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67화 (67/202)

제67화 그림자 춤

어느덧, 센강에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알랭은 오랫동안 <도둑맞은 문화재>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오한결과 최하늘, 왕 팀장은 붉게 물든 센강을 바라보며 모처럼 찾아온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왕 팀장이 힐끗 알랭을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알랭은 프랑스 대표 예술가로 불리는 인물인데, 저렇게 혼을 빼놓다니요.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군요.”

최하늘도 슬쩍 고개를 돌려 알랭을 쳐다봤다.

“근데 저 그림을 프랑스에 기증해도 되는 건가요? 너무 아까워요…….”

유유히 흐르는 센강에 시선을 고정한 오한결이 말했다.

“<도둑맞은 문화재>는 프랑스에 있어야 그 빛을 발할 겁니다. 두고 보세요. 알랭만큼 저 그림의 가치를 높일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림은 추후 다시 찾아오면 됩니다.”

“아…… 계획이 있으셨군요.”

최하늘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사람들이 모여 있네요. 공연하나?”

센강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한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도 가보죠. 뭔가 재미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오한결과 최하늘이 앞서 자리를 옮기자, 그 뒤로 왕 팀장과 그림을 품에 꼭 안은 알랭이 뒤따라 왔다. 왕 팀장은 알랭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어휴, 천하의 알랭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혼자 보기 아깝네.’

오한결 일행은 인파를 헤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최하늘이 짧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왕 팀장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클로에군요.”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클로에가 군중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었다.

오한결 일행을 발견한 클로에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뒤 클로에가 서서히 몸을 활처럼 구부린 채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자,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왕 팀장에게 물었다.

“공연하는 건가요?”

“가끔 이렇게 센강에서 퍼포먼스를 하곤 해요.”

잠시 뒤 환호성이 잦아지자,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클로에.

몸을 더 활처럼 휘면서 두 손은 출렁이는 물결처럼 반동을 주며 흔들고 있었다.

음악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로지 섬세하고 리드미컬한 움직임만으로 감동을 자아냈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클로에의 형체가 검게 비쳤다. 길게 늘어진 클로에의 그림자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였다.

클로에는 자신만의 리듬에 맞추어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발을 교차했다.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더니 곧 몸을 움츠려 둥글게 말아 올렸다. 이런 클로에의 몸동작은 그녀를 지켜보는 누구라도 예술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최하늘이 입을 떡 벌린 채 말했다.

“현대 무용을 보는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워요.”

오한결이 그려준 그림을 꼭 안고 있던 알랭도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하군요. 이곳 센강과 하나가 된 매력적인 동작을 보여주고 있군요.”

그의 말처럼 클로에는 센강을 물들인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강 표면을 스치는 바람을 무대 음악으로 삼아 춤을 보여줬다. 그녀의 유연한 동작은 이곳 센강의 매력을 모두 흡수한 듯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몸을 움직인 클로에가 이번엔 두 손을 둥글게 교차하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중얼거렸다.

“붉은 하늘과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라. 붉은빛이 강렬할수록 그녀의 존재는 두드러지지만, 해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녀의 형체는 어둠과 하나가 될 것이다…….”

다리를 높이 쭉 뻗은 클로에가 두 팔을 날갯짓하듯 부드럽게 흔들어 댔다.

알랭이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듯 흥분하며 말했다.

“스스로 무아지경에 빠져있어요. 몰입의 위대한 에너지가 전해집니다!”

노을이 사라지고 어둠이 하늘을 가득 채우면서 자연스레 공연은 막을 내렸다.

진심 어린 박수가 쏟아지자, 클로에가 공손하게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공연을 마친 클로에가 오한결 일행 곁으로 다가왔다.

“때마침 이곳에 있었군요.”

클로에가 오한결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최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공연이 마음에 드셨나요?”

최하늘은 이제 클로에를 향한 질투심 따위 기억나지 않았다. 최하늘은 진정한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너무 아름다웠어요. 진심입니다.”

클로에가 빙긋 웃더니 갑자기 오한결의 볼에 살짝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 버렸다.

최하늘은 멍하니 클로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놈의 프랑스 문화는…….’

* * *

파리 외곽에 위치한 ‘파리거리예술연맹’.

클로에가 오한결과 최하늘, 왕 팀장을 이끌고 낡고 오래된 건물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금발에 푸근한 체형의 엠마가 한껏 팔을 벌리고 클로에를 끌어안았다.

“클로에! 친구들을 데리고 왔군요.”

엠마가 왕 팀장을 알아봤다.

“오, 나의 오랜 친구. 그동안 잘 지냈나요?”

엠마가 한 사람씩 가볍게 포옹하다가 오한결 앞에서 멈춰 섰다.

“새로운 친구군요. 저는 엠마입니다. 연맹에서 사무총장을 맡고 있죠.”

왕 팀장이 잽싸게 오한결 보다 먼저 말했다.

“이 분이 오한결 작가입니다. 이번에 명일문화재단에서 공모전을 통해 발굴한 신인이죠. 얼마 전에 개인전을 마쳤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엠마가 오한결의 손을 꽉 쥐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어요. 저도 인터넷을 통해 작가님의 개인전을 봤답니다. 정말 굉장했어요. 한국에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매년 예술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만나는데, 모두 개성이 넘치죠.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엠마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님이 프랑스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문화재단에 직접 요청을 했습니다. 연맹에 초대하고 싶다고요. 선뜻 이렇게 방문해주셔서 무척 기쁩니다.”

오한결은 엠마의 푸른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술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곳이라 이곳이 마음에 드네요.”

“호호호. 역시 바로 아시는군요. 그럼, 연맹 소개부터 해드릴게요. 따라오시겠어요?”

엠마가 사무실 밖으로 향하자 오한결 일행도 줄지어 따라 나갔다.

“연맹 건물은 허름해 보여도 내부 시설만큼은 아주 잘 돼 있답니다. 사무실, 작업실, 연습실, 공연장 그리고 카페테리아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복도 창을 통해 사무실과 작업실을 구경하던 오한결이 물었다.

“운영비가 꽤 들겠어요.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나요?”

엠마가 뒤돌아 오한결을 바라봤다.

“좋은 질문! 우리는 파리시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어요. 파리는 예술 도시답게 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지원이 아주 좋답니다. 수입이 불안정한 예술인들에겐 실업수당도 주고 있지요.”

클로에가 넌지시 말했다.

“예술가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꿈같은 일이죠.”

“클로에의 멋진 퍼포먼스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랍니다. 자,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엠마가 거대한 철문을 힘껏 열자, 거대한 작업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연맹의 자랑인 그래피티 작업실입니다.”

작업실에 들어가자 코를 찌르는 스프레이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몇 시간 전까지 작업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오한결은 거대한 오랑우탄 얼굴이 그려진 작품 앞에 멈춰 섰다.

형태는 어설프지만 그래피티 특유의 즉흥성과 충동성이 잘 표현됐다. 미소 짓는 오랑우탄의 얼굴에서 작가의 유머 감각과 장난스러움도 엿보였다.

엠마가 오한결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작가님도 그래피티를 좋아하시나요?”

“물론이죠.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예술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오한결이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좋은 작품들이 많은 걸 보니, 연맹에는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가 보군요.”

엠마가 만족스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휴식을 갖는 일행들.

낙서 같은 추상화를 발견한 왕 팀장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작품 앞에서 서성였다. 그런 왕 팀장의 모습을 본 최하늘과 클로에도 그의 곁에 서서 작품을 감상했다. 셋이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웃겨 보였다.

그때 왕 팀장이 그림의 흥미로운 부분을 알려주려고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다가 결국 그의 손끝이 캔버스의 거친 표면을 훑고 지나가 버렸다.

때마침 덜컥, 작업실 문이 열리고 장발의 청년이 들어왔다.

그는 왕 팀장의 손이 자신의 작품에 닿아 있는 모습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장 그 손 내려놓으세요!”

장발의 청년이 왕 팀장을 한번 흘겨보더니 엠마를 향해 소리쳤다.

“엠마! 이 사람들은 뭡니까? 함부로 작업실에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엠마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장발의 청년이 분에 못 이겨 스프레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거친 파열음이 들리자, 모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왕 팀장이 주눅 든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작품을 훼손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작품이 너무 놀라워서 그만…….”

“뭐? 의도는 없었다고요? 목숨보다 소중한 작품에 함부로 손을 대놓고 그런 식으로 변명하면 그만입니까? 의도야 어떻든 작가의 작품에 손을 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엠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불찰이 크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이분들은 오늘 연맹에서 초대한 손님들입니다.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말을 조심해 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엠마의 부탁에 잔뜩 화를 내던 청년이 이성을 찾아갔다. 화가 많이 누그러진 청년이 고개를 돌리자 상당히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말을 더듬었다.

“어……. 혹시…….”

클로에가 청년 곁으로 다가왔다.

“왜 화가 났는지 충분히 이해해. 그러니까 화를 풀고 얘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청년에게 클로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의 눈에는 오한결만 보였다.

“오한결 작가 아닌가요? 오늘 아침에 동영상으로 당신의 전시를 봤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내 눈앞에 오한결 작가가 있다니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와! 이건 기적입니다. 어떻게 내 눈앞에 당신이 있는 거죠!”

오한결은 죽상이 된 왕 팀장 얼굴을 살핀 후 말했다.

“저기, 이제 그만 팀장님을 용서해 주시겠어요?”

청년이 뒤돌아 왕 팀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를 보는 순간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너무 모욕적이라고요!”

오한결이 청년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요? 뭐든 말씀해보세요.”

“없습니다!”

잠시 생각한 청년이 말을 중얼거리며 이었다.

“오한결 작가님 작품을 직접 보면 모를까…….”

오한결이 씨익 웃으며 청년을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그래피티 작업을 보여줄게요. 다음에 작업할 때 초대하겠습니다.”

청년이 환하게 웃더니 뛸 듯이 기뻐했다.

“나이스! 저 남자 분 지금 당장 용서하겠습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클로에의 한쪽 입꼬리가 쑤욱 올라갔다.

* * *

레지던시 1층 카페.

왕 팀장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 정말 죄송해요. 너무 허접한 실수를 저질렀네요.”

클로에가 건조하게 말했다.

“같이 웃고 떠들던 우리 모두 잘못이죠.”

클로에가 오한결에게 윙크를 날렸다.

“제법이던데요. 순발력 마음에 들어요.”

최하늘은 클로에의 도발에 애써 괜찮은 척 표정관리를 했다.

“오한결 작가님. 부담되면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엠마하고 얘기해 볼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오늘부로 그래피티에 흥미가 생겼거든요.”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처음인 건가요? 근데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예요?”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최하늘을 쳐다봤다.

“최하늘 씨는 제가 자신만만한 이유를 알고 계시죠?”

“그럼요. 수없이 봤는걸요.”

클로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칫, 뭐야 두 사람. 은근 내가 모르는 신호를 주고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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