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49화 (49/202)

제49화 누드화

주말 한적한 오후.

복실이가 포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앞서고 신태진 회장과 이현미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뒤따랐다.

회장 부부처럼 공원에 나온 사람들은 마음껏 여유를 부리며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이현미가 킥보드를 타며 즐거워하는 꼬마 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 아이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러고 보면, 지난날 행복한 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 느낌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아 있겠죠.”

신태진 회장이 아내를 따스하게 바라봤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이 필요한 거지요. 위대한 예술은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우리의 소중한 감성을 언제나 일깨워 준다고 생각하면 돼요.”

“기업 회장님이 아니라 예술 평론가를 해 보시는 건 어때요? 호호.”

“예술 이론은 당신만큼 아는 사람도 드물잖아. 그래서 내가 첫눈에 반한 거고.”

신태진 회장이 빤히 쳐다보자 이현미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회장님 요즘 확실히 달라졌어요. 기분도 항상 좋아 보이고.”

신태진 회장이 멈춰 서자, 해맑게 걷던 복실이가 놀라 뒤를 돌아보고 낑낑거렸다.

“고백할 게 있어……. 절대 웃지 마시오.”

살짝 긴장한 이현미가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사랑 고백이라도 할 건가요? 불안하게 왜 그래요.”

잠시 머뭇거리던 신태진 회장이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림을 배우기로 했어.”

“난 또 무슨 얘기라고. 잘됐네요. 배우고 싶어 하셨잖아요.”

“미술학원에서.”

“네?”

멍하니 회장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현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하셨어요. 근데 미술학원은 의외네요. 과외라면 몰라도.”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지. 어릴 때 미술학원 가 보는 게 소원이었어.”

신태진 회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 친구가 미술학원 강사라, 나름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림도 배우고, 오한결 작가와 친분도 쌓고. 서로 아는 친구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이게 바로 일석이조 아닌가!”

“하여간 못 말려…….”

복실이가 다리 밑에서 맴돌자, 이현미가 복실이를 품에 안았다.

“오한결 작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 같아요. 그림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자체가 매력 덩어리 아닌가요? 저도 미술계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오한결 작가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나중에 회장님 덕 좀 보겠는걸요.”

신태진 회장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나이에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그림을 열심히 배워서 당신하고 복실이를 그려 주리다.”

복실이를 쓰다듬으며 이현미가 말했다.

“우리 복실이 좋겠네. 회장님이 널 그려 준다는구나. 어이구, 예쁜 것.”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이현미가 불현듯 물었다.

“근데, 아리 미술관 20주년 기념 전시를 오한결 작가에게 부탁했다면서요. 너무 파격적인 조치는 불필요한 구설수가 생길 수 있어요. 전 그게 걱정되네요.”

신태진 회장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게. 아직 그 누구도 부정적인 말을 한 사람이 없어.”

이현미는 복실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생각했다.

‘정말 없을까? 말을 못 하는 거겠지. 오한결 작가가 이번 전시에 성공하지 못하면 작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도 끝나게 될 텐데.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신인 작가에게 부담스러운 기회이지 않을까? 왜 회장님은 그걸 모르는 거지?’

* * *

굳게 닫힌 서정익 작가의 작업실 앞에서 오한결이 서성이고 있었다.

최하늘의 말대로 서정익 작가는 현재 신인 작가 중 가장 인정받는 작가였다. 때마침 그가 미디어 아트를 전공했고 관련 전시도 여러 번 했다고 하니 오한결을 도와줄 사람으로 제격인 건 틀림없는 사실로 보였다.

똑. 똑. 똑.

고민 끝에 오한결이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작업실. 하지만 분명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그곳에 분명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똑. 똑. 똑.

다시 문을 두드리자, 몹시 짜증 섞인 음성이 들렸다.

“누구세요?”

“오한결 작가예요. 옆 작업실 쓰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이 이어졌다.

“……근데요?”

“할 말이 있는데, 문 좀 열어 볼래요?”

“싫은데요.”

오한결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낮췄다.

“지난번 일은 사과드릴게요. 저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잘못이었어요.”

오한결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그리 길지는 않았다.

철커덕,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스르르 열렸다.

생각보다 깔끔한 모습의 서정익 작가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오한결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그게, 그때 일은…….”

“들어오세요.”

작업실로 들어선 오한결은 몹시 놀랐다. 휑한 자신의 작업실과 반대로, 서정익 작가의 작업실에는 수많은 미술 재료와 그림들은 물론 미완성 상태의 최근 작품까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특유의 비릿한 물감 냄새까지 더해지니 작업실이 더욱 멋져 보였다.

오한결은 천천히 벽과 바닥에 놓인 서정익 작가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여러 스타일의 작품을 구사하는 것 같지만 뭔가 그 작품들 사이를 관통하는 묘한 공통점이 느껴졌다. 기이하게 뒤틀린 형태와 무표정한 인물화 사이로 삶 앞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듯한 누드화 하나가 오한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한결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서정익 작가는 정말 천재구나…….’

오랜 무명 생활을 거친 후 신의 선물로 인해 천재적 능력을 얻은 작가가 아닌, 애초에 재능을 갖고 태어난 작가로서 삶을 누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한결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질투인가, 아니면 시기인가.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천재적 능력이 생긴 뒤 오한결은 자신의 실력을 맹신했었다.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 결과는 오한결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서정익 작가는 분명 오한결의 당선 작품을 봤을 텐데, 그는 한결 같이 오한결을 무시하고 깔봤다.

이 천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오한결의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 왜, 그 이유는 뭘까?

여러 의문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오한결의 머리를 짓눌렀다. 식은땀을 흘리며 휘청거리자, 서정익 작가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봐요! 괜찮아요?”

“……네. 물 좀 주시겠어요?”

두 눈을 질끈 감은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정익 작가가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다.

오한결은 작업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힘겹게 의자에 앉은 오한결은 벽에 걸린 누드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굴은 불에 탄 듯 시커멓게 그을렸고 눈두덩이와 광대에서 처절한 삶에 대한 회한이 느껴졌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는 마치 잘린 듯 형체가 없었고 인간의 몸인지 죽은 자의 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처참하게 말라 있었다.

역겹고 불길하다. 인간에게 저주가 내린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지만 오한결의 입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너무 처절해서 아름답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정익 작가가 물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한결은 그림만 쳐다봤다.

“저 그림은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군요. 놀라워요. 기대 이상이에요.”

서정익 작가도 고개를 돌려 누드화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취향이 고상하시네요. 당신의 아름다움은 추함에 있나 보죠?”

오한결은 대답 대신 그림을 노려봤다.

그러자 서정익 작가가 답답한 듯 짜증을 부렸다.

“여기 왜 오신 거죠?”

오한결은 고개를 돌려 서정익 작가를 바라봤다.

“에곤 실레! 당신은 에곤 실레의 영혼을 가슴에 품고 있군요. 아니, 환생했다고 믿어도 되겠어요.”

갑작스런 평에 서정익 작가가 버벅거렸다.

“뭐야…….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저는 에곤 실레 작품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그릴 수 있죠.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을 그대로 재현할 수도 있답니다. 이런 제가 놀란 건 당신의 그림도 그런 느낌이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그림을 그렸군요. 그게 저와 당신의 차이점입니다.”

“……대체 왜 그래? 미쳤어?”

“단 하나 아쉬운 건. 아직 신인이라 그런지 디테일이 많이 부족하네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일 겁니다. 연습을 꾸준히 하셔야 해요.”

오한결이 눈을 감자, 에곤 실레의 모든 그림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타인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감각이 이렇게 영향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오한결은 슬쩍 웃으며 생각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리고 알 것 같다. 왜 서정익 작가가 작품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는지를. 그의 정신세계는 무척 혼란스럽고 예민하고 파괴적이다. 작가 스스로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 후 정신을 차린 오한결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시다시피, 제가 개인전을 합니다. 함께 일할 미디어 아티스트를 찾고 있는데, 혹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서정익 작가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싫은데요. 제가 왜요?”

“……제가 서정익 작가님의 능력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작업실 문으로 걸어간 서정익 작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말했다.

“나가세요. 할 말 다 하셨으면.”

오한결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복도에 한참을 서서 닫힌 작업실 문을 바라봤다.

‘진짜 재수 없다. 그것도 재능인가 보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나서는데, 자연스레 에곤 실레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6세에 능력을 인정받아 빈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 학풍에 반기를 들고 결국 자퇴하기에 이른다.

에곤 실레의 그림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 실존에 대한 투쟁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그는 불안을 느낀 인간의 육체를 누드화로 그렸는데, 대부분 왜곡되고 뒤틀린 양상을 띠었다.

가까웠던 클림트의 사망 후 실레는 오스트리아의 대표 예술가 지위를 누렸다. 같은 해 빈 분리파 전시까지 성공하면서 예술적 명성과 경제적 이득 모두 성취했다. 하지만 28세 나이에 임신한 아내와 함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한 천재 예술가의 굴곡진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 * *

아트 화랑에 모인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

오한결의 이야기를 듣던 노을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서정익 작가 진짜 재수 없네요. 그림 좀 그린다고 완전 건방지고요. 솔직히 오한결 작가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인성도 구린 놈이 무슨 예술을 한다고! 머리나 좀 감지!!”

최무열이 조심스레 말했다.

“누나, 서정익 작가가 대단하긴 해요. 예술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실력으로 엄청 유명하고요. 우리 학교 선배라서 제가 잘 알거든요…….”

노을이 최무열을 노려봤다.

“넌 누구 편이니!”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에 편이 어딨어. 서정익 작가가 모난 성격인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이제 그만하자. 근데 어쩌지? 미디어 아트를 잘 아는 작가를 섭외해야 하는데. 추천 좀 해 줄래?”

최무열이 허둥대며 말했다.

“아……. 그분 있잖아요. 문화재단 공모전 심사위원도 했고, 되게 유명하신 그분!!”

“데이비드 오 교수?”

“네! 맞아요. 그분도 미디어 아트로 엄청 유명해요. 근데……. 그런 위치의 교수님께서 도와주시려고 할까요?”

노을이 소리쳤다.

“야! 최무열. 오한결 작가님은 낮은 위치냐? 안 바쁘면 해 주시겠지. 심사도 해주셨는데.”

최무열이 대답했다.

“누나가 잘 모르나 본데. 데이비드 오 교수는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그분 자체가 현대 예술의 아이콘이야…….”

오한결이 말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나중에 한국을 빛낸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기록되는 분이거든. 일단 가 보자. 만나 뵙고 싶었어. 이번 기회에 찾아가 봐야겠어.”

노을이 중얼거렸다.

“좁은 땅에 인재들이 넘치는구먼.”

최무열이 소리쳤다.

“오!! 대박!! 저도 데려가 줘요!!”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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