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유리 궁전
운전대를 잡은 최하늘은 능숙한 운전 솜씨를 뽐내며 거침없이 도로를 질주했다. 불안함을 느낀 오한결은 천천히 가자고 말했지만, 최하늘은 익숙한 길이라 눈 감고도 갈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뒷좌석에 앉은 노을과 최무열은 벌벌벌 떨면서도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완전 반전 매력의 소유자 최하늘!
오한결이 최하늘에게 물었다.
“한국예술교육원에 가는 것을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노을이 연락 줬어요. 작가님 혹시 제가 불편하시면…….”
끼이익.
급브레이크를 밟은 최하늘이 매서운 눈초리로 앞차를 노려보더니 거침없이 추월 후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부우웅!
오한결이 차량 손잡이를 꽉 잡고 말했다.
“최하늘 씨가 같이 가면 좋죠. 죄송해요.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붉은색 정지 신호가 보이자 차량이 정확하게 정지선에 맞춰 정차했다. 최하늘이 오한결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노을이 먼저 연락해 줘서 더 기뻤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잠시 뒤, 저 멀리 한국예술교육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에메랄드빛을 반사하며 거대한 보석처럼 반짝였는데, 근처로 다가가서 보니 투명한 유리 재질로 지은 한옥 양식의 거대한 성이었다. 마치 바닷속 투명한 용궁처럼 보였다.
온갖 상상력이 건물 안에서 탄생할 것만 같았다.
노을이 감탄했다.
“너무 멋져요. 여긴 건물부터 차원이 다르네요.”
최무열이 질투가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뭐, 여긴 건물이 좀 독특하긴 하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왜 안 중요해? 저렇게 멋진데.”
학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오한결과 최하늘, 노을, 최무열은 데이비드 오 교수가 머무는 조형예술원 건물로 향했다.
유리 건물 사이로 몇몇 학생들이 우아하게 발레를 연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한결은 그들을 바라보며 노진홍 학생을 떠올렸다. 그도 여기서 연습을 했겠구나. 앞으로 그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룰지 내심 기대가 됐다.
오한결이 데이비드 오 교수 연구실을 노크하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연구실은 무척 깔끔했다. 교수 연구실이라 하면 흔히 산처럼 쌓인 자료와 책들로 발 디딜 곳이 없는데, 이곳은 너무 깔끔해 마치 잘 꾸며진 소규모 카페에 온 듯했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직접 김이 모락모락 나는 허브차를 내주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가 직접 이곳에 오다니, 무척 영광이네.”
“과찬이십니다. 교수님.”
“아닐세. 재능 있는 작가를 알아보고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내게 있어 최고의 찬사를 던져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야.”
최하늘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고 노을과 최무열은 기뻐서 씨익 웃었다.
오한결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도움을 청할까 하는데요.”
오한결은 아리 미술관 개인전 전시 계획과 최근 서정익 작가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집중해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데이비드 오 교수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서정익 작가는 매우 여리다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남들보다 방어 기제가 매우 발달했지. 그가 쏟아내는 가시 돋친 말들에 상처받지 말게나. 진심이 아닐 거야. 그리고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해야겠지. 그는 최근에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전시했다네. 작가로서 흠이 없는 사람이야.”
오한결이 말했다.
“동의합니다. 신인 작가 중에 서정익 작가만큼 실력 있는 작가를 찾기 힘들죠. 매우 섬세하고 테크닉도 뛰어나고요. 무엇보다 예술적 감각이 독보적이에요.”
“잘 봤네. 그게 서정익 작가의 진짜 모습일세. 조언 하나 하자면, 그를 너무 자극하진 말게. 깨지기 쉬운 사람은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는 법이니까.”
“교수님께서 설득해 주실 수 있나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머뭇거렸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깨지기 쉬운 사람이라고.”
최하늘은 실망했을 오한결을 위해 얼른 끼어들었다.
“작가님, 방법이 있을 거예요. 찾아보면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다른 작가들도 많아요. 제가 사무실 가서 작가 리스트 작성해 볼게요.”
오한결이 데이비드 오 교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근데, 교수님도 미디어 아트 전시를 많이 하지 않으셨나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네만…….”
오한결이 거침없이 말했다.
“교수님께서 도와주시면 되겠네요. 가능하신가요?”
최무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예술계의 거물급인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신인 작가인 오한결 형님이 작품 협업을 제안하다니! 아무리 오한결 작가라고 해도 분명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내가 좀 바쁘긴 한데.”
망설이는 데이비드 오 교수를 본 오한결은 이런 식의 제안이 교수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무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닐세.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나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작가라고. 오히려 협업 제안을 해 준 건 무척 고마운 일이야. 근데 내가 좀 바빠서……. 아, 그럼 내가 서정익 작가와 직접 얘기해 보겠네. 최대한 설득해 보지. 그럼 됐지?”
그제야 오한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최무열은 오한결의 거침없는 질주에 홀로 작은 박수를 보냈다. 노을은 최무열의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데이비드 오 교수가 자신의 책상으로 가 우편물 하나를 들어 올렸다.
“오한결 작가, 뉴욕에 가 본 적이 있나?”
뉴욕이라는 말에 오한결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혹은 물건을 훔치다 걸린 도둑의 심정이랄까. 오한결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회귀 전 일화를 아는 사람을 만난 듯 긴장감에 몸이 굳어 버렸다.
“……아뇨. 왜 그러시죠……?”
“잘 됐구먼. 나랑 같이 뉴욕에 가지 않겠나? 뉴욕 예술가협회에서 나를 초청했다네. 한 명 동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자네와 함께 가 보고 싶어. 그곳에 한국 작가의 위대한 예술성을 자랑하고 싶네만.”
오한결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민망함에 피식 웃었다.
오한결의 일정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 것을 직감한 최하늘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노을과 최무열은 마치 본인들이 제안을 받은 것처럼 기뻐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오한결은 최하늘에게 물었다.
“문화재단도 해외 출장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저희도 해외 전시하고 레지던시가 많아서요. 물론 해외 예술가 단체 교류도 많고요. 아직 일정이 나오지 않아서 확실히 말씀 못 드리겠어요.”
오한결이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과 함께라면 무척 영광일 겁니다. 뉴욕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가만있어 보자……. 아이고! 내가 착각했구먼. 아직 일정은 나오지 않았고, 그들이 내게 안부 편지를 보낸 걸세. 추후 초대 계획이 있다는 내용이었구먼. 내가 나중에 알려 주겠네. 아마도 올해 겨울이나 내년 봄이지 않을까 싶네만.”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자, 그럼 된 건가? 가만있어 보자……. 내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다들 시간 괜찮지?”
최무열이 불쑥 대답했다.
“네! 교수님!”
* * *
데이비드 오 교수와 면담을 마친 서정익 작가는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리가 풀린 듯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도대체 오한결 그놈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교수님도 그놈를 그렇게 칭찬만 할시는 걸까.’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열 받았다.
서정익 작가가 생각한 예술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공모전을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이라고? 그게 무슨 예술인가. 예술가란 처절한 고민과 삶의 비통함을 느끼며 몇 년에 걸쳐 작품 하나에 매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낸 여러 작품으로 자신의 일관된 작품 세계를 보여 주는 사람, 그게 바로 작가인 것이다.
솔직히 오한결의 당선작은 뛰어나 보이긴 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가 직접 그렸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서정익은 대학교 때 자신보다 실력이 부족한 동기생이 전국 미술 실기대회에서 금상을 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부모는 유명한 화가였으며 아들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능력을 아끼지 않았다.
서정익 작가가 생각하는 공모전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모전에 단 한 번도 작품을 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시궁창에 발을 담그는 것 자체가 작가로서 수치라고 생각했다.
피곤함에 잠시 눈을 붙이려던 서정익은 띠링, 하는 문자 알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데이비드 오 교수였다.
「서정익 작가, 링크 하나 보냅니다. 참고하세요.」
링크를 터치하자, 오한결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실행됐다.
이젤 앞에 앉은 오한결은 캔버스에 유화를 나이프로 찍어 바르고 있었다. 서정익은 그가 추상화를 그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웅장한 산의 형태가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서정익은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영상을 통해 오한결의 진짜 그림 솜씨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동작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들은 정확한 형태를 향한 완벽한 계산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이건 불가능해! 이렇게 그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수십 번 동영상을 돌려본 서정익은 휴대폰을 바닥에 던지고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진짜 능력자에 대한 존경과 자신의 부족한 실력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마어마한 질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까지 재수 없네, 오한결!’
하지만 문득 서정익은 어떤 희망을 보았다.
혹시, 오한결 작가라면 자신을 짓누르는 이 무거운 납덩어리 같은 마음의 고통을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진짜 작가라면 나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오한결과 껄끄러운 관계라는 사실은 지금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서정익은 세상 모든 사람과 껄끄러운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서정익은 결심이 섰는지 작업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러고는 불이 꺼진 복도를 지나쳐 오한결의 작업실 앞에 섰다.
똑, 똑, 똑.
서정익이 오한결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면서 최무열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최무열은 그의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귀신이야!!! 으악!!”
밤새 떡진 머리를 쥐어뜯은 서정익 작가는 어둠 속에서 더 괴이하게 보였다.
* * *
다음 날, 오한결은 노을과 함께 유명한 돈까스 가게에 들러 최무열의 도시락을 구매했다. 최무열은 H대 작업실에 누수가 생겨 오한결의 아뜰리에에서 밤새 학교 과제를 하고 있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선 오한결과 노을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최무열을 발견했다.
“무열아 도시락 먹어. 이거 되게 유명한 집에서 사 온 거야.”
최무열이 뒤돌자, 그의 얼굴에 생겨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져 보였다.
“살려줘……. 여기선 기 빨려 못 살겠어.”
새벽에 겪은 일화를 듣고 난 오한결은 배꼽 빠질 듯 웃어댔다.
“우하하하. 서정익 작가가 나랑 작업하겠다고 찾아왔다고? 재밌네. 동영상 하나로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수 있구나. 내가 보기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 데이비드 오 교수의 설득이 통했나 보다! 그게 제일 그럴듯한데.”
최무열이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동영상 보고 찾아왔다고 분명 그랬어요. 모두 다 제 덕분이죠. 제가 올린 동영상을 봤나 봐요. 뭐, 잘 찍긴 했죠. 제가 워낙 감각이 좋으니까요.”
“그래, 고맙다. 그럼, 커피도 쏠게!”
유난히 조용한 노을이 걱정된 오한결이 물었다.
“왜 그렇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어……?”
“전 무열이가 겪은 그 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요. 으악! 내가 그 장면을 봤다면 나는 심장마비가 왔을 거야. 서정익은 진짜 귀신 같은 사람이라고요. 아직도 꿈에 가끔 나와요. 그 끔찍한 모습이……. 끼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