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발레 선생님
“역시, 너무 맛있구나. 꼭 고맙다고 전해다오.”
병원 침상에 기대앉은 오준근이 케이크를 만족스럽게 먹으며 말했다.
오한결은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아버지가 불편하지 않게 침상을 정리해 드린 뒤,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게걸스럽게 케이크를 먹고 있던 동생을 한심한 듯 쳐다봤다.
“넌 여기 먹으러 왔냐?”
“형, 먹을 땐 개도 안 건든다고 했어. 신성한 나의 행위를 방해하지 말아줘.”
오늘은 담요를 덮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노진홍 학생을 슬쩍 쳐다보고는 동생에게 말했다.
“내 말은, 혼자 먹어서야 되겠냐는 거지. 어서 노진홍 학생한테도 하나 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 표시하는 노진홍 앞에 오한수가 케이크 한 조각을 덩그러니 놓고는 보호자용 의자로 재빨리 돌아왔다.
오한결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무래도 노진홍 학생의 까칠함 때문에 천하의 오지랖 오한수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듯싶다.
“배부르구나, 한결아 이것 좀 치워주겠니?”
케이크를 다 드신 아버지가 접시를 내려놓자, 오한결과 동생은 아버지가 침대에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아버지가 창밖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날씨가 꽤 좋구나. 햇볕은 뜨거워도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이 부니까, 야외 활동하기 딱 좋겠어. 이런 날씨에 등산가면 참 좋겠네…….”
오한결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세 마리 새들이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오한결이 물었다.
“아버지는 왜 산이 좋으세요?”
“이놈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오한결이 당황했다.
“네?”
“넌 왜 그림을 좋아하느냐? 어서 대답해 봐라.”
“……좋아서요.”
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란다. 산에 오르면 그렇게 좋을 수 없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무척 힘들었잖니. 나를 버티게 해준 것도 사실 산이었단다. 묵묵히 올랐어.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폐 속 공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아 헉헉거릴 때도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또 올랐지. 수많은 나무와 꽃들을 관찰하며 마음을 위로받기도 했지. 정상에 서면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단다. 산은 내게 좋은 상담사였고 힐링의 장소였지. 그래서 너무 좋아.”
오한결은 자연을 관찰하고 느낌을 그렸던 인상파 화가들의 삶을 떠올렸다. 그들은 우리가 부동의 이미지로 인식했던 자연을 시간과 계절 변화에 따른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해냈다.
‘아버지도 인상파 화가처럼 산의 변화와 다양성을 봤던 것일 수도 있겠구나.’
오한결이 나직이 말했다.
“제 예술적 감각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았군요.“
오준근은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보여주었다.
오한결은 창밖으로 먼 산을 보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등산을 통해 느꼈던 그것을 그림에 옮길 수 있다면, 이 답답한 병실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산에 직접 가보자. 그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오한결은 허리를 숙여 아버지께 소곤댔다.
“아버지, 제가 선물 하나 들고 올게요. 기대해주세요.”
아버지는 오한결의 말뜻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저 웃었다.
“저기요, 다 먹었는데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노진홍 학생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깨끗이 비운 접시를 내밀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오한수가 재빨리 접시를 받아들고는 보호자용 의자로 돌아갔다.
오한결이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진홍 학생은 발레 한다고 했죠? 대학생인가요?”
노진홍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국립예술교육원에 다녀요.”
오한수가 소리쳤다.
“우와! 거기 완전 천재들만 가는 곳 아니에요? 대박, 엄청난 실력자였다니.”
노진홍이 피식 웃었다.
“천재도 있더라고요. 근데 전 아니에요. 노력파였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연습에 또 연습만 했죠. 결국 이렇게 발이 망가졌지만요. 이건 발레를 그만두라는 신의 계시인 것 같아요.”
극단적인 노진홍의 말에 오한결은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노진홍의 슬픔에 잠긴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있구나. 도대체 왜 저렇게 방어적일까?
“지난번에 보니까, 어머니는 노진홍 학생이 계속 발레 하길 원하던데요.”
잠시 뜸을 들인 노진홍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어려운 가정 형편인데도 제 고집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요. 유명한 대학에 입학하면 모두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하더라고요. 더는 어머니의 희생으로 발레를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솔직히, 연습량으로 때운 예술은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우리 학교에는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들은 저와 다르게 즐기면서 발레를 하고 있어요. 반대로 제겐 발레는 항상 고통이었거든요. 이제 한계를 인정할 때가 온 거 같아요.”
노진홍의 말을 듣던 오한결은 회귀 전 미친 듯 그림 연습에 몰두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노진홍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누가 오한결의 연습량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그의 방에 산처럼 쌓인 수많은 그림만 봐도 그건 명확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공모전에 떨어졌고 오한결은 모든 걸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한결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천재성은 그의 회귀 전 노력과 전혀 무관한 것일까? 신이 오한결에게 기회를 줬다면, 그건 그동안 오한결이 보여줬던 열정과 헌신에 대한 그만의 특별한 보답이지 않았을까?
오한결은 노진홍 학생을 빤히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예술계에서 실력을 꽤 인정받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 공모전에도 당선됐고요. 아직 도전을 안 했을 뿐이지, 전 세계 어느 공모전이든 마음만 먹으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노진홍이 당황하며 물었다.
“……작가세요? 이름이?”
“오한결이요.”
눈을 동그랗게 뜬 노진홍이 소리를 질렀다.
“아! 너무 잘 알아요. 우리 학교 교수님이 심사위원이었죠? 제가 데이비드 오 교수님 수업을 수강하고 있거든요. 예술이론인데 전공 필수과목이라……. 교수님께서 오한결 작가님 얘기를 수업시간마다 해줬어요. 한국에서 드디어 천재가 나왔다고요. 그런 대단한 분을 제가 만났다고요? 세상에!”
노진홍이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자, 오한결이 말을 이었다.
“노진홍 학생의 말을 들으니, 발레를 하기엔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것 같군요. 사실 저도 쉬운 환경은 아니었어요. 노진홍 학생처럼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요. 무엇보다 경제적인 사정이 좋지 않아 물감 하나 구하기 어려웠죠. 졸업 후 저를 이끌어줄 선후배와 교수도 없었고요. 오로지 혼자 해야 했어요.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공모전에 당선되지 못했죠.”
노진홍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건이 어떻든 저도 작가님처럼 실패하고 말 거에요.”
“저는 과거 얘기를 했을 뿐, 지금은 완전히 다르죠. 저는 성공의 아이콘이 됐어요.”
“!!.”
“물론 실패하지 않고 단번에 성공했다면 정말 좋았겠죠. 하지만 저는 과거에 그렇게 처절한 실패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능력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 편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보세요. 하늘도 감동해서 이렇게 멋진 능력과 기회를 주었잖아요. 그러니까 노진홍 학생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처럼 열심히 해보세요.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오한결의 말에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노진홍이 눈시울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오한결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죠. 노진홍 학생이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겁니다.”
노진홍의 코끝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끄러운지 재빨리 눈물을 닦은 노진홍이 말했다.
“그래도 더는 어머니를 고생시킬 수 없어요. 불효자가 된 것 같아 미치겠다고요.”
잠시 생각하던 오한결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제가 아르바이트 제안을 하나 하죠.”
“네? 알바요?”
오한결이 동생을 바라봤다.
“너의 연극 동아리는 무용 안 배워?”
“우린 뭐든 다 배우고 싶지! 근데 어떻게 배워? 누가 우리를 가르치겠어. 대학교 동아리에다가 이름도 없는 극단인데.”
오한결이 말했다.
“내가 레슨비 내줄게. 대신 반드시 노진홍 학생에게 배우는 거로!”
동생이 뛸 듯이 기뻐했다.
“진짜! 대박! 나야 땡큐지! 와, 발레라니……. 이러다가 나도 발레리노 되는 거 아냐? 아, 걱정된다. 배우다가 재능 있으면 무용수로 전향해야 하나. 뭐 어때, 하면 되지. 우하하.”
오한결이 멍한 표정을 짓던 노진홍을 바라봤다.
“제 동생이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데, 단원들에게 무용을 좀 가르쳐주세요. 레슨비는 두둑하게 챙겨드릴게요.”
“……정말 그래도 되나요? 제게 왜 이렇게까지…….”
오한결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노진홍 학생을 위해 그런 거 아니에요. 여기 내 동생 놈에게 발레를 가르쳐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부담 갖지 마세요.”
오한수가 쪼르르 다가가 노진홍과 악수를 나눴다.
“맞아요. 한결이 형은 오로지 저를 위하는 마음뿐이에요. 물론 돈도 많고요. 아무튼 너무 잘됐습니다, 진홍 씨. 저 진짜 발레 배워보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연기자는 몸놀림이 유연해야 하는데 제가 몸으로 하는 연기가 많이 뻣뻣해서요. 어디서 들으니까 무용을 하면 많이 좋아진다고 하더라고요.”
노진홍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악수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오한수가 워낙 세게 잡고 있어 그대로 손을 잡은 채 대답했다.
“맞아요, 연기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겁니다.”
오한수가 만세를 부르며 좁은 병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버지가 정신 사납다고 소리치자 동생은 풀이 죽은 얼굴로 보호자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한수가 물었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빌리 엘리어트’거든요. 아시죠?”
노진홍이 대답했다.
“당연하죠. 워낙 유명한 영화잖아요? 11살 꼬마 아이가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를 배워 우여곡절 끝에 발레리노로 성공하는 얘기잖아요. 저도 그 영화 좋아해요. 100번은 봤는걸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영화의 장면과 대사가 그대로 떠올라요.”
오한결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발레를 결심했나요?”
“아니요. 다른 계기가 있었어요.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어느 유명 발레리노의 삶을 보게 됐죠. 그가 춤을 출 땐 세상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너무나 멋져 보였어요. 나도 하고 싶다,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져 이렇게 여기까지 왔네요.”
“발레리노 이름이 뭐였나요?”
“잘 모르실 거예요. ‘바츨라프 니진스키’요. 발레를 모르는 분들에겐 무척 생소한 이름이에요.”
오한결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무용가로 평가받는 러시아 발레 무용수이자 안무가. 아닌가요?”
“우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바츨라프 니진스키라면 저도 잘 압니다. 그를 보고 발레를 꿈꿨다면 노진홍 학생은 충분히 발레를 할 자격이 있는 거예요. 그런 역사적인 인물에 끌렸다면 단순히 춤이 좋아서 시작한 것 이상으로 발레를 향한 마음이 큰 것이니까요.”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오한수가 짜증을 냈다.
“두 사람 뭐지? 왜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그렇게 심도 있게 하고 있냐고. 빨리 설명해줘요. 나도 알고 싶단 말이야!!”
아버지도 입을 열었다.
“한결아, 나도 궁금하구나. 왜 그 사람이 유명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