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프랑스 소녀
“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알랭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멈춰 섰다.
오한결, 최하늘, 왕 팀장도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한결이 조용히 읊조렸다.
“직접 보는구나.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 유명한 작품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시체를 밟고 선 여인이 한 손에 프랑스 국기를, 반대 손에는 총검을 들고 있다.
옷이 벗겨져 상체가 훤히 드러난 그녀는 들라크루아에 의해 자유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그려졌다.
그림 곳곳에 화가가 남겨 놓은 상징들.
구석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보이고 민중들은 계급에 따라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알랭은 오한결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한결의 얼굴에 나타난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어야 했다.
프랑스의 자랑이자 위대한 예술가의 업적을 보고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국에서 온 천재 예술가 오한결!
알랭은 오한결이 이 작품을 보고 프랑스의 진정한 예술 정신을 발견해주길 바랐다. 오늘만큼은 오한결이 프랑스의 위대한 유산에 극적인 감동을 받아 자신이 한국에서 느꼈던 감동을 똑같이 경험했으면 했다.
‘자, 어떤가 오한결 작가! 이게 바로 프랑스 예술이라네!’
알랭이 오한결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떠십니까? 작품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오한결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푹 빠진 채 나직이 말했다.
“물론이죠.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답군요.”
알랭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7월 혁명’을 낭만주의적인 열정과 바로크의 엄격한 장면 구성,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여신 같은 고전주의적 특성을 모두 한데 어우러지게 그린 작품이죠. 들라크루아를 부르는 별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최고의 색채 화가! 낭만주의의 선도자!”
열정적인 알랭이 말을 마치자, 오한결이 말을 보탰다.
“하나 더 있죠. ‘표현주의의 선구자’”
“오!!”
갑자기 알랭이 눈시울을 붉혔다.
오한결은 알랭의 모습에 살짝 거부 반응이 일었지만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림 앞에 섰을 때부터 알랭 혼자 감상적으로 변해갔는데, 그게 일명 ‘국뽕’ 감정이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편, 왕 팀장은 갑작스러운 알랭의 감정 변화에 당황했다.
“작가님, 알랭이 좀 이상해요.”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이 아리랑 들으면 눈물 흘리는 것과 비슷한 거죠.”
최하늘과 왕 팀장이 동시에 외쳤다.
“아! 완전 이해했습니다.”
“전 용가리 보고 눈물 흘렸잖아요……. 두 분은 젊어서 용가리 잘 모르죠?”
“…….”
잠시 뒤, 왕 팀장이 이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왜 그렇게 유명한 거죠?”
퍼뜩 정신을 차린 알랭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제가 정신을 잠시 놓았군요. 바로 설명해드리죠.”
알랭이 작품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그림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 들라크루아도 이 작품을 그림으로써 7월 혁명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거죠.”
알랭의 설명에 오한결이 손을 들어 그림을 가리켰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시민의 자유가 곳곳에 나타나 있어요, 여기 보여요? 곳곳에 자유, 평등, 박애를 나타내는 색의 배치가 눈에 띄네요.”
오한결이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옮기자, 곳곳에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색이 눈에 띄었다. 여신의 손에 든 국기와 그녀 아래서 몸을 굽힌 사람의 옷 그리고 그림 상단의 배경에서 말이다.
“그런 게 있었습니까?”
새로운 사실에 놀란 최하늘과 왕 팀장이 더 자세히 보려고 소란을 벌이는 동안 오한결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작품에 몰입했다. 상상이 곁들여진 그림이었지만 당시 시민이 주도했던 혁명의 생생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7월의 혁명.
그날의 함성과 비명소리.
화약 냄새와 함께 진동하는 진한 피비린내.
자유을 얻기 위해 프랑스 시민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자신의 낭만주의 예술을 다시금 오한결이 재현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했다.
오한결은 그의 목소리를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때가 되면 당연히 보여줄 거니까.
* * *
알랭의 안내로 루브르 박물관을 샅샅이 관람한 오한결 일행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를 지나던 일행은 성당의 위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하늘이 대성당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저런 건물 스타일이 뭐였죠? 알았는데…….”
왕 팀장이 기회를 잡은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고딕 양식이죠. 기본 상식 아닙니까!”
자존심이 상한 최하늘이 왕 팀장을 째려봤다.
“팀장님! 저도 알아요. 잠깐 까먹은 것뿐이에요.”
“뭐, 그렇다고 칩시다.”
“!!”
콧구멍에서 뜨끈한 바람을 뿜어대던 최하늘이 반격했다.
“그래서 고딕 양식이 정확히 뭔데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왕 팀장이 대답했다.
“하늘에 닿을 듯 뾰족한 첨탑이 특징이죠. 수직적이고 직선적인 건물 양식 말이에요, 중세 서유럽에서 유행했죠. 이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고딕 양식의 최고의 걸작이라고도 불립니다. 알겠어요?”
할 말을 잃은 최하늘이 발을 쿵쿵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저 두 사람은 뭐 하는 거죠? 설마 싸우나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한 알랭이 오한결에게 물었다.
“……아뇨. 업무 회의 중입니다. 아마도요…….”
“오호라. 한국말은 억양이 굉장히 세군요. 꼭 싸움처럼 들립니다.”
“…….”
대성당 주변을 점거한 수많은 노점상.
오래된 책과 음반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고 책 노점 앞에 멈춰선 오한결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알랭이 슬쩍 다가와 호기심을 보였다.
“가스통 루르의 <오페라의 유령>이군요. 읽어 봤습니까?”
색 바랜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오한결이 대답했다.
“70세 때 읽었죠. 아직도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프랑스 고전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죠.”
그의 말을 듣던 알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70살이라고요? 농담하신 거죠?”
정신이 번쩍 든 오한결이 급하게 변명을 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요? 70살이요? 설마요. 제 프랑스 발음이 별로 안 좋나 보네요. 17살이라고 했어요. 정말입니다…….”
그때였다.
툭!
후드를 입은 소녀가 근처로 다가오더니 오한결과 세게 부딪쳤다. 자신의 말실수 때문에 변명거리를 생각하던 오한결이 방심했는지 소녀를 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드를 입은 소녀는 그런 오한결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미안.”
소녀가 짧게 사과의 말을 전했으나 전혀 미안한 얼굴은 아니었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놀란 최하늘이 급히 달려오자 소녀가 피식 웃더니 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이봐, 너! 수상해, 소매치기 아냐?”
왕 팀장이 소녀의 팔을 낚아채려 하자 후드 소녀가 능숙한 솜씨로 몸을 돌려 왕 팀장을 따돌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란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소녀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세상에! 오한결 작가님 다친 곳은 없습니까? 혹시 사라진 물건은 없고요?”
알랭이 놀라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오한결은 그제야 자신의 소지품을 뒤적였다.
“지갑이 없어졌군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다치진 않았어요.”
“아, 이를 어쩐다. 그래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알랭은 자신의 짐작대로 소녀가 소매치기라는 사실에 분노를 터트렸다. 어떻게 프랑스에 온 귀한 손님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최하늘과 왕 팀장이 다가와 오한결의 상태를 살폈다. 최하늘이 살짝 울먹이며 말했다.
“다친 곳이 없으신 게 다행이에요. 소매치기가 많다고 듣긴 했는데…….”
몸을 추스른 오한결과 일행은 침울한 기분으로 센강을 향해 걸었다. 잠시 뒤 그들은 유유히 흐르는 센강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소녀를 대신해 연신 사과하는 알랭을 달랜 오한결은 복잡한 생각에 빠지게 됐다. 다행히 지갑에는 지폐 외에 중요한 건 없었다. 꽤 많은 돈이었지만 지금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건 돈 문제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훌륭한 건축 양식과 프랑스 혁명의 위대함에 프랑스를 우러러봤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약탈 문화재로 세계적인 박물관을 만든 것도 프랑스 사람들 아닌가?
타국의 위대한 예술을 훔쳤지만, 본보기가 될 예술품을 만들면 그 죄가 상쇄되는가?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오한결의 지갑을 훔친 소녀의 행동은 그녀의 모국 프랑스의 문화적 약탈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과한 해석일 수 있으나, 루브르 박물에서 본 수많은 해외 문화재가 자꾸 머릿속에서 어른거려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소녀에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주자. 그럼 프랑스 사람들에게 과거 잘못에 대한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오한결이 센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드 소녀에게 가르쳐 줘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이야.”
최하늘이 흥분했다.
“그래요! 경찰에 신고하세요. 본때를 보여줘야죠!”
알랭이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파리 경찰서장하고 친분이 있어요. 도움이 될 겁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오한결이 말했다.
“후드 소녀를 그리고 싶어요. 값비싼 모델료를 지급했다고 생각하죠.”
오한결이 가방을 뒤져 스케치북을 꺼내자, 알랭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잠시 스친 그 소녀를 어찌 기억하려고 그러나요?”
오한결이 검지를 추켜세웠다.
“소녀의 얼굴을 본 단 1초. 그거면 충분합니다.”
소녀가 오한결의 어깨를 툭 쳤을 때, 그는 소녀의 얼굴을 정확히 확인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한결의 머릿속에는 사진처럼 그 얼굴이 정확히 남아있었다.
연필을 든 오한결이 부드럽게 선을 그려나갔다.
스윽 스윽 연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명암이 겹겹이 쌓여갔다.
오한결이 작업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주변에서도 힐끔거렸다. 하지만 오한결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그림에 열중했다.
잠시 뒤 센강을 배경으로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너무 옅어 거의 보이지 않는 눈썹과 모호하지만 부드러운 표정.
그림을 본 알랭이 놀라 물었다.
“설마…….”
“맞아요, 스푸마토 기법. 인물의 윤곽선을 흐리게 처리하여 경계를 없애는 기법이에요. 입 가장자리와 눈초리에 적용하면 오묘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 수 있죠.”
“!!”
오한결은 소녀의 몸이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지게 그리고 있다.
“이렇게 하면 관람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게 보이는 효과가 있답니다.”
“!!”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한결은 정밀하게 하지만 빠른 속도로 그림을 계속 그려나갔다.
대략 두 시간이 지나고 그림을 완성한 오한결이 허리를 펴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묘한 표정을 한 여인의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왕 팀장이 그림을 살피며 말했다.
“우와! 그 소매치기하고 똑같이 생겼네요.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그리죠?”
알랭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알랭은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고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런 알랭이 이상한지 왕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기회를 잡은 최하늘이 말했다.
“왕 팀장님 실망이에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글쎄…….”
알랭이 희열을 멈추지 못하고 말했다.
“이 그림은 ‘모나리자’와 기법이 완전히 똑같군요! 이럴 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렇게는 못할 겁니다. 이 역설적인 아름다움……. 아, 이걸 나만 봐야 한다니…….”
그제야 왕 팀장도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는 뒤늦게 입을 쩌억 벌렸다.
알랭이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이, 이 그림을…… 부디 프랑스에 남겨주세요.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처럼, 에펠탑처럼 우리 프랑스가 보유해야 할 위대한 예술품입니다!”
오한결은 알랭의 진심을 파악하려는 듯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가 달은 알랭이 급히 말했다.
“그림값은 제대로 지불하겠습니다, 제가, 제가 정부와 협의해서 꼭!”
알랭의 말에 오한결이 빙긋 웃었다.
“아니요, 저는 이 그림을 프랑스에 기부하고 싶습니다.”
“!!”
“후드 소녀는 이제 그림 주인공으로 살아가게 되겠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작품 제목은 <도둑맞은 문화재>로 할게요.”
의외의 작품 제목에 불안감을 느낀 알랭이 물었다.
“작품 제목이 특이하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소녀가 뺏은 건 돈이지만, 그녀의 조상이 뺏은 건 문화재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제목 뜻을 이해한 알랭이 당황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랭은 오한결의 주장은 정당했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오한결은 분명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오한결이 더 위대해 보였다.
왕 팀장이 최하늘에게 속삭였다.
“후드 소녀가 좋아할 거 같은데요. 이제 셀럽이 된 거잖아요.”
“글쎄요. 저라면 별로……. 이 정도면 거의 형벌 아닌가요.”
프랑스의 민낯을 보여준 후드 소녀는 이제 초상화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조국 프랑스가 저지른 과오를 상징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프랑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인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