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아뜰리에 유령
툭. 툭. 툭.
굵은 빗줄기가 아틀리에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다.
노을과 최무열은 작업실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빗물로 얼룩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새 붉은 태양은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반대편 건물에는 층마다 아늑한 불빛이 아른거렸다.
우르르 쾅!
섬광이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뒤를 이었다.
노을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이 그래서 작업실에 안 오셨구나. 아버님이 다치셨다고? 우리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최무열이 고개를 저었다.
“형님이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잖아. 우리한테 부담 주기 싫은가 봐.”
“그래도…….”
“어쩌겠어. 형님 의견도 존중해줘야지.”
우르르 쾅!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더니 거친 바람이 창문을 연신 흔들어댔다.
노을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근데, 여기 되게 무섭다. 빈 건물에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냐?”
최무열도 찜찜했지만 태연한 척 말했다.
“아닐걸, 입주 작가들이 꽤 있는 거로 아는데. 우리가 있는 층이 아직 공사 중이어서 더 으스스한 듯.”
우르르 쾅!
“엄마야!!”
천둥소리에 노을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최무열이 노을을 보고 키득거리자, 화가 난 노을이 그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 아파. 알았어. 미안해. 근데 웃긴 걸 어떡해.”
노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오늘 오한결 작가님하고 함께 하려 했던 작업장 세팅부터 하자. 그나저나 우리에게 아리 미술관 개인전 작품 제작을 도와달라고 하다니, 정말 꿈만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오한결 형님은 완전 외계인 같아. 어떻게 기적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날까. 하긴, 실력만 보면 당연한 결과지만. 아,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노을과 최무열은 그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던 작업실을 말끔히 정리하고 꾸미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대충 던져 놓은 미술 재료들과 그가 집에서 가져온 작품들을 작업실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들을 물티슈로 깔끔히 닦아댔다.
노을과 최무열이 입주 선물로 가져온 간접 조명까지 달고 나니, 작업실 환경이 무척 따스하고 포근하게 바뀌었다.
작업을 마친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파에 기대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을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말했다.
“와, 예쁘게 잘 꾸며졌다. 내 옥탑 작업실도 이렇게 꾸며야 할 텐데…….”
“아참, 누나! 오한결 작가님이 작업실 같이 쓰자고 했었어. 정말 멋지신 분이야. 개인전 보조 작가도 시켜주고. 아, 하늘같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멋진 작품으로 보답해야지. 그럼 나도 개인전 보조 작가니까 이제 수시로 여기 올 수 있겠네. 어쩐지 이상하게 잘 꾸미고 싶어지더라니.”
피식 웃은 최무열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누나, 배고프지 않아? 몸을 좀 움직였더니 엄청 출출하네.”
“이 건물 옥상에 카페 있던데. 거기 갈까? 내가 쏠게!”
“좋지!”
노을이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들렸다 가자. 화장실이 어디지?”
“복도 끝에 있던데.”
노을이 작업실 문을 열자마자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복도 불이 다 꺼졌잖아. 정전인가? 완전히 공포영화는 저리가라인데.”
문 사이로 고개를 쑥 내민 노을은 좌우를 살피며 화장실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희미한 비상구 계단 불빛 덕분에 복도 끝이 살짝 보이긴 했지만 묵직한 어둠이 깔린 복도는 여전히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음산하고 기괴해 보였다.
아직 전기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천장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굵은 전기선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곳도 보였다.
노을이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최무열을 바라봤다.
“무열아, 화장실 같이 가면 안 될까? 너도 갈 때가 됐잖아…….”
우르르 쾅!
“끼약!!!”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려오자 놀란 노을이 소리를 꽥 질렀다.
휴대폰 손전등을 든 노을과 최무열은 어두운 복도를 뚫고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잔뜩 긴장한 노을은 최무열의 팔을 꼭 붙잡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최무열이 짜증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겁이 많아. 귀신같은 건 없어.”
“누가…… 무섭대. 난 그저 신중할 뿐이라고…….”
동굴 같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 끝에 다다르자, 휴대폰 손전등이 나가버렸다. 최무열이 머쓱하게 말했다.
“내가 잘 못 눌렀나. 꺼져버렸네. 요기서 꺾으면 화장실 바로 있어. 어서 가봐.”
바로 그때, 검은 형체 하나가 복도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났다. 분명 사람의 형체였다. 머리는 오랫동안 감지 않았는지 떡 진 듯 뭉쳐 있었고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와 홀쭉한 볼살은 어렴풋이 해골의 형태와 매우 유사해 보였다.
그것은 너무 놀라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노을과 최무열을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갔다. 마치 매일 해오던 일인 것처럼.
멍하니 그 형체를 바라보던 노을이 벌벌벌 몸을 떨며 말했다.
“뭐지……. 오페라의 유령 같은 건가? 이 건물에 억울한 혼령이라도 사는 건가? 야! 최무열 귀신 없다며!”
“누나, 여기가 해리포터가 다니던 호그와트 마법학교야? 무슨 혼령이야…….”
그 형체는 오한결의 작업실 바로 옆 작업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무열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저 사람이 서정익 작가네. 그의 작업실이 오한결 작가님 바로 옆이라고 들었거든.”
노을은 그의 해괴한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굉장히 이상한 작가네. 가까이하지 말아야겠어…….”
* * *
아트화랑에 모인 오한결, 노을, 최무열.
“우하하하.”
지난밤 해프닝을 듣던 오한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노을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불 꺼진 복도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더라고요.”
최무열이 거들었다.
“더 이상한 건 우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도 안 하고 작업실에만 있다고 하더라고. 들어보니 씻지도 않나 보네. 하여튼, 굉장히 독특하고 이상한 작가인 것 같아. 성깔도 좀 있고 말이지.”
노을이 팔짱을 끼고 투덜대며 말했다.
“작업하는 건 좋은데. 왜 그렇게 좀비처럼 하고 다니는 거지? 그 사람 때문에 그날 밤 악몽 꿨잖아요.”
오한결은 홍미숙이 직접 만든 수제 쿠키를 아삭 씹으며 말했다.
“아뜰리에 사무실에 말할게. 복도 전기 안 나가게 해달라고. 한 번만 더 나가면 노을이 가만 안 둔다고 경고해야겠네. 하하.”
노을도 수제 쿠키를 손에 들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서정익 작가 또 마주치면 어쩌죠?”
“걱정하지 마. 작업실 밖으로 잘 안 나온다니까. 어제는 운이 나빴을 뿐이야.”
“……과연.”
잠시 뒤 아트화랑 문이 열리고, 젖은 우산을 든 홍철수 사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산을 고이 접어 구석에 세운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을 보고는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어이구, 한결 학생 왔구나. 얘기는 들었네. 아버님이 다치셨다고?”
“손목 골절인데, 수술이 잘 돼서 지금 회복 중이세요.”
“저런 어쩌다가…….”
“하산 도중에 미끄러지셨다고……. 어머니에게 많이 혼나고 계십니다, 하하.”
홍미숙이 홍철수 사장 목소리를 듣고는 다용도실에서 급하게 나왔다.
“오빠, 오셨어요? 어머, 다 젖었네. 밖에 비가 많이 오나 보네요.”
“그러게, 우산도 소용없더라고. 미숙아, 한결 학생에게 그거 줬어?”
“어머, 내 정신 좀 봐. 지금 줄까요? 잠시만요.”
어리둥절한 오한결을 향해 홍철수 사장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님께서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해서. 미숙이가 아침부터 당근 케이크를 만들었지 뭐야.”
홍미숙이 케이크가 담긴 붉은 박스를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거 병원에 계신 아버님께 드려. 출출할 때 간식으로 드시면 좋을 거야.”
오한결이 케이크를 두 손으로 들고 말했다.
“너무 감사해요. 아버지가 정말 좋아할 거예요.”
노을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감동적이네요. 미숙 언니는 마음씨도 너무 예뻐요.”
홍미숙이 노을에게 윙크를 했다.
“고맙다. 오늘 저녁은 피자 준비했거든. 다들 먹고 갈 거지?”
노을과 최무열이 동시에 외쳤다.
“네!! 당연하죠!”
* * *
아뜰리에 근처 카페.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손님들은 끊임없는 수다를 떨고 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오한결과 양승호 비서는 한눈에 봐도 어색해 보였다.
양승호 비서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가님 바쁘신데, 이렇게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오한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직 바쁘진 않습니다. 근데 무슨 일로?”
“그게……. 회장님께서 부탁을 하나 하셨어요.”
“부탁이요? 무슨 부탁?”
긴장 때문에 입이 바짝 마른 양승호 비서가 단숨에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오한결은 비서의 갑작스런 이상 행동에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슨 까다로운 부탁이 있으려나…….
어색한 침묵을 깨고 양승호 비서가 용기를 냈다.
“회장님께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하십니다.”
오한결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에이, 난 또 뭐가 있나 싶었네요. 회장님은 미술에 관심이 많으시니까, 당연히 그림을 직접 그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겠죠.”
긴장이 풀린 양승호 비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작가님은 이해하시는군요. 바쁜 작가님께서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회장님이 후원하는 몇몇 작가들은 부탁만 하면 짜증내고 심지어 갑질도 서슴지 않으니까요. 워낙 예민한 사람들이라 말 걸기도 쉽지 않습니다.”
오한결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갑질이요? 작가가 양 비서님께 갑질할 게 뭐가 있나요. 이상한 사람들이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면서 무슨 작품을 한다고.”
오한결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양승호 비서가 말을 쏟아 냈다.
“제가 겪은 일인데요, 물론 아직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만. 회장님이 후원하는 K작가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제 전화를 받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었어요. 후원금을 받으려면 예술활동 계획서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거 제출하라고 한 것뿐인데, 저보고 자본주의 노예라고 하면서 짜증내고 욕하고……. 나중에는 세상 끝난 것처럼 울어버리더군요.”
“작가들이 예민한 구석이 있긴 한데, 그건 좀 개인적인 성격 문제 같은데요. 회장님 앞에선 그 작가도 얌전하지 않나요?”
“맞아요! 와, 작가님 도사시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경험이죠. 아무튼, 유독 그 작가가 예민한 것 같네요.”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양승호 비서는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경험상, 작가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10배는 예민한 것 같더라고요. 근데 오한결 작가님은 달라요. 딱히 예민한 구석이 전혀 없잖아요. 언제나 전화를 상냥하게 받아 주시고, 약속을 잡으면 항상 바쁘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림은 언제 그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뜰리에는 거의 비어있고요. 여유롭고 능력 있고. 참 신기해요…….”
양승호 비서가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급히 멈췄다.
“……죄송합니다.”
오한결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재밌네요. 네, 맞아요. 양 비서님 말이 다 맞아요. 그러니까 죄송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회장님 그림 배운다는 소식 전하려고 한 거예요?”
양승호 비서가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미술 선생님을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 회장님이 부탁하신 겁니다…….”
“미술 선생님이요? 음……. 무슨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요?”
“석고 소묘요. 회장님께서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한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딱 적당한 친구가 있어요. 대학 동기인데 미술학원 강사예요. 그 친구가 석고 소묘를 기가 막히게 했거든요.”
“오,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회장님 혼자 배우시는 거죠?”
“……아뇨.”
오한결은 의외의 대답에 놀라 물었다.
“그럼 학생이 몇 명인가요?”
양승호 비서가 얼굴을 붉혔다.
“저까지 두 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