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변수
명일그룹 회장실 소파에 양승호 비서가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신태진 회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두 잔을 들고 양승호 비서에게 다가갔다. 긴장한 표정의 양승호 비서가 두 손으로 넙죽 회장이 주는 차를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신태진 회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고맙네. 문화재단 공모전 때문에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힘들었지? 그동안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 얘기하게. 이제 나이를 먹었더니 눈치가 점점 없어져. 얘기 안 하면 잘 몰라. 하하.”
양승호 비서는 서운한 건 전혀 없다고 말하고는 신태진 회장의 얼굴을 살폈다.
오한결 작가가 공모전 당선된 이후 신태진 회장은 항상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양승호 비서는 오한결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신태진 회장이 소파에 편하게 등을 기댄 채 말했다.
“오한결 작가에게 부탁한 그림은 좀 늦게 받아야겠어. 개인전 준비로 상당히 바쁜 것 같더군. 아쉽지만 내 욕심만 차릴 수 없지 않은가.”
갑자기 다운된 분위기를 살리고자 양승호 비서가 용기 내어 말했다.
“저도 오한결 작가님 덕분에 그림의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솔직히 예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예술은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만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난 주말에 혼자 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말이죠. 하하.”
신태진 회장이 놀란 표정으로 양승호 비서를 바라봤다.
“오호, 재밌군. 어땠나 전시는? 마음에 들었나?”
양승호 비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예전보다 작품을 볼 때 어떤 느낌이 생긴 거 같아요. 분명 이해하긴 힘든데, 어떤 울림이 느껴지더라고요. 무엇보다 다른 작가들 작품을 보니까, 왜 오한결 작가님이 대단한 예술가인지 알 것 같았어요. 오한결 작가님 작품 앞에서 느꼈던 전율을 또 느끼긴 힘들더라고요.”
신태진 회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도 이제 예술의 세계에 입문한 걸세. 축하하네.”
양승호 비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예술의 세계라뇨…….”
소파에서 일어선 신태진 회장이 뒷짐을 지고 벽에 걸린 그림들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전에 말했듯이,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
“네…….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예술가는 되지 못했지만,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게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지. 자연스레 예술가를 후원하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
신태진 회장은 지난번 오한결과 논쟁을 벌였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작품 앞에 서 멈춰섰다.
“근데 채워지지 않아. 물론 후원은 나를 기쁘게 하지만……. 왜 이렇게 공허함을 느끼는 걸까? 내 몸 어딘가 커다란 구멍이 있어 삶의 에너지가 새는 것 같아.”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휙 돌려 양승호 비서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우리도 그림 배워볼까?”
“!!”
양승호 비서가 놀란 나머지 말을 못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양 비서도 그림 그리고 싶지? 그렇지?”
양승호 비서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회장님, 저는 그림을 너무 못 그려서요. 미술에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소질 운운하면 안 되지. 그리고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개성만 드러내면 예술이 되는 세상 아닌가.”
신태진 회장이 허공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겼다.
“학교 다닐 때 미술부 활동을 한 적이 있다네. 그곳에서 석고 소묘를 배웠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내 주특기는 쥴리앙이었어. 친구 몇몇은 미대 진학을 하기도 했단 말이지. 솔직히 내가 제일 잘 그렸는데, 미대는 꿈도 못 꿨지. 나는 가업을 물려받아야 했거든. 그게 내 운명이었어.”
“석고 소묘라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눈치 없이 말을 툭 뱉은 양승호 비서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신태진 회장이 그 말을 듣고 능글맞게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말이 통하는구먼. 그럼 나랑 같이 석고 소묘를 배워보게나.”
신태진 회장이 진심으로 행복해하자, 양승호 비서가 체념하듯 대답했다.
“제 그림 실력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하하.”
“그건 내가 할 소리! 벌써 부끄럽구먼. 십 년만 젊었어도…….”
“그럼 강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오한결 작가에게 추천을 받아 볼까? 그가 직접 가르쳐주면 너무 좋겠지만 그건 좀 힘들겠지……. 그럼 그의 지인이라도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네만. 인연은 이렇게 넓히는 거라네.”
양승호가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오한결 작가를 만나보겠습니다. 회장님.”
“좋아, 아주 좋아.”
* * *
오한결과 최하늘이 아리 미술관을 다시 방문하자, 한소정 큐레이터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지난번엔 경황이 없었네요.”
오한결이 멋쩍게 웃었다.
“저와 서정익 작가 때문인데요. 그날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한소정 큐레이터는 오한결과 두 번째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친화력을 발휘하여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수다를 지켜보던 최하늘은 소외감을 느끼며 물었다.
“큐레이터님, 작가님 개인전 일정이 나왔나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말이죠. 변수가 생겼어요. 계획한 일정 모두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변수요? 근데 일정 변경은 문화재단과 먼저 상의를 하셔야 하는데요.”
“물론 그래야죠. 오늘 최하늘 님 오시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최하늘을 대신해 오한결이 물었다.
“그 변수란 게 뭐죠? 작가가 도울 수 없는 건가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방긋 웃었다.
“그 변수는 말이죠. 오한결 작가님 작품이 너무 훌륭해서 생긴 겁니다.”
“네??”
“애초 계획은 문화재단 요청대로 공모전 당선작을 전시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오한결 작가님 작품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우리 아리 미술관은 그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색다른 기획으로 하반기 아리 미술관을 대표하는 전시로 만들 예정입니다.”
최하늘이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어머! 아주 잘됐네요. 문화재단도 무척 좋아할 겁니다. 제가 오늘 팀장님께 바로 보고 드릴게요!”
오한결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리 미술관에서 생각한 전시 방향이 있습니까?”
“아직이요, 먼저 오한결 작가님께 의견을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오한결이 말했다.
“전시장을 둘러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전시장은 이미 배정이 돼 있거든요.”
한소정 큐레이터는 그들을 이끌고 3층 5전시실로 향했다. 전시실 입구에 도착한 오한결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불 꺼진 전시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환하게 불이 켜지자, 오한결은 상당히 넓은 전시 공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은 공모전 당선자를 위한 일회성 이벤트 장소가 아니었다. 아리 미술관 대표 전시가 열리는 장소인 게 분명해 보였다.
“꽤 넓군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아리 미술관은 오한결 작가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오한결이 말했다.
“불 좀 다시 꺼주시겠어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불을 끄자 전시장 입구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 보일 뿐, 그곳은 어두운 동굴처럼 깊은 어둠에 잠겨버렸다. 오한결이 천천히 전시실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모두 그의 검은 형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한결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작품 <그리움, 다시 시작>을 떠올렸다. 칠흑 같은 어두운 공간은 우주로 변했고 잠시 뒤, 반짝반짝 별들이 천장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영원한 별을 상상하며 <그리움, 다시 시작>을 그린 오한결. 김환기 작가가 <우주>를 완성하기 위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하루 10시간씩 점을 찍는 고된 작업을 고수했듯이, 오한결은 화려한 삼각지 화랑거리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삼각지 사장님들의 간절함 마음을 사흘의 밤샘 작업을 통해 별로 옮겼었다.
오한결이 뒤를 돌아보자, 빛을 등진 사람들이 보였다.
“제 작품 배경은 별이 반짝이는 광활한 우주입니다. 제 작품이 이곳 전시장에서 입체적으로 살아나길 바랍니다. 제가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는 반짝이는 우주를 전시장에 온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요.”
한소정 큐레이터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순간 오한결 머릿속에서 신태진 회장의 <키스> 작품이 스쳐 갔다. 작품 속 주인공 남녀가 서로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키스하는 애니메이션.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시장 모든 면을 스크린으로 둘러싸면 가능할 것 같네요. 그리고 제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 예정입니다. 이 전시에 온 모든 사람은 어디를 바라보든 광활한 우주를 느낄 수 있게 말이죠.”
한소정 큐레이터가 바로 대답했다.
“오, 멋진 아이디어 같네요. 오한결 작가님 작품이 평면에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거군요.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관객들은 작가님 작품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을 겁니다.”
“바로 그거에요. 진짜 우주처럼 모든 사람을 품을 겁니다.”
최하늘과 한소정 큐레이터는 각자 자신만의 우주를 상상하며 어두운 전시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 *
오한결이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한 노을과 최무열은 홍철수, 홍미숙과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한결을 먼저 발견한 노을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오한결 작가님! 이쪽으로 빨리~!”
홍미숙이 말했다.
“지난번 ‘청년 아트 페스티벌’에 전시된 노을 작품이 눈에 띄었는지 경기도 문화예술원에서 연락이 왔대. 노을을 후원하고 작품도 전시하고 싶다고.”
노을이 은근슬쩍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페스티벌에서 인기투표를 했는데, 내가 2등 했어. 뭐, 일 등하고 거의 차이도 안 났대. 호호호.”
오한결은 노을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 최무열의 어두운 안색을 살폈다.
최무열은 노을처럼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미대생이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확인시켜줄 작품을 너무나 원했다. 아마도 작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보고 싶은 간절함이 더 컸을 것이다.
최무열이 불쑥 말했다.
“나도 할 말 있어! 공공미술에 도전해보려고!”
최무열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침묵이 이어지자, 노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멋지다! 나는 무열이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믿어.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언제든 달려갈게!”
“고마워. 누나는 진짜 멋진 사람 같아.”
최무열이 오한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결 형님처럼 재능이 뛰어난 사람 눈에는 제가 답답해 보일 거예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반드시 멋진 예술 작품을 만들 겁니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오한결이 대답했다.
“전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무열이는 훌륭한 예술가 지망생이야.”
오한결은 최무열의 결연한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미대 입시부터 예술대 진학까지. 한국 미술 교육의 엘리트 과정을 밟은 최무열의 최대 단점은 부족한 예술적 감각이었다.
‘정말로 성실함만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오한결은 최무열이 자신의 편견을 깨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시원하게 음료수를 들이켠 오한결이 노을과 최무열에게 말했다.
“아리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했어.”
“와! 대박.”
“꺄악!”
“두 사람 시간 되면, 개인전 준비를 도와줄래? 영상으로 만들 거라, 도움이 절실해!”
노을과 최무열이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두 손을 맞잡고 소리를 질렀다.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