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사모트라케의 니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프랑스인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곳은 그리스 신화 속 낙원이라는 ‘엘리제’를 따와 엘리제의 들판, 즉 샹젤리제 거리가 됐다.
이곳은 늘 고급 부티크와 식도락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넓은 보도를 따라 마로니에와 플라타너스가 우거져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오한결과 최하늘은 푸른 밤하늘 아래 조명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샹젤리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프랑스의 정취를 느끼며 말없이 걸으며 주변을 살피던 최하늘이 기념품 노점 앞에 멈춰 섰다.
“작가님. 동생들 기념품 하나 사 갈래요?”
아담한 노점에는 온갖 종류의 기념품들이 빽빽하게 진열돼 있었다. 프랑스 국기를 단 자동차 모형부터 유명한 명화 포스트 카드까지. 다양한 기념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종류가 많네요. 최하늘 씨가 골라 볼래요?”
잠시 고민하던 최하늘이 작은 에펠탑 모형이 든 스노우볼을 집어 들었다. 최하늘이 그것을 위아래로 흔들자 반짝이는 은빛 가루가 휘몰아치더니 에펠탑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눈 오는 날 프랑스 파리 같네요.”
“이거 살까요. 작가님?”
“네, 마음에 듭니다.”
샹젤리제 거리 풍경에 흠뻑 빠져 걷고 또 걸었던 두 사람은 결국 체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지친 얼굴로 노천카페를 향해 발걸음 옮겼다.
카페에 앉은 최하늘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짙은 다크써클과 부스스한 피부 상태를 살펴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래도 너무 좋네요. 일찍 잤으면 이런 멋진 야경을 못 봤을 거잖아요? 내일 체력이 걱정되지만. 그건 뭐 내일 걱정해야죠.”
에스프레소를 훌쩍이던 오한결이 말했다.
“좋은 사람과 함께여서 더욱 멋진 파리의 밤이었어요.”
멈칫한 최하늘이 애써 미소를 지어보지만 이미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커피를 다 마신 두 사람이 이제 자리를 뜨려는데, 카페 근처로 다가온 장발의 남자가 바닥에 짐을 풀고 바이올린을 꺼냈다.
“어머, 버스킹을 하려나 봐요.”
손목시계를 본 오한결이 말했다.
“이제 가야합니다. 너무 늦었어요.”
두 사람이 짐을 챙기고 떠나려는데, 애잔한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왔다.
순간, 오한결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말았다.
연주자의 손끝에서 울리는 작은 떨림이 바이올린의 현을 통해 표출되어 오한결의 감성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최하늘의 목소리가 간신히 들려왔다.
“너무 슬픈 음악이에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오한결은 장발의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익숙하다. 분명 내게 익숙한 느낌이야.’
눈을 감고 유연하게 굴곡진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깨달았다.
회귀 전, 오한결이 뉴욕에 머물 때 보았던 그 황금빛 예술가.
그때 오한결은 비겁했다. 자신을 실패한 예술가 지망생이라 규정하고 도피하듯 뉴욕으로 떠났던 멍청이였다.
타임스퀘어에서 우연히 만난 황금빛 예술가는 세속적인 목표 따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삶이 예술 그 자체였으니까.
저 남루한 남자도 그런 걸까?
그가 가진 건 바이올린뿐이고 유일한 공연 장소는 허름한 거리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 조건 따위 필요치 않으리라. 그에게 음악이 있다면 오늘 밤 그 누구보다 행복할 테니까.
오한결은 눈을 감고 먹먹한 옛 추억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바이올린 선율이 오한결의 영혼을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오한결 일행은 루브르 박물관 앞 ‘유리 피라미드’에 모였다.
왕 팀장이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사진 찍기에 바쁜 오한결과 최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피곤해 보여서 환영 파티도 없이 숙소로 올려보냈는데, 몰래 외출을 했다 이거지!
근데 왜 저렇게 쌩쌩하지. 나 같음 피곤해서 눈도 못 떴을 텐데 말이지. 역시 젊음이 좋아. 아 부러워…….
“왕 팀장님! 같이 사진 찍어요. 어서요!”
최하늘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간 왕 팀장이 오한결과 최하늘 사이에 껴들어 포즈를 취했다.
왕 팀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메일로 꼭 보내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보정도 해서 드릴게요.”
세 사람이 웃고 떠드는 사이, 알랭이 그들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분위기가 좋군요. 너무 보기 좋습니다.”
알랭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의 완벽한 도슨트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오한결 작가님께서 ‘종묘’를 기가 막히게 설명해 주셔서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지요. 더도 말고 핵심만 쏙쏙 뽑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하. 오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알랭이 긴장한 모습이 보이자 최하늘이 넌지시 말했다.
“직접 소개해주시다니 기대되네요, 근데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하하……. 제가 조금 긴장했나 봅니다. 오한결 작가님께 꼭 프랑스의 진수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그만…….”
서울에서 ‘종묘’를 본 알랭은 여전히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하나의 문화유산을 본 것뿐인데,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위대해 보이지 않았던가? 완벽한 예술과 훌륭한 설명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알랭은 그날의 감동을 직접 프랑스에서 재연하고 싶었다. 바로 오한결을 상대로 프랑스의 위대함을 전하고 싶었다.
알랭의 마음을 넌지시 눈치챈 오한결이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
“기대하겠습니다.”
알랭은 그런 오한결에게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유리 피라미드로 시선을 돌렸다.
“저 유리 피라미드를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이제는 유리가 아닌 다른 재질로 만든 피라미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작품입니다.”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대담하고 기발한 위트가 느껴집니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가 기획하고 설치한 작품이지요? 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이었을 텐데요.”
“하하. 그만큼 논쟁도 많았었죠.”
이제는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의 뒷이야기를 들은 최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펠탑과 비슷하네요? 에펠탑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 파리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최하늘의 말에 알랭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프랑스 국민들은 이 대담한 작품을 인정하고 프랑스의 자랑으로 만들었죠.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에펠탑은 꼭 보셔야 합니다. 나중에 에펠탑도 함께 가시죠.”
“아, 이미 갔다 왔습니다…….”
알랭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제였겠군요. 긴 비행으로 피곤하셨을 텐데…….”
왕 팀장이 질투에 눈먼 시선으로 오한결과 최하늘을 번갈아 쳐다봤다.
알랭은 그런 왕 팀장을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참고로 박물관 내부에선 사진 촬영이 가능하나, 플래시를 터트려선 안 됩니다. 그리고 내부가 미로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수 있어요. 저를 잘 따라오도록 하세요.”
루브르 박물관에 입장하자 수많은 관광객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계 곳곳에서 온 그들은 고혹적인 작품 앞에서 상기된 표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알랭의 뒤를 쫓던 최하늘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 유난히 저곳에 사람들이 많네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서 서로 밀치고 사진 찍고 난리도 아니었다.
왕 팀장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은 모나리자 보려고 저러는 거예요. 실제로 보면 생각보다 그림이 되게 작아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눈도장 찍으려는 거죠, 뭐. 저도 예전에 인파를 뚫고 갔었는데 고생한 거에 비해서 만족도가 많이 떨어졌어요. 딱히 인터넷에서 보는 것과 별로 차이도 없고…….”
알랭이 관광객 무리들을 비켜가며 말했다.
“모나리자는 굳이 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아서 패스합니다. 괜찮죠?”
“네!”
알랭은 박물관 내부의 복잡한 길을 능숙하게 찾으며 바삐 움직였다. 그를 부지런히 쫓던 오한결은 벽면에 이질적인 옛 건물 조각을 발견하고는 소리 질렀다.
“잠깐만요! 저게 뭐죠?”
걸음을 멈춘 알랭이 건물 벽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저건 중세시대 흔적인 ‘내부 원형 망루’입니다.”
“여기가 요새로 쓰였다고 하던데, 저게 그 당시 흔적이군요.”
알랭이 오한결의 지식에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처음부터 박물관이 아니었죠. 12세기에는 바이킹의 방어를 위한 요새로 쓰이다가 1793년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박물관이 되었답니다. 그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소장품을 모으고 전시했습니다. 이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프랑스를 찾아와 전시물을 구경하는 시대가 되었답니다.”
알랭의 자부심 어린 말에 오한결이 살짝 웃었다. 마음이 바쁜 알랭이 앞서 걸으며 걸음을 재촉하는 사이 최하늘이 은근슬쩍 오한결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수상하게 웃으세요? 뭔가 이상한 거라도 발견하셨나요?”
오한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최하늘 씨는 이 많은 작품이 어디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요?”
“어머……. 글쎄요?”
“대부분 약탈한 거죠.”
“!!”
최하늘이 놀라는 사이 오한결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나폴레옹이 예술품으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많은 예술품을 약탈했는지, 5만 점에 달하는 이집트 유물과 수많은 그리스, 이슬람의 조각, 장식까지 모두 약탈품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알랭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맞습니다. 알고 계시는군요.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하지만 나치 약탈품 등 반환이 필요한 문화재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려는 시도는 계속하고 있지요. 앞으로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래야겠지요. 그럼, 계속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알랭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자 일행들은 급히 그를 따라 걸었다. 잠시 뒤 커다란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왔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저 계단 난간에 있는 조각품을.”
오한결은 작품을 한눈에 알아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 저것은 <사모트라케의 니케> 잖아!”
오한결 반응에 흡족한 알랭은 일행을 데리고 조각상 근처로 이동했다.
작품을 가까이에서 본 최하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조각상도 그리스 여신인가요? 날개가……. 너무 멋져요.”
왕 팀장도 작품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음, 언제 봐도 멋진 작품이죠. 이 작품이 유독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왕 팀장의 말에 알랭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잠시만요, 왕 팀장님. 오한결 작가님이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죠, 진정한 예술품은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알랭의 말처럼 오한결은 <사모트라케의 니케>에 사로잡힌 듯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론으로 완벽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위대한 조각상 앞에서 자신의 지식이 한없이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승리의 여신 니케.
팔과 목이 없는 여신은 역동적인 자세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오한결은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작품을 관찰했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살짝 뒤틀어버린 여신의 몸.
기울어진 날개 각도, 앞으로 뻗은 왼쪽 다리, 바람에 펄럭이는 여신의 옷. 그리고 주름진 옷이 다리를 휘감은 모양.
세상에! 저게 정말로 대리석 조각이란 말인가!
오한결이 최하늘에게 말했다.
“조각상 옷을 보세요. 마치 물에 젖어 몸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보이죠? 대리석을 조각해 저 섬세한 주름을 만들었어요. 보고도 믿기지 않네요.”
최하늘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맞네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어요. 다른 조각품들은 거의 알몸이라 근육의 섬세함만 보였는데, 옷을 입은 조각상이라니. 너무 신기해요.”
알랭이 말할 타이밍을 찾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조각상에 얼굴이 남아있었다면 승리의 여신답게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겠죠. 박물관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멋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그 자체로 위대한 프랑스의 유산입니다.”
알랭의 설명에 오한결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랬군!”
“왜요, 작가님? 무슨 영감이라도 받으셨나요?”
다들 호기심 어린 얼굴로 오한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한결은 마치 조각상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환영에 빠져있었다. 몸체와 날개만 남은 이 조각상은 그야말로 완벽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위대한 작품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오한결의 영혼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와 연결되는 듯한 순간이었다.
“결핍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입니다. 역설적인 만큼 더 감동적으로 느껴지네요.”
왕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설명을 듣고 나니, 좀 다르게 보이는군요.”
알랭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조각상은 100여 점의 거대한 파편으로 발견됐어요. 아쉽게도 머리와 팔은 끝내 찾을 수 없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없어진 조각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아요. 그 부족한 모습 자체가 작품이 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으니까요. 진정한 작품의 아우라란 이런 거겠죠?”
시계를 확인한 알랭이 말했다.
“자, 이제 프랑스를 이끄는 여신을 볼 차례입니다. 서두르시죠.”
알랭의 말에 최하늘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마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말인가요?”
“네, 잘 아시는군요. 프랑스에 왔으니 원작을 봐야겠죠!”
알랭의 말에 오한결도 덩달아 들떠 외쳤다.
“오!! 서두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