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59화 (59/202)

제59화 대형 가위

전시장 구석에 푸른빛의 ‘출구’ 표시등을 따라 밖으로 나가자, 분위기가 전혀 다른 전시 공간이 나타났다.

앞선 미디어아트 전시 공간이 어둠이었다면, 이번엔 눈이 시릴 정도의 흰색 벽면에 공모전 당선작인 <그리움, 다시 시작>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거대한 흰색 벽면은 압도적인 여백의 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움, 다시 시작> 앞에선 오한결 가족.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라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흘 동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그림만 그렸던 오한결. 가족들은 혹여나 건강이 상하지나 않을까, 노심조차 하며 닫힌 그의 방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흘간 작품과 하나가 된 오한결은 결국 자신만의 언어로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작품을 마친 오한결이 잠들어 버렸고 결국, 접수 마감 30분 전에 깨어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가족들은 군사 작전을 벌이듯 전투적으로 문화재단 접수처까지 달려갔었다.

마감 10분 전에 도착한 오한결은 그렇게 작품을 접수할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 가족은 하나가 되었고 이제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아버지 오준근이 말했다.

“앞서 영상화된 작품을 보고 이렇게 원작을 다시 보니, 확실히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구나. 그리움! 그래 그게 느껴지는구나.”

동생 오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그림을 보면서 깨달았어. 아! 그림은 잘 그릴 필요가 없구나.”

“…….”

침묵이 감돌자, 오한수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내 말은……. 보통 사람들은 형태가 완벽한 사진 같은 그림을 봐야, 작가의 실력이 좋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형은 오직 추상적 표현만으로 인간의 격한 감정을 성공적으로 전달했어. 형은 예술이 뭔지 증명했다고!”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기특한 녀석! 그게 바로 내가 이번 작품에서 추구했던 미적 방향이야. 현대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고.”

“현대예술 싫어. 머리 아파.”

“방금 작품을 기가 막히게 해석해 놓고 엄살은.”

“아, 맞다. 그랬지. 우하하.”

어머니가 그림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음……. 영상화된 작품을 보고 한결이의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는 되는데 말이다. 근데, 작품 하나 이해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한 거니? 너무 어렵구나.”

잠시 고민한 오한결이 입을 열었다.

“현대 예술의 단점을 바로 지적해 주셨어요. 독자가 예술 언어를 배우고 훈련을 통해 감각까지 길렀을 때 작품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지배적 의견이죠. 현대 예술의 불친절함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요. 예술 언어라는 게 따로 있나요? 엘리트 위주의 예술이 현대 사회의 모순을 깨부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예술이란 건 그런 사회적 부조리를 깨부수기 위한 작가들의 도전일 텐데 말이죠.”

열정적인 오한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가족 모두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동생 오한수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배경지식도 중요하지만, 그냥 느껴지는 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면 그만이라고!”

동생 오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뭐, 어쨌든 예술은 멋진 거네. 형 작품처럼.”

“한수야. 야! 오한수!”

불현듯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오한결 가족 모두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노진홍이 씨익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자, 오한결이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발레리노 노진홍!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요?”

“네, 오한결 작가님 덕분에 이제 슬럼프도 완전히 극복했어요. 개인전 너무 축하드려요. 꼭 첫날에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어요. 하하.”

“다행이네요. 얼굴도 많이 좋아 보여요.”

“근데, 발레 강사료가 생각보다 많아 너무 놀랐어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오한수가 끼어들었다.

“그럼! 연극 단원들이 요즘 발레에 푹 빠져 지내잖아. 난 발레가 이렇게 재밌는 건지 몰랐어. 아, 또 발레하고 싶네. 아 나의 미친 재능.”

아버지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놈아, 한결이가 한 일을 가지고 네가 생색내면 어쩌냐.”

노진홍이 아버지를 알아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병실에서 뵙던……. 팔은 괜찮으세요?”

아버지가 팔을 흔들며 씨익 웃었다.

“아주 멀쩡해요. 학생은 다리 괜찮고?”

노진홍도 한쪽 다리를 흔들어 보였다.

“저도 멀쩡해요. 오래 서 있으면 살짝 저릿했는데, 신기하게도 오늘 전시장을 오래 돌아다녔는데 아주 멀쩡하네요. 여기에 좋은 기운이 있나 봐요.”

오한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 그런가? 그나저나 작품은 마음에 들어?”

“아주 멋졌어. 솔직히 나한테 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잘 됐구나. 그럼 한수가 친구 데리고 가서 작품 설명해 줄래? 형한테 들은 대로만 하면 되잖니.”

“아, 그럼 되겠구나. 진홍아 그렇게 할래?”

노진홍이 흥분하며 말했다.

“나야 무조건 고맙지. 내가 늦게 와서 큐레이터 설명을 못 들었거든. 진짜 궁금했어. 굉장히 심오한 그림 같은데, 뭐랄까, 영원히 풀 수 없는 수학 문제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오한결이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수학 문제야…….”

오한수가 반박했다.

“형! 그걸 몰라서 물어? 진홍아 가자.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

동생이 노진홍과 자리를 뜨자, 오한결은 부모님께 사람들 없는 곳에 가서 좀 쉬자고 말했다.

미술관 야외로 나온 오한결과 부모님은 기괴한 작품 하나와 마주쳤다.

푸른 잔디 위에 우뚝 솟은 ‘대형 가위’.

땅에 처박힌 묵직한 손잡이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가윗날이 무척 위압적 느껴졌다.

‘낯설게 하기.’

낯선 것은 충격을 주고 때로는 불쾌감을 일으킨다. 평소 익숙한 대상이 작가의 손에 의해 변형돼 낯설어지는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은 확장된다.

이 가위 작품은 전형적인 예술 문법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오한결과 부모님은 미술관 입구가 보이는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직도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구나. 이제 좀 한결이의 인기가 실감 나네. 멋지다 우리 아들!”

벤치 끝에 엉덩이를 걸친 오한결이 다리를 쭉 펴며 스트레칭을 했다.

“하하. 아직 보여드릴 게 더 많아요. 감사하게도 제가 딱 생각한 대로 삶이 진행되고 있네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웅.웅.웅.웅.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오한결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최하늘이었다.

[작가님, 지금 어디예요!!]

“잠깐 쉬고 있는데……. 왜요?”

[곧 ‘작가와의 만남’ 시작한단 말이에요. 빨리 오셔야 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1층 로비로 갈게요.”

무대가 꾸며진 1층 로비에는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보기 위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한결 친구인 레크레이션 강사 차승현이 사회를 맡았다.

“자자, 여러분! 오늘 즐거우셨나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굉장했어요!”

“최고의 전시였어요!”

차승현이 말했다.

“오한결 작가의 얼굴을 보면 더 놀라실 텐데요! 꼭 현대 미술을 닮았거든요.”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차승현은 무대 뒤쪽에서 어슬렁대는 오한결을 발견했다.

“자, 오한결 작가님이 도착했다고 하네요. 바로 모실게요!”

오한결이 무대 위에 오르자 사람들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하던 오한결을 향해 차승현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엄청난 인기네요. 오한결 작가님. 소감 한마디 하시죠.”

마이크를 건네받은 오한결이 전혀 긴장하지 않고 능숙하게 말했다.

“아리 미술관 20주년 기념 전시에 제 개인전을 하게 돼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큰 기회를 주신 명일그룹과 문화재단 관계자 분들, 오늘 행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차승현이 말했다.

“각종 언론에서 이미 오한결 작가를 다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대략 작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작가와의 만남’에서 우리가 제일 궁금한 건 무엇일까요?”

차승현이 운을 띄우자, 어떤 사람이 덥석 물었다.

“여자 친구 있어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1층 로비에 울려 퍼졌다.

오한결이 차승현을 노려보자, 그는 잘못이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차승현이 질문자에게 말했다.

“예술가의 여자 친구는 국정원도 몰라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 알려드릴 수 있죠. 오한결 작가가 누구를 만난다면 그 사람은 분명 현대 예술 같은 사람일 겁니다. 제 말뜻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죠.”

키득 키득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중년 외국인이 손을 번쩍 들고 영어로 질문하자, 분위기가 일시에 얼어버렸다.

“작품 잘 봤습니다. 큐레이터 작품 설명까지 모두 들었는데요. 삼각지 화랑거리의 부활을 꿈꾸시는 겁니까? 전 한국의 몽마르트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님은 어떻게 삼각지 화랑거리를 프랑스 몽마르트처럼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오한결은 쉽게 알아들었지만, 잠시 통역사가 통역하는 것을 기다려줬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작가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저는 일단 그들이 삼각지 화랑거리에 모인다면 프랑스 몽마르트 보다 뛰어난 예술 장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유인책은 비밀입니다.”

“오한결 작가님은 참 순수하군요.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유능한 작가들이 모인다고 해서 삼각지 화랑거리가 세계적인 예술 명소로 바뀌진 않을 것 같은데요. 오늘 작품을 보니 분명 오한결 작가님은 세계적인 수준의 작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판 몽마르트라는 꿈을 이루기엔 혼자서 역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오한결은 깊고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을 바라봤다. 그는 오한결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치 진실을 얘기하라고 책망하듯 붉은 콧수염 아래로 다부진 입술을 살짝 깨물어 보였다.

오한결이 무대 중앙에 서자, 객석에 앉은 아트화랑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눈빛은 어떤 간절함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천재 작가를 향한 부푼 기대일 것이다.

“삼각지 화랑거리에 세계적인 수준의 ‘오한결 미술관’을 지을 겁니다. 그 유명세를 빌어 전 세계 예술인들을 한국으로 모여들게 할 거고요. 그렇게 되면 프랑스의 몽마르트의 영광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겠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낮은 읊조림도 들렸다.

중년 외국인이 손을 들고 말했다.

“꽤 흥미롭군요. 그대의 위대한 여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 돌려 외국인을 쳐다보는 사이, 최하늘이 재빨리 무대에 올라와 오한결에게 속삭였다.

“저분이 프랑스 현대 미술의 대가 ‘알랭’ 작가예요. 개인전 끝나고 인사 나누기로 한 거 기억나시죠?”

“그렇군요. 짐작했습니다.”

오한결이 씨익 웃어 보이자, 알랭도 미소로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