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파블로 피카소
아뜰리에 작업실 문을 훅 열고 오한결이 들어오자,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오한결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오늘 무슨 날이야?”
흥분한 최무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늘 피카소 강의해주신다고 했잖아요.”
살짝 당황한 오한결이 진정하라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최하늘 씨도 있어서 물어봤어……. 다른 일이 또 있나 해서.”
노을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제가 하늘 언니 초대했어요. 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죠?”
오한결은 최하늘 옆에 앉은 서정익 작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최하늘이 얼른 대답했다.
“서정익 작가님은 제가 초대했어요. 오한결 작가님, 저희 두 사람 있어도 괜찮으시죠?”
오한결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이 커졌네요. 간단하게 피카소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야겠네요.”
서정익 작가가 조용히 말했다.
“들어보고 싶었어요. 오한결 작가님이 이론을 많이 아신다고 해서.”
오한결이 서정익 작가를 지그시 바라봤다.
“좋습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서정익 작가를 보니까, 무척 강의하고 싶어지네요.”
모두 웃음을 터트리자, 민망해진 서정익 작가도 억지로 미소지어 보였다.
오한결이 최무열을 바라봤다.
“피카소의 삶과 화풍의 변천 과정에 대해 알려줄 거야. 자세한 내용과 그림 정보는 개인적으로 공부해야 되는 거 알고 있지?”
최무열이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재미난 방식으로 해볼게요.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오한결이 작업실 중간에 놓인 이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 그를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오한결이 손에 연필을 쥐고 하얀 캔버스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 볼게요. 그럼 훨씬 이해가 빠를 겁니다.”
최하늘이 흥분하며 말했다.
“어머! 전 이런 거 처음 봐요. 오한결 작가님 그림 작업을 실시간으로 보다니…….”
노을과 최무열이 동시에 말했다.
“저희도 처음 봐요.”
서정익 작가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동영상 촬영 안 합니까? 지난번 산 그림은 무척 좋았거든요…….”
“그럼, 이번에도 무열이가 촬영할래?”
최무열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잽싸게 꺼내고 말했다.
“네, 맡겨만 주세요!”
잠시 캔버스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한 오한결이 서서히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척 깔끔하고 정돈된 선이 그어지자, 어떤 인물이 캔버스 위에 나타났다.
“어린 시절 파블로 피카소. 그의 얼굴을 알아보시겠어요?”
모두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무척 우울하고 자신감도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미술 도구를 쥔 그의 손은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듯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어린 피카소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했죠. 안타깝게도 또래 친구들보다 학습능력이 뒤처졌다고 알려졌어요. 하지만 그림 실력만큼은 뛰어났기에 자연스레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오한결은 방금 그린 그림을 치운 후 새로운 캔버스를 이젤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는 오한결.
금새 청년 피카소가 좁은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19세 때 피카소는 파리를 방문하죠. 몽마르트 중심으로 활동하는 보헤미안 무리들과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를 만나게 됩니다. 또한 같은 시대 활동했던 고흐와 고갱의 영향도 받게 되죠.”
오한결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청년 피카소의 삶은 비참했어요.”
새로운 캔버스를 꺼낸 오한결.
어두운 다락방 배경으로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스러워하는 피카소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죠. 그는 버텨야 했어요.”
오한결은 고통으로 울부짖는 민중들의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했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비참했어요. 성병과 질병 그리고 가난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옥 같은 삶을 살았죠. 피카소는 그들의 생활상을 그려냈어요.”
오한결이 청색 연필을 들고 그림에 푸르스름한 색을 덧댔다.
“‘청색시대’라고 하죠. 그 당시 피카소 그림이 청색을 띠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에요. 청색으로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냈어요.”
오한결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피카소의 얼굴을 그렸다.
“피카소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돼요. 그의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자살했거든요. 1903년 <인생> 작품을 보면 피카소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죠.”
오한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바꿔볼까요?”
쾌적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의 모습이 그려진다.
“20세 때 첫 전시에 성공하면서 피카소의 경제적 상황은 점차 나아지게 되죠.”
오한결이 붉은색 연필을 쥐고 히죽 웃으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청년 피카소가 여인의 손을 잡고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1904년 피카소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의 그림은 청색에서 장밋빛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를 ‘장밋빛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피카소에게 찬사를 보내는 장면을 그리는 오한결.
“1905년. 드디어 피카소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됩니다.”
오한결은 발가벗은 다섯 명의 여인의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해 나갔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들의 얼굴과 몸이 뒤틀리고 조각나 보였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입니다. 이 그림은 그 유명한 입체주의 미술의 시작을 알립니다. 1909년 분석적 입체파를 거쳐 1912년 종합적 입체파까지. 피카소는 이렇게 20세기 회화의 거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오한결이 연필을 내려놓고 설명이 끝났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을 깨고 최무열이 입을 열었다.
“피카소가 아니라, 오한결 형님 그림 실력에 더 놀랐어요.”
다들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하늘이 서정익 작가에게 물었다.
“작가님 어떻게 보셨어요? 오한결 작가님 되게 신기하신 분이죠?”
서정익 작가가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죠. 너무 놀라워요.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
자존심 강한 서정익 작가가 오한결의 실력을 인정하자, 노을과 최무열은 오히려 본인들이 더 기쁜 표정을 지었다.
‘훗, 서정익 작가 코가 납작해졌겠는걸.’
오한결이 최무열에게 말했다.
“개념을 잡아 줬으니, 주요 작품 공부는 혼자서 해봐. 전시장 가서 확인해 볼 거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최무열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대해 주세요!”
* * *
명일 문화재단 회의실.
신수진 이사장이 물었다.
“어제 알랭 작가가 제게 전화를 했어요. 지금 한국에 와 있는데, 시간이 되면 문화재단에 방문하겠다고 하네요.”
이나영 팀장이 놀라서 물었다.
“프랑스 작가 알랭 말씀이세요? 어머! 되게 유명한 작가잖아요. 지난번 그랜드 마스터클래스에 해외 연사로 섭외하려고 했던 분이에요. 바쁘신지 연락조차 안 돼서 접근도 못했던 기억이 있네요.”
신수진 이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요? 나한테 말했으면 내가 연락해봤을 텐데요.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알랭과 친구였거든요. 그 친구가 전화를 잘 안 받긴 해요. 특히 작품 들어가면 철저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더라고요.”
이나영 팀장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 최종 후보가 아니어서. 제가 보고를 안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다그치려는 게 아니라 아쉬워서 한 말입니다.”
최하늘이 말했다.
“이사장님, 알랭 작가에게 오한결 작가님을 소개해주면 어떨까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을 했었어요. 정말 좋은 기회 아닙니까? 다음 달에 오한결 작가님이 프랑스로 가는 해외 일정이 있잖아요. 그 전에 알랭 같은 인지도 높은 작가와 친분을 쌓는다면 오한결 작가로서도 훨씬 이득이 될 겁니다.”
이나영 팀장이 끼어들었다.
“알랭 작가가 서울 투어할 때 오한결 작가님도 함께하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최하늘 씨, 오한결 작가님께 가능한지 여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 * *
아뜰리에 앞 공원 입구에서 최하늘이 서성이고 있다.
프랑스 작가 알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한결에게 연락했더니 다짜고짜 공원 산책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최하늘 씨!”
오한결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공원 입구로 들어선 두 사람은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머리 식히러 나온 몇몇 직장인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최하늘이 물었다.
“산책 자주 하세요?”
“네. 혼자 있는 시간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머릿속 가득 찬 지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거든요.”
“와, 그 말 멋지네요. 머릿속 가득 찬 지식이라니.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그림도 잘 그리고 머리도 똑똑해질 수 있어요? 아…… 괜한 질문을 했네요. 그건 역시 타고 나야겠죠.”
회귀 전 부족했던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자 오한결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노력 플러스 기적이죠. 저도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거든요.”
최하늘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네. 맞아요. 노력은 기적을 만들죠.”
오한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프랑스에서 알랭 작가가 왔다고요?”
“네. 알고 보니까, 신수진 이사장님 친구분이더라고요. 워낙 유명해서 저희도 행사 때마다 해외 연사로 모시고 싶은 분인데 항상 바빠서 한 번도 못 만났어요. 다행히 알랭 작가가 휴가차 한국에 들렀다고 하네요. 근데, 알랭 작가를 개인적으로 아세요?”
“친분은 없었습니다.”
최하늘이 잠시 머뭇거렸다.
“미리 알려드릴게요. 오한결 작가님 개인전 끝나면 바로 프랑스 일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사장님도 프랑스 가기 전에 알랭 작가랑 친분을 쌓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프랑스 생활이 좀 수월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군요. 프랑스라……. 아주 좋습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문화재단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가게 되네요.”
“프랑스에 아직 안 가보셨어요?”
“네. 아직이요.”
“아, 그렇군요. 프랑스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몽마르트 언덕이요.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터전이자, 지금도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이는 그곳에 가보고 싶어요. 삼각지 거리를 프랑스의 몽마르트처럼 만들 예정이거든요. 직접 보고 오는 게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요.”
“삼각지 거리요?”
“네, 나중에 소개해드릴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어머, 꼭 소개해 주세요. 너무 궁금해요.”
잠시 대화가 끊긴 두 사람은 말없이 공원을 걸었다. 작은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최하늘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디까지나 제안이니까, 내키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오한결이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을 거 같은데요. 프랑스 사람의 서울 방문이라. 한국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려 줘야겠군요.”
최하늘이 환하게 웃었다.
“분명 알랭 작가도 오한결 작가님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