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치유와 희망
창밖에서 들어온 아침 햇살이 아뜰리에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전날 등산을 했음에도, 이젤 앞에 앉은 오한결은 피곤한 기색 없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띤 채 흥미롭게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한결 뒤에는 노을과 최무열이 싱글벙글 웃으며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남아 있지 않았고 오히려 무척 흥분한 상태로 보였다. 오한결이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오한결은 높고 푸른 산맥과 회색 암석이 두드러진 용화산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보고 싶은 기억에 에너지를 집중하자 마치 컴퓨터 파일을 열람하듯 해당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버지께 용왕산의 웅장함과 신비스러운 느낌을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 오한결은 최대한 사진처럼 아주 선명한 색과 성실한 묘사로 작품을 그려내고 싶었다. 어제 봤던 자연 모습 그대로 이미지를 재현하고 싶었다.
오한결이 나이프로 유화를 거침없이 찍어 바르자, 최무열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밑그림부터 그려야 하지 않나요? 너무 과감하신 것 같은데…….”
오한결은 암석이 그려질 곳에 짙은 회색 유화물감을 바르며 말했다.
“나는 우연적 효과를 노리는 게 아니야. 대충 묻힌 듯해 보여도 이 물감들은 정확한 위치에서 그림의 형태가 되고 명암이 되는 거야.”
노을과 최무열이 속닥거리더니, 최무열이 오한결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 실례가 안 된다면, 그림 그리는 모습을 휴대폰으로 촬영해도 될까요?”
오한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러?”
노을이 답답한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지금 작가님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소중하고 진귀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구경만 하기엔 너무 대작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고요. 아까워서 미치겠어요! 무조건 기록으로 남겨야 해요.”
오한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정을 기록하겠다고?’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는 않았다. 무조건 좋은 결과만 생각했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예술적 효과만 기대했다.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구나.’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좋아. 대신 잘 찍어줘야 해.”
“형님은 대충 찍어도 완벽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최무열의 능청스러운 말투 덕분에 작업실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다시 집중력을 발휘한 오한결은 나이프에 물감을 잔뜩 묻혀서 마치 행위예술 하듯 군데군데 물감을 묻히기 시작했다.
최무열은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모든 과정은 오한결의 무의식 속에서 완벽하게 계산되고 한 치의 오차 없이 표현된다. 산맥의 초록빛깔과 암벽의 짙은 회색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을 본 노을과 최무열은 어제 산 정상에 섰을 때 그들이 보았던 기가 막힌 전경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최무열이 노을에게 속삭였다.
“근데……. 최하늘 누나는 오늘 무사히 일어났을까? 내 생각엔 일주일은 누워서 쉬어야 할 것 같던데. 너무 힘들어했잖아. 기절 직전이었다고.”
노을이 웃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체력이 약했을 뿐이잖아. 최선을 다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뒤에서 말하면 안 돼.”
“……나는 그 뜻이 아니라.”
“하늘 언니 회복 잘 했대. 오늘 아침에 문자 주고받았어.”
“다행이구나. 헉! 근데 두 사람 벌써 그렇게 친해졌어?”
오한결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작업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용화산의 이미지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제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더 흘렀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돼 전원이 나가버리자 최무열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오한결은 세부 작업만 남았기 때문에 더는 촬영하지 않아도 된다고 최무열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오한결은 아직도 작업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
노을이 크게 하품을 하고 물었다.
“작가님, 거의 완성됐나요? 한 시간 전하고 크게 변화가 없어서요.”
오한결이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니, 난 내가 본 그대로를 그리려고 해. 암석만 그려도 얼마나 할 게 많은데. 바위가 갈라지고 쪼개진 모습. 그사이에 생긴 그림자며, 바위 사이에 솟아난 생명의 흔적까지. 아직도 갈 길은 멀어.”
“……식사라도 하고 하세요. 배 안 고파요?”
“미안, 난 작업 중에 안 먹어서. 먼저 먹고 올래?”
그렇게 다시 세 시간이 흘렀다.
노을과 최무열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편히 기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잠에서 깬 최무열이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소리쳤다.
“뭐야! 완성했잖아!”
노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깜빡 잠이 들었구나.”
“누나, 그림이 완성됐어. 와! 대박, 완전 사진 같잖아.”
“우와, 코팅 용지에 정교하게 뽑은 고급 컬러 사진 같아. 어떻게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난 이제 무서울 정도야.”
최무열이 두리번거리며 오한결을 찾았지만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잠든 사이 홀로 작업실을 떠난 듯 싶었다.
“한결이 형님은 먼저 집에 가셨나 봐…….”
노을이 주섬주섬 가방과 물건들을 챙기며 말했다.
“우리도 그만 가자. 여긴 좀 으스스해.”
최무열이 작업실 문틈 사이로 복도 전등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복도에 또 불이 나갔나 봐! 설마, 서정익 작가가 좀비처럼 돌아다니면…….”
노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 돼! 난 절대 못 나가! 아직 트라우마 극복 못했단 말이야!”
“누나, 어쩔 수 없어……. 여기서 밤을 샐 거야?”
“그럼 무조건 뛰는 거야. 알겠지?”
“오케이. 하나 둘 셋, 달려!”
* * *
오한결이 최무열의 도움을 받아 병실 창가에 그림을 올려놓았다. 아버지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뼉을 치며 말했다.
“대단하다. 대단해! 너무 멋지구나.”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네요.”
“내가 산 정상에서 바라본 경치와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니.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구나.”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우리 예술가 아들 오한결.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다.”
어머니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이제 위험한 산 대신, 한결이가 그려준 그림 보면서 위안을 삼아요. 알겠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깁스하고 산에 못가니까. 당분간 이걸로 위로 받아야겠다. 근데 부작용이 있네. 당장 산으로 달려가고 싶어지잖아!”
“당분간? 아니……. 내 말은 다시는 산에 가지 말고 그림만 보라고요.”
“……당신 농담하는 거지?”
“진심인데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오한결은 멍하니 그림을 관찰하던 다른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노진홍 학생.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노진홍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림이 꼭 사진 같잖아요. 아니다. 사진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그림만의 질감이 있으니까, 사진과 비교도 할 수 없어요. 이건 뭐랄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느낌이랄까. 정말 놀라운 작품이에요.”
코끝이 찡해진 노진홍이 말을 힘겹게 이었다.
“소문대로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진짜 예술가를 이렇게 앞에서 보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작가님은 존재 자체가 감동입니다.”
오한결은 노진홍의 진심 어린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최무열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오한결을 바라봤다.
“발레하는 노진홍 학생이야.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발목 인대에 문제가 생겼다네. 그리고…….”
오한결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닮았구나. 성실한 예술 전공 대학생들. 그리고 진지하게 예술적 재능에 대해 고민하는 것까지.”
노진홍이 최무열을 보고 웃었다.
“저는 무용가로서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미친 듯이 노력했죠. 노력이 재능을 만들어 줄 거라고 굳게 믿었거든요. 그래서 더 악착같이 연습했는데, 얻은 건 다리 부상뿐이었죠. 무용을 포기할까 생각했는데, 오한결 작가님께서 노력에 상응하는 기회가 분명히 올 거라고 희망을 주셨어요.”
최무열이 깜짝 놀랐다.
“이거 내 얘긴데! 나랑 똑같잖아. 무용 부분만 빼고……. 뭐, 내가 춤을 좀 추긴 하지만…….”
노진홍이 최무열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오한결 작가님 같이 훌륭하신 분과 작업도 같이 하시고. 너무 부러워요.”
최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아요.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우하하.”
갑자기 최무열의 표정이 우울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이 그림처럼 잘 그리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죠.”
오한결이 대답했다.
“무열이가 왜 내 작품처럼 그려야 하지? 아직 무열이가 예술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 예술은 그런 게 아니야. 동그라미 몇 개 그린 후 작품이라 우겨도 그게 내 그림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없어. 진짜 예술을 하라는 말은 네 표현법을 찾으라는 얘기야. 힘들겠지만 일단 찾으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예술가가 되는 거지.”
조용히 듣고 있던 노진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의 표현법이라……. 역시, 어렵네요.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물론.”
“왜 저 산 그림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까요?”
최무열이 알은체했다.
“그건 오한결 형님의 추억이 한 스푼 들어갔기 때문이지.”
오한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게 바로 예술이 주는 마법 같은 효과야. 예술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 치유와 희망을 줄 수 있거든. 지금 같은 경우 작가인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인 노진홍 학생이 그대로 수용한 결과인 거지.”
노진홍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어렵네요.”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도 등산을 해 봤을 거잖아. 나처럼 아버지와 즐거운 추억의 장소였을 수도 있고, 힘들고 지쳤을 때 위로를 받기 위해 종종 혼자 올랐던 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골에 살아서 산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녔던 유년 시절의 기억일 수도 있어. 관객은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만의 추억에 잠기는 거야.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지.”
“……아, 맞아요. 제게도 산은 항상 좋은 친구 같은 곳이었어요. 솔직히 제가 친구가 별로 없어요. 외롭고 지친 날에 무작정 산을 오르곤 했죠. 산은 언제나 묵묵히 나를 받아줬던 친구 같은 존재예요.”
“노진홍 학생! 무용도 그림과 다를 바 없어요. 창작자의 표현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감성이 하나가 될 때 예술은 빛이 나는 법이죠.”
노진홍이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앉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맞아요. 테크닉이 아니라 관객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진정성이 중요한 거였어요. 전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조건 테크닉으로 승부 봐야겠다고 결심했었거든요. 오판이었네요.”
최무열은 노진홍 때문에 불안해졌다.
“한결 형님. 저도 진홍 씨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저 잘했죠?”
오한결이 마지 못 해 대답했다.
“그래. 훌륭하다.”
노진홍도 피식하고 웃었다.
“오한결 작가님 제가 종종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어차피 제 동생 발레 선생님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