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매니저
한소정 큐레이터가 명일문화재단 사무실 문을 열고 얼굴을 슬쩍 내밀자, 이를 발견한 이나영 팀장이 환한 미소와 함께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머! 소정 씨, 어서 와요. 더 예뻐졌네. 비결이 뭐야?”
손사래 치던 한소정 큐레이터가 새침하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팀장님!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요. 자꾸 어려지시면 곤란합니다. 혹시 아직도 20대?”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호호호.”
뒤에서 서성이며 기회를 엿보던 최하늘이 한소정 큐레이터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큐레이터님.”
“최하늘 씨, 자기도 있었구나. 반가워요. 미술관에서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눴네요. 이해하죠? 워낙 정신없었잖아요.”
이나영 팀장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늘 씨? 무슨 일 있었어? 왜 나한테 보고를……. 음, 난 들은 거 없는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차가워지자, 한소정 큐레이터가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그게 뭐 사소한 거라서요. 업무 관련된 것도 아니고.”
이나영 팀장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자, 최하늘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오한결 작가하고 서정익 작가랑 실랑이가 있었어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불쑥 끼어들었다.
“에이, 별거 아니에요. 서정익 작가가 좀 유별나잖아요. 뭐, 공모전 출신 작가 실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약간의 도발을 하더라고요. 호호.”
이나영 팀장이 놀랐다.
“어머! 그건 좀 심했다. 오한결 작가 작품을 보고도 그 말이 나왔단 말이야?”
한소정 큐레이터가 최하늘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어쨌든 잘 마무리됐습니다. 팀장님. 우리 회의 안 합니까?”
이나영 팀장이 호들갑 떨며 최하늘에게 말했다.
“어머! 회의 준비는 다 끝났지? 어서 이사장님 모시고 와요.”
회의실에 자리 잡은 이나영 팀장과 한소정 큐레이터는 여전히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최하늘은 회의 자료를 검토해 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여간 집중하기 힘들었다.
회의실로 들어온 신수진 이사장이 한소정 큐레이터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와우! 한 큐레이터. 오랜만이네. 미술관장님은 잘 지내시고?”
한소정 큐레이터가 자리에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네, 이사장님께 안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 큐레이터 역할이 매우 중요해요. 공모전 접수 심사는 문화재단에서 했지만, 이제부터 오한결 작가를 빛내줄 사람은 바로 한 큐레이터 아닙니까?”
“과찬이십니다. 이사장님. 어차피 아리 미술관과 문화재단은 같은 명일그룹 가족 아닙니까? 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자면 당연히 아리 미술관도 그에 걸맞은 최고 대우를 해줘야죠.”
신수진 이사장이 한소정 큐레이터에게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자, 불안한 이나영 팀장은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이나영 팀장님.”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나영 팀장이 급하게 손을 내리고 대답했다.
“네! 이사장님.”
“그때, 그 막무가내로 찾아온 EBC PD 소식은 없나요?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어요.”
“아직…… 없습니다만,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오한결 작가가 응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한소정 큐레이터가 이나영 팀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이나영 팀장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글쎄, EBC PD가 그림 그리는 방송을 만들 예정인데, 예전 ‘밥 아저씨’ 역할로 오한결 작가를 섭외하고 싶다지 뭐야. 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자가 카메라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몰라도 너무 모르더라.”
곰곰이 생각에 잠긴 한소정 큐레이터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한소정 큐레이터의 말에 신수진 이사장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이를 발견한 이나영 팀장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질문을 이어갔다.
“어머! 한소정 큐레이터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구나. 문화재단 명예도 좀 생각해줘.”
생각에 빠진 한소정 큐레이터에게 이나영 팀장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제가 ‘밥 아저씨’를 엄청 좋아했거든요. 그 방송을 보고 미술학원 다녔고 결국 미대까지 졸업 했잖아요.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갖게 됐고요. 제겐 정말 선물 같은 방송이라서, 오한결 작가가 거기에 나온다면 무척 기쁠 것 같은데요.”
이나영 팀장이 반박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경험을 일반화했네. 그 프로그램의 수준은 딱 거기까진 거야. 오한결 작가는 순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미술 교육자가 아니야.”
한소정 큐레이터도 지지 않았다.
“그럼 방송에서 순수 미술을 하면 되죠. 다른 누구도 아닌 오한결 작가님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나영 팀장님은 굉장히 보수적이시군요.”
한 방 먹은 이나영 팀장은 부글부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감히 이사장 앞에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이사장은 한소정 큐레이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최하늘에게 향했다.
“하늘 씨는 어떤 의견이지?”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지만 이내 오한결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봤다. 공모전 접수 마지막 날에 작품을 접수했던 장면, 시상식장에서 소신을 밝히던 장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장면. 기존 작가들과 다르게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편안해 보였다.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사람이라고 할까.
“오한결 작가님은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에요. 뭐랄까…….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같아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사실 이런 논의 자체가 의미 없는 게, 그분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 같아요. 방송에서 그림을 그릴지는 그분이 알아서 하시면 될 거 같아요. 그분이라면 방송에서 그린 그림도 굉장히 멋질 것 같아서 솔직히 기대가 되긴 하거든요.”
신수진 이사장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최하늘의 얼굴이 상당히 붉어졌다. 신수진 이사장이 피식 웃었다.
“맞아요. 그럴지도……. 오한결 작가 의견이 제일 중요하죠. 그럼 이 문제는 여기까지 하고, 개인전 얘기로 넘어가 봅시다.”
한소정 큐레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했다.
“예전에 보고드린 바와 같이, 아리 미술관에서 문화재단 공모전 당선 작품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원래는 일회성 전시로 계획했는데, 오한결 작가님 작품이 워낙 훌륭해 아리 미술관은 당선 작품을 ‘미술관 창립 20주년’ 특별 전시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신태진 회장님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도 있었고요. 관련 내용은 이미 오한결 작가님과 협의가 끝난 상태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에게 물었다.
“오한결 작가가 많이 바쁘겠군요. 아뜰리에는 마음에 든다고 하던가요? 불편한 사항 얘기하면 무조건 편의를 봐주도록 하세요.”
“그게…….”
이나영 팀장이 머뭇거리자, 신수진 이사장이 되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나요?”
이나영 팀장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문에 의하면, 오한결 작가가 아뜰리에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작업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신수진 이사장과 한소정 큐레이터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종종 작가들의 돌발 행동에 몇 번 데어 본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미술 전시를 하지 못할 경우, 국내외적으로 문화재단과 미술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신수진 이사장이 화를 냈다.
“그걸 왜 이제 말합니까? 당장 오한결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세요!”
최하늘이 눈치를 살피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모두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오한결 작가님은 집에서 작업한다고 하셨어요. 아뜰리에에 안 왔다고 작업을 안 하는 건 아닐 겁니다. 제가 엊그제 통화까지 했는걸요. 딱히 이상한 낌새는 없었어요.”
신수진 이사장의 굳은 표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레 겁을 먹었군요. 그럼 하늘 씨, 오한결 작가 일정 확인해 주시고, 내일 저녁 식사 자리 준비해주세요. 제가 직접 만나봐야겠군요.”
최하늘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내일 식사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오한결 작가는 내일 강원도에 가기로 했거든요. 제가 통화하면서 들었습니다.”
“강원도요? 거기는 왜 가는 거죠?”
“친구들과 등산을 가신다고…….”
이나영 팀장이 아무도 모르게 최하늘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도 같이 가고 싶구나? 그런 거야?”
이나영 팀장은 오한결 작가를 보고 얼굴을 붉히던 최하늘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줌마 오지랖이 청춘 연애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야, 기꺼이 희생해주지!’
이나영 팀장이 이사장에게 말했다.
“최하늘 씨가 오한결 작가의 등산모임에 가면 정말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오한결 작가를 너무 모르고 있으니까, 이렇게 오해가 자꾸 생기는 것 같습니다. 직원 중 한 명이라도 작가와 친해져야 앞으로 업무 진행도 수월할 거 같고요.”
신수진 이사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게 좋군요! 최하늘 씨가 오한결 작가 매니저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일정 논의도 가능하게요. 진작 했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최하늘의 얼굴이 몹시 붉어졌다.
“……매니저요? 근데 친구들하고 등산 가는데, 제가 껴도 될까요? 실례가 될 거 같은데요. 분명 거절하실 거고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미소 지었다.
“전화해보세요. 제가 볼 땐 오한결 작가님은 거절하실 분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사람을 잘 보거든요. 용기를 내보세요.”
“네? 네…….”
* * *
수분을 잔뜩 머금은 신선한 공기가 가득한 이른 아침.
오한결은 아뜰리에 건물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노을과 최무열이 커다란 등산 배낭을 메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한결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야! 여기!”
노을과 최무열도 오한결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근처에 오자 오한결이 말했다.
“이렇게 함께 가줘서 너무 고마워. 혼자는 심심하거든.”
노을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제가 등산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진심으로 언제 한 번 다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했어요.”
최무열이 오한결에게 말했다.
“노을 누나는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해서 완전 강철 체력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작품도 무척 거칠잖아요. 재료들이 다 쇳덩어리. 하하.”
장난 섞인 말에 노을이 바닥에 내려놓은 배낭을 잡고 던지는 시늉을 하자, 최무열이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오한결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거든. 산을 너무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멋진 풍경을 하나 그려 드리려고 해. 그래서 가는 거야.”
노을이 무척 기뻐했다.
“그럼 더 같이 가고 싶어지죠! 오늘 오한결 작가님 옆에서 잘 관찰하려고요. 과연 천재 작가는 어떻게 자연을 관찰하고 그려낼 것인가! 하하.”
오한결이 웃었다.
“그래, 좋은 공부가 되길 바란다.”
한껏 기대에 부푼 최무열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자, 서둘러야 합니다. 이러다가 버스 놓치겠어요,”
오한결이 시계를 보고 말했다.
“잠시만! 일행이 한 명 더 있어. 올 때가 됐는데…….”
노을과 최무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행이요? 누구요?”
“그게, ……저기 왔다!”
저 멀리서 빨간 SUV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오한결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SUV가 미끄러지듯 그들 앞에 정차했다. 곧이어 보조석 창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최하늘이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늦어서 죄송해요. 작가님! 어서 타세요!”
어느새 배낭을 멘 오한결이 노을과 최무열에게 말했다.
“빨리 타! 오늘은 버스 안 탈 거야. 누군지는 차에서 알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