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48화 (48/202)

제48화 미디어아트

노을이 아뜰리에 창문을 활짝 열자, 신선한 아침 공기가 기분 좋게 얼굴을 스쳤다.

밤새 과제를 한 최무열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오한결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독서에 빠져있었다.

노을이 창가에 기대서서 말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모인 건 처음이네. 낯설다, 이 모습.”

최무열이 하품을 크게 했다.

“난 두 시간도 못 자고 나왔어. 지금쯤 꿈나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오한결 작가님이 오후에 일정이 있으시잖아.”

오한결은 묵묵히 읽던 책을 마저 다 읽고 말했다.

“미안, 찾아봐야 할 게 있어서.”

최무열이 호기심을 보였다.

“오한결 형님도 모르는 게 있어요?”

오한결은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는 것 빼고 다 모른다. 왜!”

최무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묘하게 설득되네. 하하.”

창가로 다가간 오한결이 창밖으로 공원을 넌지시 바라봤다. 사람들이 조깅하러 모여들고 있었다.

“곧 있을 미술관 개인전 작품에 관해 설명하려고 와달라고 한 거야. 더는 늦춰선 안 될 거 같아서.”

노을이 가방이 놓인 탁자 쪽으로 달려갔다.

“잠깐만! 노트 좀 꺼내고. 이건 적어야 해!”

최무열도 후다닥 가방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노을과 최무열이 자리를 잡고 앉자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아리 미술관은 20주년 기념 전시를 내 작품으로 하겠다고 제안을 해왔어. 그만큼 내게 기대하는 게 더 많아진 거지.”

노을과 최무열은 존경을 눈빛을 마구 발사했다.

오한결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이번 전시를 ‘미디어아트’로 해보려고. 캔버스 위에 표현한 나의 평면적 작품을 영상 매체를 활용해 입체적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

노을이 눈을 껌뻑거렸다.

“미디어아트?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히 그게 뭐지?”

오한결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대중매체를 미술에 도입한 거야. 흔히 매체예술이라고 부르지. 사진, 영화, 비디오, 컴퓨터 등 대중에 파급 효과가 큰 미디어 기술을 미술에 적용한 예술로 생각하면 돼.”

“……더 어렵다. 쉬운 말로?”

최무열이 말을 보탰다.

“팝아트 대표 주자였던 앤디 워홀 작품이나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백남준 작가의 비디오 아트도 미디어아트의 한 장르야.”

“역시 무열이도 한 똑똑하네.”

최무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학교에서 배웠어. 내가 그림보다 공부를 더 잘하거든……. 슬프네.”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공간을 활용해 작품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거야. 아리 미술관에서 굉장히 넓은 전시실을 내게 주기로 했어. 이번 작품이 우주를 배경으로 별을 표현한 작품이잖아. 그 전시 공간이 아득한 우주가 되고 사방에서 별이 반짝이게 만들고 싶어. 별들은 우리가 손수 정성을 다해 그린 것이어야 하고.”

“단순하게 별만 반짝이나요?”

“별들이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이동할 거야.”

최무열이 씨익 웃었다.

“에이, 그럼 뭐 쉽겠네요. 영상으로 만들 거면, 별 하나 그려놓고 복사하면 돼요. 그리고 붙여넣기. 쉽죠?”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든 별은 나와 너희들이 하나하나 정성껏 그릴 거고, 별들은 그 모양과 색깔이 다를 거야.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작품에 담아내지 못하면 전시는 분명 실패할 거야.”

노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나 걸릴까요? 엄청 힘들 거 같은데.”

오한결이 눈을 감고 말했다.

“내가 캔버스에 그릴 땐 말이야, 사흘 걸렸어. 물론 밤샘 작업으로.”

노을과 최무열이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무열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엄청 힘들겠다…….”

오한결은 노을과 최무열에게 공모전 수상 작품 <그리움, 다시 시작>의 제작 과정을 알려주었다.

화려했던 삼각지 화랑거리의 옛 이야기와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화랑 사장들을 인터뷰했던 과정을 설명했다. 오한결은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별 이미지로 한 점 한 점 그려나갔던 사실도 알려주었다.

설명을 다 들은 노을과 최무열은 숙연해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노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무 멋지고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저도 그만큼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최무열도 고개를 끄덕였다.

“삼각지 화랑거리가 한국의 몽마르트였다고요? 감동적이면서도 지금 현실을 생각해보면 씁쓸하네요. 오한결 작가님이 그들을 위해 이렇게 멋진 작품을 준비하셨다니. 완전 감동입니다. 저도 밤을 새워서 돕겠습니다.”

오한결이 손을 휘저었다.

“밤까지 안 새워도 돼. 꾸준히 작업하면 완성할 수 있어. 다들 고마워.”

갑자기 오한결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지. 영상 작업이 필요한데, 너희 중에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어?”

“……없는데요. 오한결 작가님 전혀 모르세요?”

오한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난 순수 미술만 해 와서……. 손으로 그리는 건 잘하지…….”

“오한결 작가님도 못하는 게 있구나. 신기하네.”

모두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문이 살짝 열리자 최하늘이 얼굴이 보였다.

노을이 소리쳤다.

“언니!!”

양손 가득 커피를 든 최하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오한결이 커피를 받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제 끝내려고요. 오후에 제가 일정이 있어서요.”

최무열이 꾸벅 인사를 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근데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최하늘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그게……. 문화재단 사무실에서 아뜰리에 건물이 보이거든. 아침부터 불이 켜져 있어서……. 그리고 지금 창문을 활짝 열어놔서 밖에서 다 보여요…….”

오한결이 놀랐다.

“이런, 왠지 조심스럽네요.”

최하늘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죠……. 어쩌다 보니. 근데 신경 쓰지 마세요. 문화재단에서 터치하고 그런 건 절대 없어요.”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여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최하늘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했다.

“제가 뭐 도울 건 없나요?”

노을이 물었다.

“혹시 그래픽 프로그램 다룰 수 있어요? 오한결 작가님 개인전을 미디어아트로 하려고 하는데, 영상을 다룰 능력자가 필요해요.”

최하늘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나는 못 하는데……. 지금 떠오르는 작가가 있어. ‘미디어아트’를 전공했다고 들었거든. 예전에 몇 번 미디어아트 전시도 했다고 들었어. 지금은 회화 위주로 활동하고 있고.”

노을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잘 됐다. 누구예요?”

“서정익 작가.”

순간 묵직한 침묵이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오한결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미디어아트를 전공했군요. 음……. 그 친구 성격이 보통이 아니던데…….”

최무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완전 이상하던데. 불 꺼진 복도를 산발 머리하고 다니잖아요.”

노을이 말을 보탰다.

“내가 볼 땐 최소 일주일은 머리 안 감았어. 확실해!”

최하늘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서정익 작가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네요. 그래도 그분만큼 실력 있는 작가는 드물어요. 미디어아트 전시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걸 보면 스탭과 마찰도 없었던 것 같고요. 너무 오해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고 조심스레 말씀드려 봐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오한결이 말했다.

“말씀 고마워요. 고민해 볼게요.”

“네, 작가님.”

“아! 최하늘 씨도 같이 갈래요? 제가 오후에 EBC 피디 만나기로 했거든요.”

오한결이 최무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열이가 SNS에 제가 그림을 그리는 동영상을 올렸나 봐요. EBC 피디가 그걸 보자마자 전화를 했어요. 어찌됐든 만나기로 했으니까 보긴 봐야겠죠.”

놀란 최무열이 휴대폰을 켜고 자신의 SNS를 확인했다.

“으악!! 엄청난 조회수다. 300만이 넘었어!!”

“어디 나도 좀 보자.”

노을이 최무열 손에 들린 휴대폰에 얼굴을 들이댔다. 최하늘도 은근슬쩍 최무열을 곁에 다가와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한결이 말했다.

“최하늘 씨, 같이 가실 수 있나요?”

최하늘이 고개를 잽싸게 돌려 오한결을 쳐다봤다.

“당연히 됩니다!”

***<>

김명호 PD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직접 방송국에 와주시고. 너무 영광입니다. 일전엔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려요. 제가 찾아보니까, 엄청난 분이시더라고요. 이번에 그림 영상도 그렇고, 작가님은 완벽하게 제가 찾던 예술가십니다. 근데 같이 오신 분은 여자친구?”

최하늘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오한결이 말했다.

“문화재단 직원입니다.”

김명호 PD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건 문화재단의 월권입니다. 솔직히 공모전 당선 작가가 방송 활동을 하든지 말든지, 그게 문화재단이 간섭할 일입니까!”

오한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오해한 것 같군요. 여기 이 분은 제가 부탁해서 오신 겁니다.”

최하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참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나중에 이사장과 팀장에게 EBC 외근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고민했다. 사실대로 보고하면 그들은 김명호 PD를 저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제가 아리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일정상 당장은 힘들 거 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방송 출연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놓인 김명호 PD가 말했다.

“전시 이후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해보고 싶어요. 저의 그림 그리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저희도 기획과 편성 때문에 당장은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오한결 작가님이 해주시겠다고 하면 국장님께서 추후 편성을 잡아주실 겁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김명호 PD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네. 뭐든 말씀해주세요. 저희가 수용할 수 있는 건 모두 하겠습니다.”

“출연료는 모두 기부할 겁니다. 기부를 조건으로 출연료를 책정해주세요.”

김명호와 최하늘은 모두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나 번개 같은 속도로 서로 고개를 돌렸다.

김명호 PD가 말했다.

“그럼……. 많이 달라는 말씀이시죠?”

“네. 방송국에서 최대한 줄 수 있는 만큼요.”

“얼마까지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방송국 제안을 보고 결정하려고 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김명호 PD를 재밌게 구경하던 최하늘이 오한결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작가님 정말 멋진 분이세요.”

“아버지 병실에서 발레를 전공한 학생을 만났어요.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꿈을 포기하겠다는 그 학생을 보면서 기부를 결정했습니다. 한때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방송으로 생긴 모든 수익은 가난한 예술가를 위해 쓰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오한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최하늘도 따라 일어섰다.

오한결의 대담함에 감동한 김명호 PD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작가님,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출연료 관련해선 내부에서 논의해보겠습니다.”

“그럼, 기대해보겠습니다. 아, 제 개인전도 꼭 와주세요. PD님.”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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