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밥 로스
오한결과 최무열이 루비처럼 빛나는 아뜰리에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최무열은 조심스레 손끝으로 대리석 벽면을 만져보며 말했다.
“여긴 5성급 호텔보다 더 멋진데요. 역시 돈이 최고구나…….”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최무열이 오한결의 캐리어를 낚아채며 말했다.
“이제 제가 들게요. 오늘 작업실로 짐 옮긴다고 해서 도와주려고 왔는데. 이렇게 뻘쭘하게 할래요? 근데, 생각보다 짐이 많지 않네요. 가볍네.”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집하고 아뜰리에 둘 다 이용할 거라서. 간단한 짐만 챙겨왔어.”
“와……. 이렇게 좋은 곳인데. 나 같음 완전 여기서 살 듯.”
“작업실 공간이 넓으니까, 무열이도 같이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최무열이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정말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문화재단에는 내가 말해놓을게. 어차피 내 개인전 준비 때문에 수시로 작업실에 와야 하잖아.”
“형님! 오늘 점심 제가 쏘겠습니다.”
오한결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오, 그럼 햄버거 먹을까? 아까 보니까 건물 근처에 있던데.”
작업실에 도착하자, 최무열이 소리를 지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채광이 좋은 작업실은 마치 잡지에서 잘 연출된 사진처럼 근사해 보였다. 꼼꼼하게 구석구석 살피던 최무열은 뒤늦게 오한결을 도와 짐을 풀었다.
짐 정리가 다 되어가자, 최무열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빨리, 식사 가시죠. 너무 배고파 손이 떨려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간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주문한 햄버거가 나오자 최무열은 입안 가득 햄버거를 집어넣고 무지막지하게 씹어 삼켰다.
최무열이 티슈로 입을 닦은 후 말했다.
“작업실 완전 대박이던데요. 아직도 소오름…….”
오한결도 햄버거를 씹어 삼킨 후 말했다.
“중요한 건 작가의 역량이지. 장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하긴……. 여긴 좀 외로울 거 같아요. 전 학교에서 작업해서 항상 친구들하고 같이 있거든요. 그래도 자주 올게요. 단점보다 장점이 백배는 많은 거 같으니까요. 하하. 근데 옆 방은 누가 쓰고 있어요? 불은 켜져 있던데.”
오한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정익 작가. 근데 작업실 밖으로 잘 안 나온대.”
“헐, 그 사람 요즘 완전 핫하던데. 친해지고 싶다.”
“안 마주치는 게 좋아. 시한폭탄 같아서 언제 폭발할지 몰라. 성격이 까칠해.”
“헉. 피해 다녀야겠다. 하하.”
오한결과 최무열이 동시에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커억, 트림하는 최무열을 재밌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문득 창밖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최무열도 그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뭐지, 저 아저씬. 한결 형님하고 아는 사이에요?”
“아니, 처음 보는데.”
남자가 햄버거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오한결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혹시, 오한결 작가님?”
오한결이 주춤하며 말했다.
“네……. 맞는데요. 절 아시나요?”
남자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지갑에서 명함 꺼냈다.
“사진하고 똑같이 생기셨네. 안녕하세요, 저는 EBC 김명호 PD입니다. 꼭 뵙고 싶었습니다. 작가님.”
명함을 손에 쥔 오한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EBC? 교육방송이요?”
김명호 PD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는 주로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미술 소재로 방송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작가님처럼 훌륭한 예술가를 섭외하는 게 무척 중요한 일이라서요. 직접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어 이렇게 불쑥 찾아오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흥분한 최무열이 끼어들었다.
“한결 작가님, 한 번 해봐요. 그런 방송에 대학교수들이 많이 나오거든. 작품 평론하고 인터뷰 정도만 해주던데. 나름 재미있을 듯.”
김명호 PD가 최무열의 말을 잘랐다.
“그런 따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저희는 이번에 무척 흥미로운 기획을 했죠. 혹시 ‘밥 아저씨’를 아시나요? 한때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미국 화가였는데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시면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오한결이 대답했다.
“잘 알죠. 화가 밥 로스. 뉴욕에서 작업할 때 그의 그림 스킬을 참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림을 그립시다> 방송이 인기가 많았던 거로 아는데, 아마 세대가 달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최무열이 깜짝 놀랐다.
“뉴욕?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하하.”
“……뭐지, 이 찜찜함은? 수상한데?”
최무열의 말을 무시한 김명호 PD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오한결을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오한결 작가님이 밥 로스처럼 카메라 앞에서 그림을 그려줬으면 합니다. 프로그램이 성공한다면, 오한결 작가님은 엄청난 인기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떤가요? 저희 제안이?”
최무열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으악!!”
밥 로스(Bob Ross)는 군인 출신으로 알려진 미국 서양화가이다. 그는 둥글게 부푼 헤어스타일과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 그리고 셔츠 앞주머니에 청설모를 넣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EBC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밥 아저씨’로 이름을 알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느긋하고 관대한 태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Wet on Wet’ 기법을 이용하여 30분 안에 그림을 완성했는데, 그것은 처음 바른 도료가 마르기 전에 다음 도료를 바르는 방식이다. 마른 후 칠하는 전통 유화 방식과 달리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덧칠해가며 붓과 나이프로 우연성을 강조한 기법이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복잡한 풍경화의 질감을 단숨에 완성할 수 있다.
밥 로스는 미술의 대중화를 이끈 20세기 가장 상징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그는 유화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페인팅은 어렵다는 인식을 깨뜨렸다. 무엇보다 그림에 관심 없던 사람들까지 TV 앞에 앉게 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EBC에서 밥 로스 방송을 방영했다.
“참, 쉽죠?”라는 그의 대사가 유행했는데, 입이 떡 벌어지는 그림을 그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따라 해보라는 그의 능청스러운 말투에 사람들은 흥미를 느꼈다.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하는 모든 말은 긍정적이고 행복한 에너지를 줬으며, 아직도 밥 아저씨를 좋은 추억으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오한결은 김명호 PD 제안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썩 그리 밝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조사를 해보셔서 아실 텐데요. 밥 로스는 자신을 미술 교육자로 생각했어요. 수많은 예술가가 짧은 시간 안에 그림을 그리는 그를 비난해도 그가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죠. 그는 단순하게 대중들이 미술에 호기심을 가지길 원했던 것뿐이에요. 하지만 전 다릅니다. 저는 예술 하는 사람이고, 방송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순 없어요.”
김명호 PD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순수 예술가는 ‘미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 미술 교육자와 다른 길을 걷나요?”
오한결은 ‘미술의 대중화’라는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건 아닙니다만…….”
김명호 PD가 얼굴을 들이밀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오한결 작가님과 함께 대한민국에 미술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의 취미가 그림 그리기가 되고, 미술관 가는 게 일상인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밥 로스와 비슷하게 그릴 필요는 없겠죠?”
“물론이죠! 오한결 작가님 스타일대로 하시면 됩니다.”
김명호 PD가 오한결을 설득했다는 생각에 긴장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제안을 수락하시는 겁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오한결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고민을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실망한 표정 숨기지 못하던 김명호 PD가 말했다.
“네…….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작가님. 꼭!”
쓸쓸히 사라져가는 김명호 PD를 보면서 최무열이 말했다.
“좋은 기회인 거 같은데. 해보지 그래요? 재밌을 거 같은데.”
오한결이 시간이 지나 눅눅해진 감자튀김을 입에 물고 말했다.
“흥미로운 제안이긴 한데, 개인전 준비도 해야 하잖아. 일정이 빠듯해. 그리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고민이 더 필요해 보여.”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최무열이 창밖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라,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다! 여긴 무슨 일이지? 혹시 한결 형님 만나러 온 거 아니에요?”
오한결이 급히 콜라를 마신 뒤 말했다.
“아니, 오늘 약속 없는데. 서정익 작가 만나러 온 게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도 모던아트 인터뷰했었는데.”
“맞아, 부산 벽화로 인터뷰했었지.”
“네, 모두 한결 형님 덕분이죠. 하하.”
오한결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모두가 만든 결과였지.”
* * *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깜빡 잠이든 오한결이 부스스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박선희가 돋보기를 끼고 구부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머니, 무슨 책을 그렇게 읽고 계세요?”
박선희가 돋보기를 벗고 피곤한 눈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들이 유명한 화가가 됐는데, 나도 미술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오한결이 어머니 손에 들린 책 표지를 바라봤다.
<예술의 역사>
오한결은 책 제목을 보고 놀랐다. 대학에서 교재로 활용하는 수준 높은 교양서적이었다. 어머니께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더 앞섰다.
“어머니, 눈도 안 좋으신데 글씨만 가득한 책을 어떻게 읽으시려고…….”
당황한 어머니가 말을 흐렸다.
“내가 뭘 아니…….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어. 덜컥 샀지 뭐야.”
민망한 표정으로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나도 그림을 기대했는데 하나도 없네…….”
“아마도 대학 교재다 보니 많이 팔린 책으로 나올 거에요.”
어머니가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그렇지? 도저히 못 읽겠더라. 내가 잘 못 샀어.”
“공부 안 하셔도 돼요. 제 그림을 이해하는데 이론 공부는 필요 없거든요.”
“그래? 아니다. 이왕 시작한 거 공부해 보련다.”
“……그럼, 제가 사진 많은 책 사드릴게요. 읽기 편한 거로요.”
“그래, 부탁한다. 아들!”
박선희가 텔레비전을 켜자, 오한결은 김명호 PD가 제안한 미술 교양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방송만큼 영향력이 큰 것도 없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누구나 미술을 즐길 수 있는 방송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작가로서 상당히 뜻깊은 일일 것이다.
“어머니, ‘밥 아저씨’ 기억나세요? 폭탄 머리하고 그림 그리던 사람이요.”
박선희가 손뼉을 치며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얼마나 재밌게 봤는데. 그림을 뚝딱 그리던 모습이 참 신기했지.”
어머니의 환한 표정을 보며 오한결이 물었다.
“그 사람 덕분에 사람들이 그림을 좋아하게 됐다고 하던데요?”
“그럼. 이건 비밀인데, 나도 그때 물감하고 스케치북을 샀잖니. 그림 좀 그려 볼까 하고.”
“그래요? 꽤 흥미롭네요.”
밥 로스의 영향력은 역시 대단했구나. 미술의 대중화를 이끈 교육자다웠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오한결은 언제나 예술가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정말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일까?
오한결이 조심스레 물었다.
“EBC 그림 그리는 프로그램에 출연 제의가 왔어요.”
“어머! 공모전 당선되니까 그런 좋은 기회도 오는구나?”
‘좋은 기회……. 역시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럼……. 방송에 출연해 볼까요?”
박선희가 오한결의 머뭇거림을 눈치채고 말했다.
“한결아. 고민이 된다는 건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증거 아닐까?”
“그렇죠……. 그래도 어머니가 원하면 할게요.”
박선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바라는 건 한결이가 건강하고 행복한 거란다. 네 인생의 선택은 너의 몫이야. 그다음 내가 할 일은 한결이의 모든 결정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거란다.”
오한결이 방긋 웃었다.
“네. 더 고민해 볼게요.”
박선희가 채널을 돌리며 재밌는 방송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박선희 휴대폰이 울려댔다. 박선희가 한 손에 리모컨을 들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경부대병원입니다! 오준근 씨 보호자 맞으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