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비즈
사람들로 북적이는 인천국제공항.
오한결과 최하늘은 캐리어를 끌며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다.
최하늘이 휴대폰을 확인하고 말했다.
“알랭이 이 근처에 있다고 문자가 왔어요.”
오한결은 스치듯 지나가는 많은 외국인들을 살폈다.
“저기 있네요. 알랭!!”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쓴 낯선 외국인을 보면서 최하늘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알랭 맞아요? 완전 다른 사람인데……. 작가님은 관찰력 하난 끝내주시네요.”
알랭이 다가와 선글라스를 벗고 씨익 웃었다.
“정말 멋진 공항이네요. 입국할 땐 바빠서 지나쳤는데 시설이 이렇게 훌륭한지 지금 깨달았어요. 이곳저곳 살펴보다가 그만 길을 헤맸네요. 부끄럽군요.”
오한결이 휴대폰을 보며 무심히 설명했다.
“인천국제공항 만큼 규모가 큰 공항도 드물죠. 인천 앞바다 섬 일대를 간척한 곳이니까요. 규모뿐만 아니라 서비스도 세계 최고입니다. 매년 스카이트랙스 평가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고 항공화물처리 수준도 따라올 나라가 없으니까요.”
최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한결을 쳐다봤다.
“어머, 그걸 어떻게 다 아세요?”
오한결이 휴대폰을 내보이며 말했다.
“검색했어요. 별 거 아닙니다.”
“……아.”
알랭이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유머 감각도 뛰어나시군요. 어쨌든 오한결 작가의 해박한 지식 덕분에 한국 여행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번엔 내 차례예요. 진정한 파리지앵으로서 오한결 작가님과 최하늘 씨에게 멋진 프랑스 파리를 알려주고 싶군요.”
최하늘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알랭을 바라봤다.
“너무 기대돼요. 사실 몇 년 전에 프랑스 출장을 다녀왔는데, 빠듯한 일정 때문에 완전 일만 하다가 왔다니까요. 기억나는 건 꿉꿉한 숙소 냄새뿐이네요.”
웅.웅.웅.
휴대폰 진동에 오한결이 전화를 받았다.
[오한결 형님! 저희도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니……. 여길 왜 왔어?]
툭, 전화가 끊기자 오한결이 당황스런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하늘 씨. 무열이도 같이 가나요? 지금 공항에 왔다는데요.”
“네? 아니요……. 저와 작가님만 가는 일정인데…….”
“오한결 형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오한결과 최하늘이 긴장한 얼굴로 뒤돌아봤다. 최무열이 노을과 서정익 작가와 함께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혹시 일정을 오해한 거라면…….”
노을이 실소를 머금고 말했다.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희는 두 분 배웅하려고 왔죠. 얼굴도 못 보고 보낼 수 없잖아요.”
상황을 이해한 오한결과 최하늘은 민망함에 웃고 말았다.
“근데 일주일 출장인데, 누가 보면 이민 가는 줄 알겠어. 암튼 너무 고마워.”
오한결은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한 채 발을 비비꼬는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그동안 타인과 교류가 많지 않았던 서정익 작가에게는 이런 낯간지러운 상황이 몹시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서정익 작가! 잘 다녀올게. 배웅해줘서 고마워요.”
할 말을 찾는 듯 입을 우물우물거리던 서정익 작가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노을 씨와 최무열 씨랑 같이 작업할 것 같아요…….”
노을이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그거 있잖아요, 삼각지 화랑거리 조각품. 그때 폐자재로 만들기로 한 거요.”
오한결이 몹시 놀라 서정익 작가를 쳐다봤다. 천하의 서정익이 누군가와 작업을 한다고? 고집 세고 자기만의 작품 세계가 뚜렷한 서정익이 과연 이 친구들과 작업을 할 수 있을까? 만약 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까?
그리고 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나왔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좋았어! 아주 좋았어!”
오한결의 과한 반응에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알랭이 은근슬쩍 오한결 곁에 섰다.
“친구들이 많이 왔군요. 오한결 작가님 인기가 많습니다.”
최하늘이 알랭을 소개하자,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아는 그 알랭? 헐!”
서정익 작가가 알랭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현대미술의 한 획을 그은 살아 있는 전설! 예술의 중심 프랑스에서 독자적인 예술 ‘코드’를 만들어 세계를 놀라게 한 현존하는 최고 예술가.
젊었을 땐 다양한 시도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면 현재는 이미지의 폭력성만을 강조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불쾌감을 유발하는 작품을 사랑하는 작가. 그래서 그를 ‘불쾌한 예술가’라고 부른다.
알랭은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오한결을 향해 방긋 웃었다.
“이제 그만 가시죠. 프랑스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 * *
12시간의 긴 비행 후.
샤를드골국제공항에 비행기가 부드럽게 착륙했다.
긴 비행시간에 몹시 지친 오한결, 최하늘과 다르게 고향에 온 알랭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알랭에겐 서울은 호기심 가득한 여행지였지만 그만큼 낯선 환경에서 느껴지는 긴장감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알랭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물었다.
“오한결 작가님. 공항 이름이 뭘 뜻하는지 아십니까?”
‘샤를드골, Charles De Gaulle’
단어를 인식하는 순간 오한결은 머릿속에 저장된 해당 지식을 꺼내놓았다.
“샤를드골은 프랑스 군인이자 정치가였죠. 18대 대통령을 지냈고요. 그의 유명한 업적으로는 알제리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프랑스 경제 문제가 해결됐으니까요. 그는 ‘드골’ 체제를 완성 후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 부흥을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알랭이 크게 박수를 보내며 말했다.
“정확합니다! 또 다시 작가님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오한결은 피곤한지 눈을 껌뻑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엊그제 프랑스 관련 책을 읽었어요. 그뿐입니다.”
최하늘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 오한결 작가님을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관심이 없으시죠. 그래서 더 멋진 것 같아요.”
무심코 던진 속마음에 최하늘이 얼굴을 붉혔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근처에 지나가는 낯선 외국인에게 말이라도 걸어야 하나. 그래야 이 민망함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극도의 혼란에 빠진 최하늘에게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낯익은 중년 남성이 최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 씨, 여기에요!”
남자가 다가와 최하늘과 볼을 맞대고 ‘쪽’ 소리를 냈다.
오한결은 그게 프랑스식 인사인 ‘비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직접 보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최하늘이 한 발자국 물러나 남자와 물리적 거리를 유지했다.
“왕 팀장님! 잘 지내셨죠?”
“하늘 씨는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프랑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한결은 팔짱을 끼고 매의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뭐라는 거야.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
왕 팀장이 알랭을 알아보고는 그를 덥석 안아버렸다.
“오! 알랭! 만나서 반갑습니다. 평소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알랭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최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남자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왕진범 팀장입니다. 여기선 왕 팀장으로 부르죠. 명일문화재단 프랑스 파리 지부 소속입니다. ‘명일 인 프랑스 레지던시’에서 작가 교류 및 예술 지원 총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알랭이 재빨리 왕 팀장을 밀어내고 말했다.
“아하, 반갑습니다. 저도 파리예술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앞으로 당신 단체와 교류를 많이 하게 될 것 같군요. 신수진 이사장과 이미 얘기가 끝난 상태입니다.”
“영광입니다!”
왕 팀장은 고개를 돌려 오한결을 쳐다봤다. 이미 프로필을 익혔기 때문에 오한결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오한결 작가님! 환영합니다. 여기서도 천재라고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하하.”
오한결은 동요하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왕 팀장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제가 직접 오한결 작가님을 모실 겁니다. 사전에 일정 공유를 해야 했는데, 워낙 현지 변수가 많아 그러지 못한 점 양해 바랍니다. 아직도 픽스가 안 된 일정이 많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설명 드리자면, 오한결 작가님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명일 인 프랑스 레지던시’에 머물며 프랑스 작가들과 교류하고 가시적인 예술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알랭이 끼어들었다.
“왕 팀장님. 부탁을 좀 해도 될까요?”
왕 팀장이 허겁지겁 놀라며 말했다.
“부탁이요? 헉! 영광입니다. 작가님!”
“오한결 작가에게 직접 파리를 안내해주고 싶습니다. 며칠간은 파리 여행 일정으로 잡아 주면 안 되겠습니까?”
“알랭 작가님이 직접 안내해준다고요? 와우, 믿을 수가 없군요.”
왕 팀장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정은 변경이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모든 일정은 서울에서 정했기 때문에 제가 현지에 있긴 하지만 변경 권한이 없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의 알랭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그가 휴대폰을 왕 팀장에게 건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왕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허공에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 숙여댔다. 그리고 이어지는 네, 네, 네, 대답들.
전화를 끊은 왕 팀장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수진 이사장님께서 실컷 여행해도 좋다고 하시네요. 모든 경비도 문화재단이 지불하고요.”
“끼약!! 어떡해!!”
최하늘이 깡충깡충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의식한 최하늘이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얌전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오한결이 히죽 웃었다.
“여행도 좋지만, 사전에 계획된 작가 교류와 예술 활동 모두 소홀히 하고 싶지 않은데요.”
다이어리에 뭔가를 기록하던 왕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물론 모든 일정을 소화할 겁니다. 여행 일정이 추가된 것일 뿐이에요. 다만 예술 활동 스케줄이 빠듯해 퀄리티 높은 작품을 기대하긴 힘들어진 것 같습니다.”
오한결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작품을 오래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그럼 여행과 예술 활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겠군요.”
왕 팀장은 신인 작가의 현실성 없는 과도한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좋긴 한데…….”
꼬르륵꼬르륵.
누군가의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왕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배가 고픈가 보군요! 레지던시로 가시죠. 가서 식사합니다!”
개인 일정이 있는 알랭은 떠났고 오한결, 최하늘, 왕 팀장은 택시를 타고 레지던시로 향했다.
택시에서 본 프랑스의 밤거리는 매혹적이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거리를 은은하게 밝히는 조명등의 아름다움. 오한결과 최하늘은 택시 창밖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오한결은 붉은색 문이 달린 4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봤다.
‘서울에 있는 아뜰리에 건물과 비슷하잖아.’
서울 건물은 외국에 한옥을 세운 것처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이 건물은 주변과 조화를 이뤄 한껏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가 레지던시입니다. 1층은 카페로 쓰고요, 2층은 작업실 및 회의실, 3층은 여자 숙소, 4층은 남자 숙소입니다. 오늘부터 오한결 작가님과 최하늘 씨는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예요. 자, 들어가시죠.”
오한결이 캐리어를 번쩍 들고 계단에 오르자, 최하늘도 왕 팀장의 도움을 받아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붉은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왕 팀장! 친구들을 데리고 왔구나.”
금발의 여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창백한 피부에 검붉은 주근깨가 매력적이었고 강렬한 붉은 입술은 누군가를 유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클로에, 여긴 오한결 작가님, 그리고 이분은 문화재단 직원 최하늘 씨야.”
오한결은 클로에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정말 미인이세요. 몹시 아름다워요.”
클로에가 오한결에게 다가가 볼을 맞대고 ‘쪽’ 소리를 냈다.
최하늘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