였다.

“여기서 먼가요?”

“아뇨, 바로 근처에 있어요.”

최하늘이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초상화요? 그거 비싼가요?”

“그렇게 안 비싸요. 왜요, 관심 있으세요?”

당황한 최하늘이 시선을 딴 곳에 두며 중얼거렸다.

“아니, 뭐. 그냥요.”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비용은 제가 낼게요.”

최하늘이 오한결과 왕 팀장 뒤를 쫓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낸다고 말할 걸……. 쪼잔해 보였으려나.”

테르트르 광장의 모습은 딱 오한결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화가들은 정해진 자리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듯 세워놓고 관광객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화가들의 그림을 살피며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그림을 발견하고 싶은 얼굴로 주변을 배회했다.

왕 팀장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때요? 익숙한 장소 같지 않나요?”

왕 팀장의 말에 최하늘이 잠시 광장 주변을 둘러봤다. 잠시 뒤 그녀가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 혹시 고흐의 그림……?”

그 순간, 오한결의 머릿속에 고흐의 대표작 <밤의 카페 테라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세세한 모습은 다르지만, 분명 그 특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맞아요. 작품에서 본 장소와 비슷하죠? 이곳은 19세기 고흐와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이 살았던 마을이에요. 세월이 지나도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평을 듣고 있죠.”

최하늘은 잠시 일행과 떨어져 홀로 광장을 구경했다.

열정 가득한 화가들, 호기심 어린 관광객들,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까지. 테르트르 광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최하늘이 주변 카페 인테리어에 한눈팔며 걷던 중 뭔가가 발에 툭 치였다.

“어머!”

불안한 마음으로 시선을 내리자, 캔버스 하나가 발에 밟혀있었다. 다행히 그림을 그리지 않은 빈 캔버스였다.

백발의 노인이 놀라며 말했다.

“이런! 아가씨 조심해야지요. 화가에겐 미술품은 굉장히 소중하답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백발의 노인이 최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다면 초상화 하나 그리겠소?”

최하늘은 자신의 발에 치인 캔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최하늘이 의자에 앉자, 백발의 화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웃어요, 그래야 예쁘게 나옵니다.”

화가는 연필로 선을 그으며 전체적인 얼굴 형태와 이목구비를 매우 능숙하게 그려나갔다.

오랜만에 그려보는 동양 여인의 얼굴.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양인 얼굴과 달라, 디테일을 살리지 않으면 실제 인물과 다른 얼굴이 나올 수 있다.

백발의 노인은 자신의 노하우를 쏟아 부으며 최하늘의 초상화를 그려나가고 있다.

때마침 오한결과 왕 팀장은 최하늘을 발견하고 근처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백발 노인의 모습을 지켜봤다.

백발 노인이 최하늘의 일행임을 확신하고 말했다.

“아가씨 친구들인가요?”

“네, 일행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손을 내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어허, 이 아가씨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면 놀랄 것이오.”

최하늘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지만, 백발의 화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흙이 묻은 빈 캔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가의 생명인 캔버스를 짓밟았소. 저의 생명을 뺏는 것과 같은 행동을 저질렀단 말입니다.”

오한결과 왕 팀장은 황당한 표정은 지었지만, 백발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도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시오. 그게 프랑스 예의랍니다. 허허.”

왕 팀장이 따지려고 하자, 오한결이 그를 말렸다.

“이 숙녀분 초상화가 멋지다면 생각해보죠.”

백발 노인이 자신 있게 웃었다.

“나는 30년 동안 초상화만 그렸소. 이건 내 자존심이오.”

오한결과 왕 팀장은 묵묵히 화가의 작업 지켜봤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다양한 표정을 지었는데, 입을 그릴 땐 본인의 입을 오므렸고 눈을 그릴 땐 심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작업이 길어지자 왕 팀장이 살짝 짜증을 냈다.

“아직도 멀었나요?”

백발의 화가가 식은땀 흘리며 대꾸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안 닮았지. 원래 생긴 게 문제인가?”

“뭐라고요!”

최하늘이 소리를 지르자, 백발 화가가 움찔했다.

“가, 가만있어 보시오! 그렇게 자꾸 움직이니까 그림이 지연되는 거잖소!”

최하늘이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꾹 참고 버티고 있었다.

오한결이 몸을 숙여 화가의 그림을 살펴봤다.

‘아, 너무 안 닮았네.’

하지만 기본기가 있는 초상화였다.

화가의 말대로 30년 경력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그린 것도 아니었다. 치명적인 문제는 모델과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수정에 또 수정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종이도 망가졌고 형태를 잡은 선들도 뭉개져 보였다.

이미 명암까지 넣은 그림을 어떻게 수정할까?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정교한 사진 같은 관찰력이 필요할 것이다.

불행히도 화가에게 그런 능력은 없어 보였다.

딱, 거리의 무명화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이제 비 오듯 땀을 흘리는 화가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다 못한 왕 팀장이 나섰다.

“비용 지불할 테니, 여기서 마무리 지으시죠.”

“무슨 소리!! 내 사전엔 미완성이란 없소!”

백발 화가가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연필을 잡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오한결이 제안을 했다.

“제가 수정해 볼게요. 대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10배의 비용을 드리죠.”

10배라는 말에, 백발 화가는 자존심 따위 잊어버리고 하루 수익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온종일 그림을 그려도 빠듯한 무명 화가의 삶 아닌가. 그런데 웬 동양 젊은이가 10배의 비용을 준다고 한다. 30년 초상화 경력의 화가도 해내지 못한 것을 완성해 보겠다고.

화가가 보기엔 이미 그림은 망했다.

수없이 덧칠을 해서 그런가, 조금만 더 하면 캔버스에 구멍이 날 정도였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존심 따위 버리고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보자.

백발 화가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마무리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얼마나 해보고 싶으면 10배를 준다고 할까 싶소. 그 마음에 감동해 기회를 드리겠소.”

화가가 자리를 비켜서자, 오한결이 의자에 앉고 초상화를 대면했다.

오한결이 연필을 들고 최하늘을 바라봤다.

“걱정 마세요. 제가 이 그림을 살려놓을게요.”

연필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오한결.

신기하게도 연필이 닿는 곳의 종이 질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화가가 놀라서 소리쳤다.

“어떻게 이럴 수가?”

“뭉개진 종이 결과 반대 방향으로 마찰을 주는 거죠. 매우 섬세하게 작업해야 합니다.”

오한결은 지우개를 쓰지 않았다. 이미 짓눌린 종이 질감 때문에 자칫하다간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필의 기울기를 다양하게 조절하며 명함의 대비로 그림을 수정해 나갔다.

최하늘의 둥근 이마와 날렵한 눈썹, 적당히 오뚝한 콧날과 통통한 입술을 차례로 그려나갔다.

백발의 화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생 불가능한 그림이었는데, 이제는 완벽한 초상화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오한결이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어때요? 이 정도면 모델과 닮은 초상화 맞나요?”

백발 화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림을 바라봤다.

‘어떻게 한 거지……. 바꿔치기? 아니지, 내가 직접 그리는 걸 봤으니까.’

“이걸 보고 어떻게 인정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생계 때문에 돈은 안 받을 수가 없어, 내 이 숙녀분 것만 받겠네.”

오한결이 지폐 뭉치를 화가에게 건네고 초상화를 받았다.

그는 최하늘, 왕 팀장과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환하게 조명을 밝힌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던 그때, 멀리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년, 이 은혜 잊지 않겠네!!”

왕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화가는 정신이 이상한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네.”

오한결이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읽으며 말했다.

“제가 돈을 좀 넉넉히 줬거든요.”

“얼마나?”

“10배요.”

“뭐! 왜?”

“닮지 않아서 그렇지, 잘 그린 초상화였어요. 예술가에 대한 경의 표시라고 해두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