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바츨라프 니진스키
오한결은 노진홍 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어떤 면이 가장 좋아요? 같은 무용수로서.”
잠시 생각에 잠긴 노진홍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중력을 거부하는 그의 몸짓이죠. 깃털처럼 가벼운 그가 땅을 딛고 솟아오를 때면 마치 우주 속을 유영하는 우주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무척 아름답고 경이로운 모습이었죠. 왜 그가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천재로 불렸는지 알겠더라고요.”
오한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와! 실제로 보면 진짜 멋있겠다. 솔직히 아직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없어서…….”
노진홍이 흐뭇하게 웃었다.
“공연 한 번 보세요. 한수 씨도 저처럼 발레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오한결은 노진홍의 대답을 곱씹으며 말했다.
“맞아요. 당시 남자 무용수는 여자 무용수의 보조 역할에 불과했어요. 니진스키 이후 발레리노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1919년 파리 <페트르슈카> 공연에선 기존 발레 형식과 달리 손과 발을 이용한 마임으로 인형의 비통한 감정을 표현했어요. 이처럼 그는 전통 발레의 안무를 무시하고 급진적인 춤동작을 선보였죠.”
노진홍이 몹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잘 알고 계시네요. 그의 안무가 급진적이었다는 건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대단한 거예요. 그 당시 발레가 좀 보수적이거든요.”
오한결이 웃었다.
“니진스키는 논란의 아이콘이었죠. 하나 더 말하자면, 그 당시 남자 무용수들은 반바지 착용이 의무였는데 무대 위에 타이즈 차림으로 등장한 겁니다. 관객들의 거친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공연도 접어야 했죠.”
조용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무척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구나. 타인의 시선보다 예술적 표현을 중시했던 것 같네. 요즘 태어났으면 예술적 영혼에 날개를 달았을 텐데 말이지.”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한 천재는 언제나 그 시대를 넘어서는 법이니까.
“기록에 의하면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어요. 10년 정도 무용수로 활동 후 신경 쇠약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조현병 진단을 받고 보호시설에서 생을 마감했죠.”
노진홍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니진스키의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은 그를 진정한 예술가로 만들었지만, 그 비범함으로 인해 세상과 소통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고 해요. 그는 언제나 외로웠고 불안했고 두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 예민함이 예술적 재능을 빛나게 했을까요?”
오한결이 대답했다.
“음, 그럴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게 광기어린 삶을 살지 않았어요. 니진스키의 경우 워낙 예술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이 가득했고 장르적 특성상 발레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 차이를 좁히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그는 일기를 남겼는데, 예술 평론가는 예술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에고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만을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는 예술을 위한 자신만의 외로운 싸움을 벌인 셈이죠.”
잠시 깊고 묵직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 위대한 예술가의 찬란하고 위태로웠던 삶을 알고 나면 누구나 고개를 숙이는 법이니까.
노진홍은 오한결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오한결 작가님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에요. 예술 지식도 엄청 해박하시고, 예술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도 무척 존경스러워요. 감사합니다. 제게 너무 힘이 됐어요. 당장 연습실로 달려가 발레를 연습하고 싶어요. 정말 미치도록 말이죠.”
오한수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피식 웃고는 병실 가운데로 가서 섰다.
오한수가 팔을 쭉 뻗고는 발끝을 세우고 허리를 곧게 폈다.
“어때요? 이 자세 완전 발레리노 같죠?”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 * *
명일그룹 본사 엘리베이터를 탄 이풀잎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미술 과외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오한결의 제안에 그냥 알겠다고 말한 것뿐인데…….
왜 명일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전화가 온 거지? 설마, 이건 정말 예상 밖……. 아니,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지난번 동창회 때 신태진 회장을 본 적이 있긴 한데 말이지. 같이 노래방에 갔던 충격적인 추억이 있긴 하지만…….
‘그때 나를 괜찮게 봤나? 명일그룹 디자인팀 스카우트 제안인가? 설마!!’
그때, 부드러운 효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양승호 비서가 반듯한 자세로 이풀잎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이풀잎 님. 양승호 비서입니다.”
이풀잎이 양승호 비서를 알아봤다.
“아! 그때 회장님하고 같이 오셨던 그분이시구나. 혹시, 어제 전화하신 분이세요?”
“네, 맞습니다.”
긴장이 풀린 이풀잎이 환하게 웃었다.
“어머! 미리 말씀해주시지. 긴장 좀 풀리게요. 호호.”
이풀잎이 환하게 웃으며 양승호 비서 어깨를 툭 치자, 양승호 비서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변해버렸다.
“…….”
말없이 멀뚱멀뚱 서 있는 양승호 비서에게 이풀잎이 물었다.
“저기 양 비서님……?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린 양승호 비서가 자세를 바로 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네.”
양승호 비서가 회장실 문을 노크한 뒤 이풀잎과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업 회장실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봤지만, 이곳은 이풀잎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곳이었다. 한눈에 봐도 장식품들은 고가로 보였고 웬만한 갤러리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명화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이풀잎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는 노인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양승호 비서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회장님, 이풀잎 님 모셔왔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몸을 돌려 손님을 바라봤다.
“아이고,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소파에 앉은 이풀잎은 자신도 모르게 벽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신태진 회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이풀잎이 마음껏 구경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줬다. 잠시 뒤, 이풀잎은 한 그림에 시선을 고정하고 옅은 탄성을 질렀다.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이잖아요! 제목이 뭐였더라……?”
“<키스>라고 하지요.”
“아!, 맞아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림이 막 움직이네요.”
씁쓸함과 만족스러운 표정을 번갈아 보이던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클림트 그림에 정통한 화가들에게 의뢰해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겁니다.”
“우와! 보면 볼수록 너무 찬란하고 아름다워요.”
잠시 머뭇거린 신태진 회장이 용기 내 말했다.
“오한결 작가는 저 애니메이션이 원본 작품과 다른 해석을 했다고 하더군요. 한 마디로, 잘 못 만든 거죠.”
“네? 한결이가요? 어머, 왜 그랬을까…….”
오한결은 클림트의 <키스>가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거부하는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오한결은 실망한 신태진 회장에게 그림이란 유동적 해석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진정으로 <키스>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어떤 해석도 정답이 될 수 있다는 다소 모호한 말을 남겼었다.
신태진 회장이 물었다.
“저 그림에서 연인의 진정한 사랑이 느껴지나요?”
“네, 당연하죠. 보고 있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걸요.”
이풀잎은 회장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양승호 비서에게 물었다.
“비서님도 저 그림 보면 설레지 않아요? 연애하고 싶은 그림이죠?”
그녀의 말에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양승호 비서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정답일 겁니다. 저도 오한결 작가에게 그렇게 배웠거든요. 하하.”
평소와 다르게 목석처럼 서 있는 양 비서에게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손님께 아직 차도 안 드리고 뭐 하나. 양 비서.”
정신을 차린 양승호 비서가 헐레벌떡 회장실을 나가자, 신태진 회장이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렸다. 어허,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설마…….’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탈이 났나? 손님 앞에서 부끄러웠던 게야. 그래서 얼굴이 붉어졌구먼.’
양승호 비서가 분홍색 차를 들고 들어와 신태진 회장과 이풀잎 앞에 내려놓았다.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양 비서 자네도 앉게나. 이런, 차를 세 잔 가지고 오라고 할걸. 내 것을 자네가 먹게.”
양승호 비서는 미친 듯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이풀잎 옆에 앉은 양승호 비서 얼굴이 다시금 붉어지자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무엇을 먹었기에 저렇게 아파할까? 설사인가……. 지사제 좀 챙겨줘야겠어.
“자네, 괜찮은 거지?”
“네? 저 말입니까?”
“그래 자네. 몸이 안 좋나?”
양승호 비서의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꺼림칙했지만 신태진 회장은 고개를 돌려 이풀잎을 바라봤다.
“이풀잎 님이 저희의 그림 선생님이 되어 주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야 현실을 깨달은 이풀잎이 화들짝 놀랐다.
‘아, 역시……. 스카우트 자리가 아니구나.’
이풀잎은 잠시 명일그룹 디자인팀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한결이가 그림 과외를 하지 않겠냐고 해서 기꺼이 승낙한 건데, 이런 자리인 줄 몰랐어요. 전 정말 가볍게 생각했거든요.”
신태진 회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계속 가볍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네?”
신태진 회장이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오한결 작가님이 이풀잎 님에게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분은 워낙 바쁘시니까, 이해합니다. 그럼 제가 직접 이 자리에서 이풀잎 님께 어떤 부탁을 하고 싶은지 설명해드릴게요.”
신태진 회장이 이풀잎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하찮다 보니, 미술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한결 작가님께 추천을 부탁한 거고요.”
이풀잎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그게, 솔직히 제가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서요. 동네 미술학원에서 강사 하는 입장이라……. 워낙 명화를 즐기시는 회장님 눈높이에 턱 없이 부족할 거예요. 결국, 실망하실 게 뻔 할 거고요.”
“전혀요. 저는 화가가 되려고 배우는 게 아니에요. 그림을 재밌고 즐겁게 그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게 목표입니다. 무엇보다 학창 시절에 잠깐 배웠던 석고 소묘를 다시 그려보고 싶어요. 그 정도면 이풀잎 님이 충분히 가르쳐 줄 수 있지 않나요?”
석고 소묘라는 말에 이풀잎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아하! 석교 소묘를 배우고 싶으신 건가요? 솔직히 그건 제가 좀 자신 있긴 해요. 고등학교 입시 3년에 대학교 4년 그리고 강사 2년 경력까지, 총 9년 가까이 석고 소묘를 배우고 가르쳤거든요. 이제 석고 없이도 완벽히 그려낼 수 있을 정도예요.”
신태진 회장이 껄껄껄 웃으며 양승호 비서를 바라봤다.
“오한결 작가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구먼. 최고의 선생님을 추천해주셨어.”
양승호 비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예쁘고……. 훌륭하신 선생님이십니다…….”
자신감이 붙은 이풀잎이 당당하게 말했다.
“좀 쑥스럽지만, 제가 석고 소묘로 대학을 수석 입학했거든요. 그 어렵다는 아그리파 정면을 기가 막히게 그려냈죠. 수능 점수가 안 나와서……. 원하는 대학은 못 갔지만 그래도 수석 입학은 제 자랑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보내자, 양승호 비서도 얼른 두 손을 모아 힘껏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풀잎은 흥분한 나머지 이불킥이 예상된 말들을 쏟아 낸 자신이 부끄러웠다. 얼른 대화 주제를 바꾸고자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저는 언제든지 좋습니다. 이풀잎 선생님 스케줄에 맞출게요.”
휴대폰으로 스케줄을 확인한 이풀잎이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이번에 입시 반을 하나 더 맡게 돼서요. 다음 주에 하루 정도. 그리고 그 다음 주는 좀 힘들 것 같고…….”
양승호 비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선생님, 그래도 회장님과 약속인데 시간을 비워 주심이…….”
신태진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세!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네. 혹시 제가 미술학원에 가면 바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이풀잎이 놀라 물었다.
“네? 직접 오시겠다고요? 물론……. 오시면 바로 가르쳐 드릴 수는 있긴 한데…….”
“좋습니다. 제가 선생님 일하시는 미술학원으로 가지요. 그림은 미술학원에서 제대로 배워야 또 재밌는 거 아닙니까. 하하.”
이풀잎이 흥분하며 말했다.
“우와, 회장님이 미술학원에 오신다니! 우리 원장님 기절하시겠네요.”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참, 알고 계시죠? 학생은 두 명입니다. 나와 양승호 비서. 이렇게요.”
양승호 비서가 눈을 내리 깔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