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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57화 (57/202)

제57화 석고 삼총사

똑. 똑. 똑.

양승호 비서가 회장실 문을 살포시 열고 들어왔다.

“회장님, 오한결 작가님 오셨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벌떡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어이구, 작가님, 개인전 준비로 한창 바쁘실 텐데 저를 찾아오셨군요.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요? 말씀해보세요.”

오한결은 회장 책상에 서류 뭉치들이 쌓인 것을 바라봤다.

“개인전을 앞두고 감사 인사 차 왔습니다, 제가 방해했나요?”

신태진 회장이 대충 책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온다는 소식 듣고 지금까지 기다렸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소파에 앉은 오한결이 신태진 회장 손가락에 난 상처를 발견하자, 그가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가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아, 이거요? 연필을 깎다가 그만…….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손가락을 베고 말았군요.”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석고 소묘를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무척 흥미롭기도 했고요. 분명 사연이 있을 거로 생각됩니다.”

신태진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틀린 건 아닐 테지요. 어릴 적 향수라고 해두죠. 이제 다 늙었는데도 종종 고등학교 미술 시간이 생각납니다. 친구들과 석고 소묘를 하며 즐거웠던 그때가 몹시 그리울 때가 있어요. 아마도 미술을 포기해야 했던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오한결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하겠습니까? 민망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작가님.”

쑥스럽게 미소 짓는 신태진 회장을 오한결이 지그시 바라봤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것만큼 확실한 예술적 동기도 없을 것이다. 오한결은 그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그림을 보여주세요.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네요.”

“에이, 그림이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구 모양이나 원뿔 정도 그리고 있으니까요. 조만간 석고 소묘를 할 거 같은데, 자신이 없군요. 그래도 이풀잎 선생이 워낙 꼼꼼하고 잘 가르쳐주니까 재미는 있습니다.”

오한결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여기서 석고 소묘를 그려볼까요? 그림은 회장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몹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입니까? 오한결 작가님의 석고 소묘를 직접 보다니요. 살면서 그런 큰 선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그럼 이젤과 연필을 준비해 주시겠어요. 석고는 필요 없습니다.”

“아, 그래요? 석고를 보고 그려야 하지 않겠어요?”

오한결이 슬쩍 미소 지었다.

“이미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 * *

한 시간 후.

양승호 비서가 이젤과 의자를 들고 회장실로 들어왔다.

심부름을 끝낸 양승호 비서가 나가려고 하자 신태진 회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딜 가는 거지? 자네도 같이 봐야지.”

민망해하는 양승호 비서를 향해 오한결이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안심시켰다.

“석고 소묘 배우신다고 들었어요. 같이 보세요. 도움이 되실 거예요.”

오한결이 이젤 앞에 앉자, 신태진 회장과 양승호 비서도 캔버스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에게 말했다.

“잘 봐두게. 이건 돈 주고도 못 보는 진귀한 광경일세.”

“네, 회장님. 집중해서 보겠습니다.”

오한결이 연필을 쥐고 천천히 선을 그으며 말했다.

“석고 소묘는 한때 미대 입시생의 필수 과목이었죠. 그땐 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재밌는 사실은 한국과 일본에서 유독 석고 소묘를 활용한 입시 미술을 선호했다는 거예요. 지금은 획일화된 입시 미술에 대한 반발이 심해 소묘는 사라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의 창의성을 평가하고 있죠.”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요즘은 입시 미술로 석고 소묘를 안 하나 보군.”

“네, 2000년 이후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대부분 학교에서 폐지했어요.”

“아쉽지만, 그게 맞는 거 같네. 예술가를 양성하는 곳에서 창의성을 봐야겠지. 나 때만 해도 석고 소묘는 그리는 공식이 있다고 배웠거든.”

오한결이 얇은 선으로 형태를 잡자 다부진 인상의 남자가 그려졌다. 눈, 코, 턱 등 그림자가 진 곳에 연필을 눕혀 거친 선으로 과감하게 그려나갔다.

“아그리파 아닌가. 역시 전문가가 그리니까, 아그리파 특유의 묵직함이 생생하게 보이는군.”

“흔히 석고 소묘 삼총사라고 하면 아그리파, 비너스, 줄리앙을 말하죠. 이제부터 하나씩 보여드릴게요.”

양승호 비서는 오한결의 거침없는 손놀림과 정확성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신태진 회장이 오한결 작가를 찬양하는지 이제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한결이 그림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석고상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대리석과 청동 인물상이에요. 아그리파로 말할 것 같으면, 고대 로마의 유명한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흉상입니다.

“역시 장군이었구먼.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아그리파는 로마 공화정 말, 원수정 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이었죠. 옥타비아누스군을 이끌어 내전에서 승리한 거로 유명하고요.”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에게 물었다.

“자네도 나중에 저 석고상을 그려야 하네. 할 수 있겠지?”

“……네, 회장님. 그래도 다른 석고상 보다 그리기 쉬워 보이네요.”

오한결이 그림을 정교하게 다듬으며 말했다.

“아그리파는 입문용으로 알려져 있죠. 얼굴 형태도 간단하고 자세도 정적이고요. 하지만 특징이 없다 보니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석고상입니다. 잘못하면 밋밋해질 수가 있어요.”

밝음과 어둠, 그 중간의 색들이 정교하게 뒤섞이자 캔버스에 그려진 아그리파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깊은 눈과 뭉뚝한 콧날 그리고 다부진 입술은 그가 살아생전 용감하고 결의가 넘쳤던 장군이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한결이 캔버스를 바꾸며 말했다.

“다음은 ‘줄리앙’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의 등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그리파를 본 소감이 어떤가?”

“너무 놀랐습니다. 오한결 작가님은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으셨어요. 그림이 말을 걸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정확해! 그게 바로 오한결 작가의 마법이라는 거야. 이제 자네도 팬이 되었구먼.”

오한결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줄리앙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날렵한 턱선까지. 전형적인 미남형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실존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은 불운의 남자였죠. 본명은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였습니다. 피렌체의 부호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생전에도 화려한 외모로 유명했다고 하네요.”

“저런, 지병이 있었나 보군.”

오한결은 줄리앙의 곱슬머리를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그리며 말했다.

“병이 아니었어요. 피렌체 대성당 미사 때 라이벌인 피치 일가한테 살해당했죠. 그의 나이는 고작 25살이었어요.”

신태진 회장과 양승호 비서는 줄리앙의 아름다운 외모 뒤에 숨겨진 가슴 아픈 사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오한결은 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짙은 쌍꺼풀과 오뚝한 콧날 그리고 역동적인 목의 근육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오한결이 그림을 완성하자 신태진 화장이 무릎을 딱 쳤다.

“역시 대단해. 오한결 작가의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인물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군. 이제는 줄리앙이 측은해 보여.”

“감사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다음 거로 넘어가죠.”

앞서 두 인물과 다르게 오한결은 부드러운 선을 이용해 비너스의 형태를 섬세하게 잡기 시작했다.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너스군. 오한결 작가 솜씨라면 후광이 보이는 여신처럼 그려줄 것 같네만.”

구불구불 곱슬머리를 질끈 묶은 아름다운 비너스의 모습이 캔버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밀로의 비너스 두상입니다. 전신상 높이가 2미터가 된다고 합니다.”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알지, 잘 알고 있네. 작년 프랑스 출장 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직접 보고 왔네. 프랑스 갈 때마다 보고 오니까, 10번은 넘게 봤을 거야. 평범한 농부가 밀로의 비너스 상을 발견됐다면서?”

오한결이 막힘없이 설명했다.

“맞습니다. 1820년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했고, 그 이후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됐습니다.”

“역시 모르는 게 없어. 오한결 작가도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가봤나?”

1793년 설립된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파리 중심부 제1구 루브르 궁전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이다. 1989년 중국계 미국인 모더니즘 건축가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인 ‘루브르 피라미드’가 박물관 중정에 완공됐다. 380,000여 점을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35,000여 점의 작품을 상설전시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대표작품으로는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이 있다.

회귀 전 프랑스 정부의 초청으로 파리를 자주 방문했었다. 종종 유수의 문화예술 석학들과 루브르 박물관을 돌며 예술 철학을 논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오한결은 공식적으로 해외에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외에 나가보지 못해서요.”

신태진 회장이 몹시 놀란 얼굴로 오한결을 바라봤다.

“놀랍군. 오해하지 말게. 자네의 식견과 예술적 능력이 오로지 국내에서 꽃피웠다는 사실에 놀란 거니까. 앞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많을 걸세.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야.”

“네,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한결이 몸을 숙여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그림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회장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너무 고맙네! 내 보물이 하나 더 늘었구먼. 양 비서, 이 그림들을 액자에 넣어 회장실 벽면에 걸어주게나.”

양승호 비서가 조심스럽게 그림을 받아 챙겼다.

오한결이 말했다.

“일전에 유기견 보호센터 후원 관련해서 제가 그림 한 점을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이 그림들하고 무관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제가 멋진 그림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네. 내심 그게 걱정이었어. 하하.”

오한결이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리 미술관에서 뵙겠습니다.”

“훌륭한 개인전을 기대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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