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붉은 등대
이른 아침.
검푸른 하늘 아래 빨간 SUV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텅 빈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여유롭게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최하늘이 오한결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작가님, 잠깐 주무셔도 돼요. 아침 일찍이라 힘드실 텐데.”
오한결이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하자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가 옆에서 잘 순 없죠. 최하늘 씨 졸음운전을 감시해야 하거든요.”
“어머……. 좋네요. 호호.”
오한결이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피곤했나 보네요. 다들 밤샘 작업 때문에 새벽에 쉽게 못 일어났을 텐데, 아무도 늦지 않게 와줬네요. 너무 고맙죠.”
최하늘이 전방을 주시한 채 슬쩍 미소를 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번개 여행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요. 일상을 살다가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는 거죠. 그게 바다라니, 너무 낭만적인 것 같아요. 이거 누구 아이디어에요?”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서정익 작가요.”
“어머! 의외네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마도 그 반대일 수도…….”
네비게이션이 근처 휴게소 위치를 알리자, 오한결이 뒤돌아 소리쳤다.
“다들 일어나! 화장실 간다며!!”
휴게소에 정차한 차량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길을 나섰다.
차 내부에 음식 냄새가 가득하자, 오한결이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을 내렸다.
“이따가 식사 안 할 거야? 무슨 음식을 그렇게 많이 사왔어?”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가 반건조 오징어를 뜯으며 오한결을 쳐다봤다.
“여행의 묘미는 휴게소 음식이죠. 은근 이럴 때 보면 꼰대 같다니까?”
“맞아. 아버지 잔소리 같아. 하하.”
“…….”
“음악 좀 틀어주세요. 신나게 가야죠.”
오한결이 버튼을 누르자 빠른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뒷좌석에 앉은 세 사람은 한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노을은 중간 중간 끼약, 꺄악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고, 최무열과 서정익 작가는 연신 박수를 치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더 달렸을까.
드디어 맑고 푸른 동해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바다다!”
“몇 년 만이냐, 이게.”
“뭔 소리야. 얼마 전에 바다로 엠티 갔다 왔잖아.”
“…….”
최하늘이 백미러로 뒷좌석을 살피며 말했다.
“작가님들이라 꽤 감성적이네요. 차를 잠시 세울까요?”
뒷좌석 앉은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네! 저기 빨간 등대 앞에 세워주세요.”
차에서 내린 오한결 일행은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경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 아래 푸른 바다의 일렁거림.
그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빛의 반짝임.
건너편 어촌마을의 붉은 지붕들과 은연중 느껴지는 잔잔한 마을 분위기.
오한결 일행은 도시와 사뭇 다른 풍경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바다 냄새 가득한 해풍이 갈매기 울음소리를 싣고 그들 곁을 스쳐 갔다.
끼륵 끼륵 끼륵.
날개를 활짝 편 갈매기 몇 마리가 그들 주위를 맴돌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오한결은 고개를 돌려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그는 작가답게 주변 풍경을 예리하게 관찰하며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외부와 단절한 채 작업실 생활을 자초했던 서정익 작가 아닌가?
마치 상처 입은 동물이 동굴에 숨어 지내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때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가 방파제 끝에 서 있는 붉은 등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슨 내기를 했는지, 서로 먼저 도착하겠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등대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은 심하게 헐떡거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잠시 뒤, 이야기를 나누던 최무열이 서정익 작가에게 헤드록 걸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하늘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장난하는 거겠죠? 무슨 얘들도 아니고.”
“얘들이죠. 아직 20대잖아요.”
최하늘이 불쑥 오한결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리도 20대예요…….”
“아……. 그렇죠…….”
거친 바닷바람에 최하늘이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개인전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나오니까 너무 좋죠? 기분전환도 되고.”
“저 친구들이 더 고생했죠. 저는 뭐……. 딱히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하.”
최하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 신기해요. 제가 작가들하고 일을 많이 했는데, 작업할 땐 조그만 문제만 생겨도 작가 본인이 스트레스를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릴 것처럼 행동하거든요. 반면, 오한결 작가님은 언제라도 여행가자고 하면 가실 거 같아요. 그만큼 여유가 넘치시거든요.”
“가자고 하면 가야죠. 여행.”
“……어머.”
최하늘이 혼자 얼굴을 붉히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사이, 오한결이 붉은 등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어서 가죠. 다들 기다리는 것 같은데.”
붉은 등대 앞에 도착한 오한결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푸른 바다와 대비되는 붉은 등대. 그것은 강렬한 시각적 흥분을 자아냈다.
관광객에겐 즐거움을 주는 건축물이지만 어부들에게는 뱃길을 알리는 생명과도 같은 불빛일 것이다.
오한결이 외쳤다.
“모두 등대 앞에 서 볼래? 내가 너희들을 그려주고 싶어.”
“정말요?”
“대박!!”
환생 전 한 생을 길게 살아보니, 결국 남는 건 사람이었고 관계였다. 어렵게 얻은 소중한 인연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물론 오한결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최하늘 씨도 같이 서세요.”
“아, 저도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우린 한 팀이잖아요.”
“어머…….”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낸 오한결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하자 바닷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보고 있는 것, 이 바다 냄새. 그리고 바람의 숨결까지.
모두 그림 안에 담으리라.
“자연스럽게. 웃고 떠들어도 됩니다.”
부쩍 친해진 노을, 최무열, 서정익 작가는 다시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최하늘만 유일하게 오한결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연필을 잡은 오한결 손은 평소보다 빨리 움직였다. 그래도 정교함을 놓치지 않는 대가의 노련함이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거리예술가 노을.
열정 가득한 미대생 최무열.
자신의 어두운 내면을 예술로 승화하는 미완성된 천재 작가 서정익.
그리고 진정으로 작가를 위하는 최하늘.
오한결은 외형의 정확성이 아닌 그들의 따스한 내면이 그림에 담길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잠시 뒤, 오한결은 <붉은 등대와 친구들> 작품을 완성했다.
* * *
퇴근을 서두르던 김 교수가 복도 끝 무용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또, 연습 벌레 노진홍일 것이다.
끊임없는 연습이 훌륭한 발레리노를 만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재능이라는 배경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김 교수가 바라본 노진홍은 몹시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가 국내 최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분명 엄청난 연습량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연습량으로 부족한 재능을 메울 수 있을까?
오늘만큼은 현실을 알려줘야겠다.
노진홍이 실망하더라도 그건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지도 교수로서 제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니까.
음악 소리가 들리는 무용실 문을 슬며시 여는 김 교수.
역시 예상대로 노진홍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달라졌는데……. 그래, 분명 노진홍 평소 모습 하고 달라.’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 그리고 그의 달라진 표정.
이를 악물고 의지만 독하게 뿜었던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노진홍이 왼발로 중심을 잡고 오른발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직각을 만들었다.
‘굉장히 부드러운 몸동작이군. 노진홍이 저렇게 유연했나?’
노진홍이 손을 저으며 다리 각도를 조절했다.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골반 회전각!’
하체에 힘이 들어가고 반듯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엉덩이 관절의 강력한 잠금과 곧추세운 상체! 대단해! ‘아라베스크’ 동작을 완벽하게 구현했어.’
숨을 고른 노진홍이 투 스텝 후 오른발로 점프했다.
‘유연한 발동작, 발등을 무척 잘 쓰는군.’
공중에서 몸을 180도 회전한 후 발을 교차해 떨어지는 동작을 마무리했다.
‘아니, 저건! ‘쥬떼 앙트르낭’이잖아. 저렇게 잘했다고?’
김 교수는 그대로 얼음이 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노진홍은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했고 그때마다 그것들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방해할 수 없었다. 아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제자의 완벽한 춤을 본다는 건 축복과도 같은 거니까.
몰래 훔쳐보던 김 교수의 다리 힘 풀리자, 그가 바닥을 향해 고꾸라져 버렸다.
“어……. 교수님!”
노진홍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까지 연습한 것 같네요. 바로 정리하고 나가겠습니다.”
김 교수는 노진홍 근처로 다가와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네?”
“자네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잘 출 수 있지? 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나?”
노진홍은 당황스러웠지만, 평소 존경하던 김 교수가 몹시 진지하게 요청했기 때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점프 동작을 바로 해 보였다.
노진홍이 부드럽게 착지하자 김 교수가 환호성을 질렀다.
“와우! 대단해. 믿을 수가 없구먼.”
만족한 미소를 짓는 노진홍에게 김 교수가 말했다.
“자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나? 어떻게 이렇게 달라지지? 심지어 다리 인대 치료까지 받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해보게. 궁금해 미치겠네.”
노진홍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오한결 작가의 마법일까요.”
김 교수의 한쪽 눈썹이 삐쭉 치솟았다.
“그게 뭐지?”
“전 발레를 즐기라는 오한결 작가의 충고를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복의 대상이었던 발레를 이제는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고 있어요.”
김 교수가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한결 작가? 뭐 아무튼. 정말로 그게 다인가? 그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물론 즐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추상적인 답변일세. 전문 무용가가 겪어야 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은 절대로 ‘즐거움’으로 극복할 수 없는 거야.”
“아닌데요. 전 정말 즐기려고 노력했어요. 그게 다예요.”
“나를 놀리는 건 아니지?”
노진홍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 연극 단원들을 떠올렸다. 기본적인 동작도 소화하지 못해 쩔쩔매는 바보들. 하지만 그들에게 발레는 즐거운 놀이였다. 항상 웃고 떠들고, 못하는 친구들을 놀리며 자신은 잘한다고 깔깔대는 모습.
언제부터 그가 잊고 살았던 ‘춤추는 즐거움’.
노진홍 자신은 발레를 즐기려고 노력해본 적이 있을까?
즐길 수 없다는 막연한 두려움 말고 진짜 즐겨보려는 노력 말이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노진홍의 몸동작이 변하기 시작했다.
잔뜩 들어갔던 힘이 빠지고 긴장으로 팽팽해진 근육이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동작을 성공할 때마다 기쁨이 찾아왔고 처음으로 발레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노진홍이 김 교수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발레는 참 즐거운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