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선유도 공원
한강 선유도 공원에 도착한 오한결과 박선희.
파란 하늘 위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올랐고 공원을 덮은 푸른 잔디는 마음을 편안케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이었다.
선유도는 2000년까지만 해도 서울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이었다. 그 사명을 다한 지금은 싱그러운 식물로 가득한 아름다운 생태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어머니와 산책을 나오니 좋네.’
오한결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강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한 박선희는 한강이 주는 자연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이렇게 단둘이 외출한 적이 있었던가.
너무나 죄송하게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구나.’
울컥한 마음이 들자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머, 예뻐라. 저게 선유도로 이어지는 다리구나.”
사전 조사를 마친 오한결이 막힘없이 설명했다.
“저 교량은 선유교도인데, 일명 ‘무지개다리’라고 불러요. 저녁에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형형색색 조명으로 다리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요.”
“그래? 나중에 꼭 저녁에 와봐야겠구나. 좋은 팁이네. 땡큐, 아들!”
어머니가 히죽 웃고는 다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교량 위에서 본 한강은 몹시 평화로워 보였다.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한강과 저 멀리 꿈쩍 않고 서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이 묘하게 어울려 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두 사람은 다리를 건너 선유도 전망대를 향했다.
선유도 공원 입구에 위치한 전망대에 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느릿하게 흐르는 한강을 진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한결도 어머니와 함께 전망 좋은 곳을 찾아 탁 트인 전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한강 표면이 출렁이자 햇빛이 자잘하게 쪼개지며 반짝거렸다.
어머니가 말했다.
“참 예쁘구나. 오늘 한결이 덕분에 호강하는걸.”
“자주 나와요. 이제 삶이 좀 여유로워졌거든요.”
수상 스키를 탄 남자가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가자, 어머니가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푸른 잔디로 뒤덮인 공원에는 사람들이 편히 보행할 수 있도록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었다. 양옆으로 시원스레 뻗은 거대한 나무들이 바람결에 가지와 나뭇잎을 부지런히 흔들어 댔다.
사사삭, 사사삭.
나무와 바람이 만든 절묘한 하모니는 두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 나타났다. 연극하는 동생이 이것을 봤으면 분명 좋아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만약 동생이 배우로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면 오한결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동생을 밀어줄 생각도 있었다.
동생이 자신의 열망과 열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길 바랐다. 이번에 노진홍 학생에게 배우는 발레가 그의 연기 열정을 더 불 지폈으면 했다.
조금 더 걸으니, 시간의 정원이 보였다. 오한결은 독특한 외형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옛 정수장 터라고 했던가. 침전지 2곳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곳이 한때 수원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낡고 칙칙한 색깔의 구조물의 거친 표면이 그대로 노출된 점이 무척 인상 깊었고 그 위에 각종 식물을 절묘하게 설치하여, 이름 그대로 ‘시간’을 주제로 만든 조형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한결과 박선희는 이제 지쳤는지 자연스레 앉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박선희가 선유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구나. 어쩌지 돗자리를 안 갖고 왔는데…….”
오한결이 피식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제가 다 준비했죠. 한강 공원에 돗자리는 기본입니다.”
“이야, 아들 멋지다!”
푸른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앉으니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을 시원하게 감싸 안았다. 박선희가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를 응시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네.”
오한결도 어머니처럼 무릎을 굽히고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저 멀리 돗자리 위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한 가족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남들처럼 여유롭게 살아요. 어머니.”
박선희가 중얼거렸다.
“남들처럼.”
“네. 남들처럼요.”
* * *
연내대학교 본관 지하 연습실.
연극동아리 ‘놀자’의 단원 다섯 명이 앉아 있다. 몇몇은 아직 수업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오한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모두 운이 좋은 줄 알아. 국립예술교육원에서 발레 전공한 학생이 오늘 이곳에 온다니까! 알지? 거기 천재들만 다니는 거?”
삐쩍 마른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왜 우리가 발레를 배워야 하지?”
오한수가 그 학생을 사정없이 노려봤다.
“야! 연기자에게 액션이 얼마나 중요한데. 몸동작 하나하나가 연기의 기본이라고. 무용만큼 훌륭한 연습도 없어. 유명한 배우들도 따로 시간 내서 발레를 배운다고 하잖아. 넌 그것도 모르냐!”
뚱뚱한 학생이 거들었다.
“한수 말이 맞아. 솔직히 나도 개인적으로 발레를 배운 적이 있어. 너희들이 자꾸 몸치라고 하기에…….”
파란 머리 학생이 말했다.
“근데, 쫄쫄이 입으라고 하면 어쩌지. 헉! 열라 민망할 텐데.”
오한수가 중얼거렸다.
“왜 자신 없어?”
똑. 똑. 똑.
노진홍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와 학생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한수가 매우 친한 척 하며 가볍게 악수를 청했다.
“마이 베스트 프렌드. 어서 와. 아니지 여기선 선생님이라고 불러야겠지.”
단원들이 ‘베스트 프렌드’라는 말에 웅성대자, 노진홍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 베스트 프렌드. 근데, 진홍이라고 이름을 불러줘. 그게 편해.”
안경 낀 여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무용을 해서 그런지, 몸이 탄탄해 보인다. 여기 학생들하고 비교되네. 술 돼지들. 운동 좀 하지.”
몇몇 학생들의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자 여학생은 새초롬하게 입을 다물었다.
노진홍이 일렬로 앉아 있는 단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발레를 전공하고 있는 노진홍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 발레를 배우고 있는 입장이고, 누구를 가르쳐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이 긴장하고 있는데요. 음……. 제 무용 강의가 여러분의 연기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연설이 끝나자 모두 환영을 박수를 보냈다.
삐쩍 마른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어디까지 배워요? 프로 수준은 아니더라도 공연할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요?”
노진홍이 당황했다.
“공연이요? 아…… 발레 공연이요?”
“적어도 발레 뮤지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까지 목표를 정해야 우리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단원들이 동의한다는 의미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뮤지컬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각자 자신만의 공상에 빠져들었다.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춰 멋지게 노래하고 춤추는 자신들의 모습을.
그래! 이왕 배우는 거 공연까지 해야지!
노진홍은 단원들의 간절한 눈빛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랬구나. 이들은 진심으로 발레 뮤지컬에 도전해보고 싶은 거구나.
“발레 뮤지컬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대신 잘 따라와 주셔야 합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몇몇 학생들은 한쪽 다리를 번쩍 들고 어설픈 발레 동작을 취했고 어떤 학생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힘껏 찢었다. 그 모습을 본 노진홍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오한수가 말했다.
“진홍아, 오늘은 어떤 동작 알려줄 거야?”
“첫날부터?”
“응. 엄청 기대되는데.”
잠시 고민하던 노진홍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발레에 대한 기본 지식하고 간단한 발동작 알려줄게.”
오한수가 단원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주목. 이제 수업 시작할 거야. 빨리 제자리에 앉아.”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돈되자, 노진홍이 떨리는 마음으로 첫 강의를 시작했다.
“전문 무용수의 발레와 아마추어 발레는 동작 면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발레 원리와 미학은 동일하거든요. 대신 능숙함이 다른 것뿐입니다.”
노진홍이 다리와 허리, 어깨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발레는 바른 자세와 품위를 갖게 해주고 무엇보다 자존감을 상승시킵니다. 꾸준한 반복 훈련을 거치기 때문에 단련된 근력과 지구력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몸 선을 만들 수 있어요.”
단원들은 노진홍의 조각상 같은 몸을 보며 의지를 불태웠고 오한수는 자신의 알통을 만져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노진홍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발레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자신의 몸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게 좋은 건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감과 균형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그건 부단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요.”
“연습은 얼마나 해야 해요?”
“매일이요. 프로 무용수도 매일 연습을 합니다.”
노진홍은 불타오르던 학생들의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쉽지 않죠. 근데 발레만 연습을 많이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연기도 마찬가지죠. 매일 꾸준히 연습하는 사람만이 프로가 되는 건 다르지 않아요.”
단원들은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작이 많나요? 무대 위에서 틀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글쎄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군요. 저는 한 번도 무대 위에서 동작이 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완벽해질 때까지 연습 또 연습을 했죠. 제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은 동작을 하는 ‘척’하는 겁니다. 그건 관객을 기만하는 행위이자 무용수로서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요령부터 생각하지 마세요.”
단원들은 예술을 대하는 노진홍의 프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좋은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대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악을 많이 들으세요. 리듬을 익히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노진홍이 두 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말했다.
“다리의 움직임이 중요한데, 이렇게 다리를 완전히 바깥으로 향하게 해야 해요. 이게 기초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발등에 긴장이 풀리지 않도록 해주시고요. 자! 다들 일어나 볼까요? 간단한 동작을 같이 해볼게요.”
단원들이 분주하게 일어서고는 노진홍을 바라봤다.
노진홍이 다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이렇게 뒤꿈치를 붙이고 다리를 일직선으로 만들어 보세요.”
여기저기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노진홍은 다음 동작을 바로 이어서 했다.
“다음은 반 발 정도 교차시켜 발을 붙여볼게요. 다음은 발을 교차하되, 붙이지 않을게요. 마지막으로 발을 완전히 교차해 보세요.”
몇몇은 잘 따라 했지만, 대부분 단원들은 간단한 발동작도 힘들어 했다.
노진홍이 단원들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간단한 발동작만 보여드렸습니다. 집에서 연습하셔야 해요. 몸이 동작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원하는 공연을 멋지게 해낼 수 있어요. 연습을 통해 몸을 만드셔야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원들은 노진홍의 열정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노진홍의 눈시울이 울컥 붉어졌다.
‘뭐지,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나도 저렇게 발레에 호기심과 열정을 보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초심을 찾을 수만 있다면…….’
노진홍은 단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탄 노진홍은 택시 기사에게 국립예술교육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오늘은 나도 열정적으로 발레 연습을 해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