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구 드로잉
깔끔하고 사무적인 느낌이 강조된 ‘피카소 미술학원’ 원장실.
차가운 인상의 나미주 원장과 이풀잎이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었다. 나미주 원장이 긴장 가득한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정말로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이 오늘 온다고…….”
“네……. 어쩌다 보니…….”
나미주 원장은 두려우면서도 내심 감탄하며 이풀잎을 쳐다봤다.
‘세상에, 풀잎이가 재벌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혹시 상속녀? 어머! 어쩐지 귀티가 잘잘 흐른다고 했어. 이게 웬일이야! 복덩이가 굴러왔네. 신분을 숨기고 서민 체험을 하는 건가? 어머나……. 지금까지 풀잎에게 잘해 준 나를…… 칭찬해!’
나미주 원장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이었다.
“근데, 신태진 회장님과 어떤 사이야?”
“아…….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이에요. 말하자면 복잡해요…….”
“어머!!!”
나미주 원장은 자신의 ‘가정’이 ‘사실’로 바뀌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원장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한 물 한 잔을 이풀잎에게 가져다주었다.
“목마를 것 같아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이미 알고 있으니까.”
“……네.”
띠링.
이풀잎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양승호 비서입니다. 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오셨대요. 가시죠, 원장님.”
나미주 원장은 재빨리 학원 입구로 달려가 신태진 회장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피카소 미술학원 원장 나미주입니다.”
“오호라, 반갑습니다. 저는 신태진입니다. 이쪽은 비서 양승호 씨고요.”
키 크고 말끔하게 생긴 양승호 비서를 힐끔 쳐다본 뒤 나미주 원장이 말을 이었다.
“이풀잎 선생님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미술학원을 찾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회장님을 위해 개인 화실을 꾸며 봤습니다. 거기서 편히 그림을 그리실 수 있을 겁니다.”
신태진 회장이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미술학원에 온 이유는 학생들하고 같이 배워 볼까 해서입니다. 여기 기초반도 있지요?”
당황한 나미주 원장을 대신해 이풀잎이 대답했다.
“지난주에 개설한 반이 있긴 합니다만…….”
이 상황이 재밌는 이풀잎은 우연히 양승호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이풀잎이 눈웃음을 보내자, 양승호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변했다.
‘소묘 기초반’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두 명의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어른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그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풀잎이 학생들을 소개했다.
“여기는 이소진, 그 옆은 강미미 학생이에요. 미술학원 수강한 지 일주일도 안 된 병아리들이랍니다. 얘들아, 오늘부터 그림 같이 배우실 분들이야. 인사드리렴.”
두 아이가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신태진 회장이 답했다.
“어이구, 반가워요. 나도 그림을 배우려고 왔는데, 우리 학생들한테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할아버지가 좀 서툴러도 이해해 주세요.”
강미미가 신기한 듯 쳐다봤다.
“우와, 할아버지 되게 멋져요.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미술학원 간다고 하면 항상 태권도 학원 가냐고 묻던데……. 어떻게 매일 까먹을 수 있죠?”
“……고맙구나. 뭐, 같은 학원이니까……. 헷갈릴 수 있겠지.”
“그런가…….”
이소진이 물었다.
“할아버지 그림 잘 그려요?”
“그림 보는 건 오랫동안 해 봤는데, 실제 그림은 거의 안 그렸단다. 더 늦기 전에 이렇게 배우려고 왔어요. 여기 잘생긴 삼촌도 같이 배울 거니까. 서로 인사 나누도록 해요.”
양승호가 쑥스러운지 쭈뼛거리자, 그 모습을 본 두 학생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기회를 엿보던 나미주 원장이 급하게 치고 들어왔다.
“회장님, 우리 아이들 너무 예쁘죠? 제 눈엔 천사로 보인답니다. 아직 연필도 제대로 쥘 줄 모르지만, 나중에 얼마나 멋진 그림을 그리겠어요. 물론 회장님도 위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저희 학원이 돕겠습니다. 이풀잎 선생님! 최선을 다해 줘!……요. 알겠죠?”
이풀잎이 방긋 웃었다.
“당연하죠. 자, 그럼 수업 시작할게요.”
강의실 중간에 1.5 미터 높이의 사각 받침대 위에 동그란 ‘구’ 모양의 석고상이 놓여 있었다. 이풀잎의 지도에 따라 신태진 회장과 양승호 비서 그리고 그 옆으로 이소진, 강미미가 석고상 주변으로 이젤을 갖고 모여들었다.
이풀잎이 짤막한 막대기를 손에 쥐고 원형 석고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구 드로잉’을 해볼 거예요. 한마디로 공을 그리는 거죠. 모두 처음 그려보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표현해 보세요.”
이풀잎의 막대기가 석고상 꼭대기를 향했다.
“바로 여기! 지금 천장에서 빛이 떨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아래로 그늘이 지고 있고요. 석고 소묘는 빛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입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학생들의 멍한 표정을 본 이풀잎이 말을 이었다.
“다들 감이 안 잡히죠. 그림은 직접 그려 봐야 알 수 있어요.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이소진과 강미미는 자신 있게 원 모양을 그려 나갔다. 아직 서툴러서 그런지, 이소진은 타원형 원으로 화면 가득 채웠고 강미미는 여러 선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지저분하고 볼품없는 원을 그리고 말았다.
양승호 비서는 곁눈질로 두 학생의 그림을 훔쳐다가 이풀잎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두 눈이 풀린 채 흰색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신태진 회장은 연필을 쥐고 천천히 원을 그려 나갔다. 아주 천천히 정성을 다해 조금씩 그려 나갔지만 원은 점점 찌그러져 갔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연필에 힘을 주자, 짙은 선이 더욱 그림을 망치고 말았다.
신태진 회장의 그림을 본 이풀잎이 말했다.
“회장님,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선 손에 힘을 빼고 그려 보세요.”
“이런, 내가 힘을 너무 줬군요. 하하. 쉽지 않아요.”
“회장님, 연필하고 지우개를 제게 주시겠어요?”
이풀잎은 신태진 회장의 그림 일부를 지우개로 지우고 직접 원 형태를 정성껏 다듬어 주었다. 신태진 회장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선생님 손이 닿으니 그림이 살아나네요. 전문가는 달라요.”
“조금 손 봤을 뿐이에요. 형태를 더 잡아 보세요. 그래도 처음치고는 아주 잘하신 겁니다.”
숨 막힐 듯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연필심이 캔버스의 거친 표면을 긁는 소리만이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원형 석고 소묘를 완성해 가는데, 오직 양승호 비서만이 시작을 못 하고 있었다.
이풀잎이 양승호 비서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비서님? 왜 안 그리고 있어요?”
양승호 비서가 침을 꿀꺽 삼기며 말했다.
“도저히 잘 그릴 자신이 없네요.”
“에이, 오늘은 망쳐도 좋아요. 아니, 망치면 더 좋아요. 일단 마음껏 그려 보세요.”
양승호 비서가 연필을 잡고 머뭇거리자 이풀잎이 말했다.
“제가 형태를 잡아 드릴 테니까. 오늘은 명암만 넣는 거로 할게요.”
양승호 비서가 일어나자 그 자리에 이풀잎이 앉았다. 그녀는 캔버스 중앙에 적당한 크기의 원을 그려 넣고 그림 하단에 굵은 선으로 그림자 형태까지 잡아 주었다.
양승호 비서는 우두커니 서서 이풀잎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반짝이는 눈과 오뚝한 콧날, 오늘따라 유난히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풀잎이 말했다.
“양 비서님, 제가 그림을 완성해 볼까요?”
양승호 비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풀잎이 모두에게 말했다.
“자, 다들 여기 모여 주세요. 제가 그리는 걸 보여 드릴게요.”
모두 그림을 중단하고 이풀잎 근처로 모여들었다. 이풀잎이 원 형태에 굵은 선으로 명함을 넣기 시작하자, 그림이 입체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풀잎은 연필의 기울기를 달리하며 명함의 농도를 조절했다. 그림자가 짙게 깔린 부분에는 아주 거칠고 과감한 연필 선이 이어졌다.
“그림 하단의 어두운 부분보다 그림자 경계를 짙게 칠하면 반사광이 만들어져요. 반사광은 지우개로 색을 빼는 게 아니라 색을 더 짙게 만들어서 상대적으로 색이 옅어 보이는 효과를 내는 겁니다. 보셨다시피 저는 지우개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어요. 선이 하나하나 쌓여 그림이 완성되는 거니까, 처음부터 너무 거친 선을 사용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선을 쌓아 가면서 수정이 가능합니다.”
신태진 회장은 이풀잎의 설명을 들으면서 옛날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미술 선생님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세월이 지나, 희미해진 기억이 이풀잎의 설명으로 인해 선명하게 바뀌고 있었다.
신태진 회장이 이풀잎을 불렀다.
“선생님, 우리 두 학생을 위해 제가 정리를 해 볼까요?”
“어머! 그래 주시겠어요?”
“선생님 그림을 보니까, 이렇군요. 빛을 읽어라. 밝음, 어둠, 반사광, 그림자를 그린다. 긴 선으로 시원시원하게 긋고 나중에는 짧은 선으로 형태와 명함을 잡아간다. 연필 선이 계속 쌓인다는 느낌으로 그려 나간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양승호 비서를 제외하고 이풀잎, 이소진, 강미미는 신태진 회장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신태진 회장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 * *
멋진 서울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N호텔 레스토랑.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을 시켜 오한결을 초대한 식사 자리였다.
오한결은 한껏 기대하며 두툼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고 신수진 이사장은 오한결의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와인을 들이켰다. 반면 최하늘은 자리가 불편한지 스테이크를 의무적으로 씹고 있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오한결에게 말했다.
“어때요? 입맛에 맞나요?”
“아주 맛있습니다. 이렇게 멋진 곳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진작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최하늘 씨가 많은 도움이 됐나요? 오한결 작가님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라고 했거든요. 작가님은 곧 세계 무대로 나가실 분이잖아요.”
오한결은 최하늘의 경직된 모습에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최하늘 씨 덕분에 아리 미술관 개인전도 잘 준비 중에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최하늘 씨가 서정익 작가를 추천해 줬거든요.”
신수진 이사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와우, 오한결과 서정익이라.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서정익 작가는 성격 자체가 까다로워 다른 작가와 협업을 안 하는 거로 유명하거든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비결 좀 알려 주세요. 작가님.”
오한결이 웃었다.
“바로 이거죠.”
휴대폰을 보여 주자, 오한결이 그림을 그리는 동영상이 보였다. 신수진 이사장의 얼굴에 놀라움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와우, 굉장하군요. 그러니까, 서정익 작가가 이걸 보고 함께 작품을 해 보고 싶어 했던 거군요? 역시 작가는 실력으로 말하는 법이죠. 오한결 작가님은 딱 그걸 실현하셨고요.”
오한결이 커다란 스테이크 조각을 와작 씹어 삼켰다.
“그동안 그림 그리는 제 모습이 타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효과가 이렇게 크다는 사실을 알고 결심을 했죠. 방송에 출연해 보려고요.”
신수진 이사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EBC 말이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문화재단 일정에 방해되지 않을 겁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작가님 의지에 달린 일이니까요. 저는 작가님 결정을 존중합니다. 대신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을 슬쩍 쳐다봤다.
“최하늘 씨가 오한결 작가님 매니저 역할을 하게 해 주시겠어요? 최하늘 씨는 예술계 전반에 발이 아주 넓은 유능한 직원입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오한결은 피식 웃었다. ‘매니저’라는 말이 이사장한테서 나온 말이구나.
“당연하죠. 이미 제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신수진 이사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전화네요. 잠시만…….”
신수진 이사장은 입을 가리고 통화했지만 대화 내용이 어렴풋이 들렸다. 강아지 목욕용품 구입과 예방 접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복실이가 많이 사랑받고 있군요.”
신수진 이사장이 몹시 놀랐다.
“복실이를 아나요? 아니……. 작가님이 우리 집 강아지를 어떻게 알아요?”
“제가 선물로 줬으니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입양을 도운 거지만.”
오한결은 그간의 일을 모두 설명했다. 신태진 회장과의 만남과 전국 유기견 보호 센터의 사정 그리고 명일그룹의 후원까지.
신수진 이사장이 와인을 벌컥 들이켜고 말했다.
“작가님은 꽤 괜찮은 사람이군요. 예술가로서도 그렇고,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고.”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에게 물었다.
“하늘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오한결 이야기에 감동한 최하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주 멋진 분이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