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54화 (54/202)

제54화 인터뷰

명일 문화재단 사무실.

서류 작업 중인 최하늘이 힐끔힐끔 창밖을 바라봤다. 길 건너 아뜰리에 건물에 며칠째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분명 오한결 작가가 본격적으로 개인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한 손에 커피를 든 이나영 팀장이 은근슬쩍 최하늘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한 번 가보는 건 어때?”

최하늘이 시치미를 뚝 떼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게 할 일이 많아서요. 다음 주에 내부 감사도 있잖아요.”

이나영 팀장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사장님이 그 말 들으면 싫어할 거 같은데? 오한결 작가가 뭘 하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라고 했잖아. 매니저로서.”

“그래도……. 지난번 기획전시 결산 보고서 작성하고 사업비 영수증도 정리해야 해요. 팀장님께서 내일까지 보고하라고 하셨잖아요.”

이나영 팀장이 영수증 묶음을 만지작거렸다.

“보고서는 안 되고, 영수증 정도는 내가 처리해줄게. 오랜만에 실력발휘 좀 해보지 뭐. 자기는 언능 오한결 작가님께 가봐. 그러다가 기린 되겠어. 오호호호.”

최하늘은 못 이기는 척 영수증 더미를 이나영 팀장에게 전달하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급히 나갔다.

후배의 청춘사업에 한몫했다고 생각한 이나영 팀장은 뿌듯한 마음으로 서류철을 넘겨봤다. 잠시 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오지랖이 참 문제야. 이걸 언제 다한담…….”

* * *

아뜰리에 1층 카페에서 최하늘이 케익과 커피를 사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때마침 서정익 작가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하늘이 무표정한 서정익 작가를 향해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네.”

“커피 사러 오셨나 봐요?”

“……네.”

“음…… 제가 한 잔 사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얼음처럼 차가워진 분위기에 최하늘은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지금 오한결 작가님 작업실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

“……제가 왜요?”

최하늘은 당장 서정익 작가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두 분이 협업한다고 들었거든요.”

“때 되면 알아서 부르겠죠. 그럼 전 이만.”

“…….”

최하늘이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을이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최하늘을 맞이했다.

“언니, 커피 너무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케익과 커피를 건네준 최하늘이 작업실을 유심히 둘러봤다.

우선 10개가 넘는 이젤이 눈에 띄었다. 그 위에 검은색 캔버스를 깔아놓고 별 모양의 그림을 세밀하고 그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캔버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오한결이 보였다. 거대한 검은 밑그림 위에 구름 같은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문제는 코를 찌르는 눅눅한 물감 냄새와 탁한 공기였다.

최하늘은 급히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여긴 깨끗한 공기가 필요해 보이네요. 다들 작업에 몰두하셔서 못 느끼시는 것 같지만.”

최무열이 커피 컵에 꽂힌 빨대를 쭉 빨았다.

“어쩐지, 두통이 계속 있더라. 너무 집중했나 봐요. 아무도 환기할 생각을 못 했네.”

노을이 말했다.

“난 이게 꿈만 같아. 그림에 온정신을 집중하고 몇 날 며칠을 밤을 지새우다니. 진짜 이런 작업 스타일를 꿈꿨는데. 예술가가 된 느낌이야.”

최무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과제 때문에 이런 생활에 익숙해. 밤새워서 작업 후 교수한테 까이고. 또 밤새고 까이고. 무한 반복이지.”

어느새 이젤 앞에 다가선 최하늘이 허리 숙여 그림을 살펴봤다.

“와, 이걸 하나하나 그린 거야?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업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최무열은 허리가 뻐근한지 한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스캔해서 컴퓨터 이미지로 전환한다고 들었어요. 전시장 가득 반짝이는 모든 별은 우리의 손을 거쳐 완성된 작은 세상이라고 하던데요. 물론 제 말이 아니라 오한결 작가님 말씀이. 하하.”

최하늘은 말없이 구석에 서 있는 오한결을 바라봤다. 주변 대화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멍하니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빛이었다.

잠시 뒤, 생기를 되찾은 오한결이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붓끝에서 하얀 연기 같은 구름이 피어올라 거대한 캔버스를 휘감고 있었다. 제사장이 신께 기도하듯 고요하고 성스러운 느낌이 그림에서 느껴졌다.

“무엇을 그리시는 거지?”

“모르겠어요. 저희에게 별 그림을 맡기시고, 며칠째 저렇게 구름 같은 걸 그리고 있어요. 그리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해요. 마치 춤을 추듯 열정적으로 그리다가도 오랫동안 멈춰서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요.”

“엄청난 집중력인 거 같아요. 오한결 작가님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어떤 현상을 캔버스 위에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아요. 알아요.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작가님과 며칠 있다 보면 현실성 있는 말이 안 나온다니까요.”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최무열이 작업실 문을 열어줬다.

방금 머리를 감았는지 촉촉한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로 서정익 작가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서정익 작가님?”

서정익 작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한결의 그림에 꽂혀 있었다.

“서정익 작가님?”

서정익 작가는 최무열, 노을, 최하늘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한결을 향해 걸어갔다.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선 서정익 작가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성간운을 직접 그리시는군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린 오한결이 대답했다.

“제 개인전 아닙니까. 제가 직접 그려야죠. 서정익 작가는 오직 기술적인 문제만 도와주세요. 모든 그림은 제가 직접 그릴 겁니다.”

서정익 작가가 격한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오직 그래픽 작업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그리다니요.”

노을이 끼어들었다.

“저기……. 우리도 궁금한데, 오한결 작가님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성간운. 우주의 구름이라고 하지. 서정익 작가님이 아이디어를 주셨어. 원래는 별만 그리려고 했는데, 미디어아트 작업을 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집어넣고 싶었거든. 그래서 우주의 기체와 먼지로 구성된 성간운을 그리는 거야. 그것은 별의 탄생 또는 죽음과 연관되거든. 별의 존재 자체도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거지.”

“우와, 심오한 뜻이 좀 어렵긴 한데……. 어쨌든 대단해요.”

서정익 작가가 말했다.

“오한결 작가! 당신의 정체가 뭡니까?”

갑자기 서정익 작가가 소리치자, 찬물을 끼얹은 듯 작업실에 냉기가 돌았다.

서정익 작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마도, 당신은 천재 같아요.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오한결이 환하게 웃으며 붓을 건네줬다.

“마무리를 같이 할래요? 서정익 작가님?”

* * *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가 명일그룹 회장 저택 앞에서 서성거렸다.

아리미술관의 새로운 미술관장으로 이현미 명일그룹 회장 아내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박수호 기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 아내로 알려졌지만, 예술로 유명한 K대학에서 국내 최초 여성 미대 학과장을 지낸 인물 아닌가.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홀로 영국으로 건너가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누군가가 박수호 기자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이현미가 강아지와 함께 서 있었다.

“박수호 기자님. 오랜만이네요.”

이현미 관장이 악수를 청하자, 박수호 기자가 허리 숙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다시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이현미가 쭈그려 앉고는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집에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응접실 소파에 앉은 박수호 기자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무척 소박하게 꾸민 것 같지만 작은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장인들이 만든 명품인 것 같았다. 절제된 미를 통해 최고의 미적 안목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걸까. 그렇다면 완전히 성공한 것 같았다.

잠시 뒤, 붉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이현미가 나타났다.

박수호 기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장님.”

“어이구, 앉으세요.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모던아트는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 잡지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인터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박수호 기자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질문지와 수첩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차를 한 모금 마신 이현미가 무척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이현미 관장님은 꽤 화려한 커리어를 갖고 계십니다. 미술학 박사 학위에, 미술관 운영 현장 경험까지. 미술 정책, 행정 등 이론과 실무를 두루 갖춘 인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능력 있는 미술관장이 새롭게 보여줄 미래가 무척 기대됩니다. 아리 미술관 운영 계획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선 미술관의 개념과 역할을 명확하게 하고 싶어요. 아시다 시피, 미술관은 개인의 정신을 고양하고 미술을 통해 삶을 풍성하게 하는 공간이잖아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술이 발전해 디지털 미디어로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굳이 미술관에 오지 않아도 세상에 즐길 게 많은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기자님은 직업상 미술관을 자주 찾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어떤가요? 어디 미술관에 어떤 전시를 보고 왔다고 얘기하는 게 확연히 줄지 않았나요?”

박수호 기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즐길 게 많은 시대라……. 하루만 지나도 새로운 놀이 문화와 유행이 생겨나는 지금, 미술관의 고유한 역할이란 게 아직도 유효할까? 미술관에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미술관을 간다는 건……. 뭐랄까, 일부러 시간을 낸 특별한 하루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그만큼 접근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겠죠?”

“글쎄요, 원래 미술관을 간다는 건 특별한 하루이긴 했어요. 그 특별함조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차별화를 시도할까 합니다.”

“차별화요? 정확히 어떻게요?”

“아리 미술관은 영상 예술에 많은 투자를 하려고 합니다. 4차 산업 시대에 걸맞은 예술 문법은 바로 디지털 아트입니다. 미술의 표현 문법이 완전히 바뀌고 있어요. 아니, 이미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전통성이 강한 미술관은 그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어요. 그건 미래에 미술관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미술관도 4차 산업을 피해갈 수 없나 보군요. 그래도 아직은 좀 생소하군요. 저도 그만큼 보수적이라는 얘기겠죠. 그럼 디지털 예술을 주력으로 미술관을 운영하실 예정이십니까?”

“물론 그것만 하면 섭섭하겠죠.”

이현미가 살짝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아리 미술관은 교육과 체험 중심의 미술관이 될 것입니다. 서울 시민 누구나 예술 교육 기회를 누릴 것이며 다양한 행사를 통해 체험 활동도 늘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전시, 행정, 아카이브, 교육, 마케팅까지 모든 행정 시스템을 디지털화 할 예정입니다.”

박수호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변화의 바람이 일겠군요. 기대됩니다.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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