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용화산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최하늘이 거침없이 차선을 변경하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노을이 매우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와! 운전 엄청 잘하신다.”
조수석에 앉은 오한결이 고개를 돌려 노을과 최무열을 바라봤다.
“소개가 좀 늦었지. 이 분은 명일문화재단 직원이셔. 오늘 특별히 모셨지.”
최하늘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운행하는 차량을 잽싸게 추월한 뒤 말했다.
“반가워요. 최하늘이에요. 불쑥 나타나서 놀라셨죠. 오한결 작가님 일정 확인하다가 등산 가신다기에 제가 같이 가도 되냐고 여쭤봤어요.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제가 민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최무열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에이, 민폐라니요. 등산은 여럿이 가야 재밌죠. 그렇지, 누나?”
노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잘 오셨어요. 우리가 어떻게 부르면 돼요? 대리님? 과장님?”
“……그게, 그냥 이름 부르면 돼요. 제가 아직 사원이라.”
“그럼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25이요.”
“언니네요! 언니라고 해도 돼요?”
최하늘이 정면을 주시한 채 씨익 웃었다.
“그럼요. 그러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어느덧, 서울을 벗어난 그들은 강원도로 향해 뻥 뚫린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오한결이 최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운전할게요.”
“아니에요. 이건 매니저가 해야죠.”
“……매니저요?”
최하늘은 자신의 말실수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매니저 역할을 하며 오한결 작가를 관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엄청 화내실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근데 오한결 작가는 이미 눈치챈 걸까? 흔쾌히 등산모임을 허락한 것도 그렇고…….
“……그게, 매니저처럼 생각해 달라는 거예요. 제가 한결 작가님 일정 관리도 하니까. 우하하하…….”
최하늘이 크게 웃자, 잠들었던 노을과 최무열이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벌써 다 온 거야?”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한 시간 더 가야 해. 아침 일찍 오느냐고 피곤할 텐데, 더 자둬.”
최무열이 크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용화산이라고 했나요? 많은 산 중에 왜 거길 가요?”
오한결이 생각에 잠기며 말을 흘렸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갔던 추억이 있는 산이야. 기억은 희미한데, 그때 정상에서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 만약 언젠가 등산하고 싶어진다면 먼저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서울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의 용화산은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명산이다. 800 미터를 훌쩍 넘는 산봉우리에는 여러 전설을 간직한 기암과 폭포가 있고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지네와 뱀이 싸우다가 이긴 쪽이 용이 됐다는 전설이 있대. 그만큼 경치가 신비스럽고 뛰어나다는 말이겠지?”
오한결이 뒷좌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비몽사몽 한 얼굴로 간신히 버티고 있자 오한결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아침잠 많잖아. 오늘 일찍 일어났으니까, 좀 더 눈을 붙여둬. 이따가 힘들면 못 올라가니까.”
한 시간 뒤, 최하늘의 차가 목적지인 용화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입구에 진입하면서부터 잠이 깬 노을과 최무열은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노을이 운전석을 향해 말했다.
“언니! 수고 많으셨어요. 운전 엄청 잘하시던데요. 멋져요!”
최무열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감사합니다. 누나! 베스트 드라이버세요!”
“고마워요!”
차에서 내린 일행은 콧속으로 스며드는 상쾌하고 깨끗한 공기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답답한 도시 생활에 지쳤을 일행에게는 몹시도 소중한 자연의 선물이었다.
오한결이 숨을 깊게 들이 쉬고 말했다.
“여기는 서울의 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기가 좋은 것 같네. 이렇게 오감을 통해 자연을 느껴보니, 왜 아버지가 산을 찾아다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차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낸 최하늘이 오한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작가님은 섬세하시네요. 제 수준에선 ‘아, 너무 좋다’ 정도만 생각했거든요.”
노을과 최무열도 오한결의 근처로 다가왔다. 오한결의 짐이 보이지 않자, 최무열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한결 형님! 왜 그림 도구가 없어요? 혹시 놓고 오셨어요? 헉! 대박사건!”
노을과 최하늘도 오한결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려 멀리 산 정상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내가 모두 기억할 테니까. 그림은 작업실에서 제대로 그리려고. 오늘은 구경만 하자.”
최하늘이 깜짝 놀랐다.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려고요? 그래도 섬세한 작업은 힘들지 않을까요? 제가 휴대폰 최근에 바꿨는데 카메라 성능이 좋아요.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노을이 키득 웃으며 말했다.
“언니, 안 그래도 돼요. 그 이유는 나중에 작품 나오면 알게 될 거예요.”
오한결이 씨익 웃으며 말없이 등산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나머지 세 사람도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 * *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는 세 사람.
오한결의 선두로 최하늘, 노을, 최무열이 일렬로 뒤따랐다. 오랜만에 흙을 밟으며 자연 속을 거닐고 있으니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가 절로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30분이 걷다 보니 탁 트인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아본 적 없는 태초의 자연을 직접 본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웅장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노을이 가져온 오이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에게 오한결이 말했다.
“정상까지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되니까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서울로 올라가려면 차 막히는 시간을 피해야지.”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은 거뜬히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고 있는데, 최하늘 혼자 두 손을 땅에 짚고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노을이 걱정돼서 물었다.
“언니, 괜찮아요?”
최하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내가 체력이 약해서……. 걱정하지 마. 절대 민폐 끼치지 않을게.”
노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힘드세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최하늘이 오한결과 눈이 마주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오해할 말을 했어요. 전 하나도 안 힘드니까……. 그러니까 빨리 출발해요.”
하지만 각오와는 다르게 최하늘은 점점 뒤처지더니, 결국 일렬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이를 악물고 따라오는 그녀의 표정을 본 일행들은 감히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을이 오한결에게 말했다.
“이대로 괜찮을까요? 하늘 언니 지금 거의 기절하기 직전인데요.”
오한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따라 붙은 최하늘을 바라봤다.
“최하늘 씨, 괜찮아요? 잠시 쉬었다 갈까요?”
“아니요!! 난 괜찮아요!! 어서 계속 가세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최하늘은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최무열은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도와줄 게 없나 살폈지만, 최하늘 얼굴에서 도움 없이 혼자 완주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보여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은 곰바위 전망대에서 짧은 휴식을 갖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최하늘은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할 수 있다’는 주문을 계속 외우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산새들의 지저귐처럼 일행들에게 자연스럽게 들렸다.
최하늘은 두 손으로 배낭끈을 세게 잡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모두 같이 힘든 거야. 절대 짐이 될 수 없어. 최선을 다하는 거야.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나는 그렇게 안 살았단 말이야!’
최하늘이 기합을 잔뜩 넣고 소리쳤다.
“나는 할 수 있다!!”
때마침 새 무리들이 응답하듯 나무 위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일행 모두 지쳐 갈 때쯤 촛대바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잠시 쉬고 가자고 하자, 숨이 턱까지 차오른 노을과 최무열은 만세를 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 사람은 동시에 최하늘의 상태를 확인했다.
신기하게도 등산 초입부터 힘들어 하던 최하늘은 크게 뒤처지지 않고 일행 근처에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최하늘의 입에서는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촛대 바위가 잘 보이는 곳에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짐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끝내주는 경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색의 거대한 암석이 땅에서 솟구친 듯 위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양이 촛대를 닮아 촛대 바위라 이름을 붙였다. 아주 먼 옛날 화산 활동이 활발하던 그때 폭발하듯 용암이 터지고 흘러 지금의 암석 모양을 만들었다.
오한결은 자연의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연이구나.’
왜 이곳이 화천 8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는 거의 실신 직전인 최하늘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오한결은 그녀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더 갈 수 있겠어요?”
최하늘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괘…… 괜찮아요. 저……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짐이라도 들어 드릴게요. 가방 주세요.”
최하늘은 가방을 뺏기지 않겠다는 듯이 바짝 끌어안고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전 절대 민폐가 되지 않을 거예요. 저는 할 수 있다고요.”
노을은 최하늘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참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운전을 능숙하게 하는 세련된 스타일의 언니였는데, 등산을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악바리가 되더니 불굴의 투지를 불태우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노을이 최하늘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말했다.
“언니, 리스펙!”
충분한 휴식을 취한 오한결과 일행들은 다시 짐을 챙겨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휴식 덕분인지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의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고 최하늘도 고비를 넘긴 듯 살짝 여유로워 보였다.
최무열이 오한결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렸을 때 여기 오셨으면 기억 안 나지 않아요? 전 꼬맹이 시절에 뭘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 안 나던데.”
“물론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추억 사진이 있잖아. 화질은 좋지 않아도 내가 기억하는 느낌과 사진의 시각적 이미지가 만나는 순간 등산의 경험이 다시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런 멋진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다니 너무 멋진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도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고요.”
최무열이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보자, 오한결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나도 재능 있고 열정적인 너희들을 만나서 무척 기뻐.”
오한결과 최무열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을은 다시 뒤처지기 시작한 최하늘에게 다가가 가방을 뒤에서 밀어주겠다고 말했다. 최하늘이 기겁하며 대답했다.
“아니야! 안 그래도 돼. 나는 할 수 있어.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제발 나를 신경 쓰지 말고 노을이는 주변 풍경을 즐겨줘. 나로 인해 그런 소중한 기회를 잃지 말란 말이야!”
드디어 정상이 바로 앞에 보였다.
오한결은 정상에 우뚝 서서 용화산이 주는 기적 같은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깊고 짙은 숲이 산맥을 따라 굽이굽이 펼쳐진 모습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이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오로지 시각 이미지인 그림만이 태곳적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용화산의 전경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오한결, 노을, 최무열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전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처진 최하늘이 한발 한발 힘겹게 다가와, 결국 정상에 도착했다.
“어머!! 이게 산 정상의 전경이군요. 너무 멋져요! 제 인생 처음으로 산 정상에 올라왔어요. 너무 감격스럽네요.”
최하늘이 울먹이다가 왈칵 눈물을 쏟아 버리자, 노을이 포옹하며 등을 두들겨줬다.
“언니, 정말 대단해요. 언니는 이 풍경을 누릴 자격이 있어요.”
최하늘이 목 놓아 울었다.
“너무 기뻐.”
갑자기 최하늘이 눈물을 닦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 단체 사진 찍을게요. 남는 건 사진이니까.”
모두 홀가분한 기분 덕분인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