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청년 아트 페스티벌
오한결, 노을, 최무열은 벤치에 앉아 따끈한 큐브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불룩한 배를 문지르던 최무열이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왔다.
“자, 내가 쏘는 거야.”
노을이 두 손으로 커피잔을 잡고 흐뭇하게 전시장을 바라봤다.
“저기 작품 중에 내 작품도 있다. 이게 다 한결 작가님 덕분이야.”
오한결이 노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난 조언만 했어. 작품을 완성한 건 노을이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최무열이 조용히 말했다.
“근데,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별로 안 오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플리마켓과 푸드트럭을 선호하는지, 그곳 주변에만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반면, 예술 전시장 부근에는 몇몇 사람들의 드문드문 발길이 이어질 뿐이었다.
노을이 다소 무안해하며 말했다.
“이번 행사는 축제잖아. 놀고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미술품 전시에 사람들이 적은 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난 정말 괜찮아.”
최무열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쪽에 관객 참여형 전시가 있던데 가볼래?”
오한결과 노을, 최무열은 피아노가 설치된 작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한결이 작품을 살피며 말했다.
“재밌겠는데. 노을아 피아노 칠 줄 알아?”
노을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 유리로 만든 투명한 피아노에 앉았다. 능숙하게 손가락을 푼 노을은 캐논 연주곡을 기가 막히게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건반 음에 맞춰 피아노 색깔이 변했다. 빨주노초파남보. 화려하게 빛나는 피아노를 발견한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진 노을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오한결과 최무열도 그녀를 향해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노을의 권유로 세 사람은 플리 마켓을 둘러봤다. 한참을 구경하던 노을은 곰 캐릭터가 그려진 휴대폰 케이스 앞에 서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너무 예뻐!!!”
최무열은 투덜거렸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아우, 다리야!”
해가 어둑해질 무렵, 노을의 폭풍 쇼핑에 모두 지쳐갈 때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을아!!”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보자, 환하게 웃는 홍미숙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니!!”
노을과 홍미숙은 마치 수년 만에 재회한 사람들처럼 두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다. 노을이 말했다.
“언니는 내가 초대했어. 작품도 구경하고, 축제도 즐기시라고.”
오한결이 말했다.
“누나, 잘 오셨어요. 여기 즐길 게 많아요.”
홍미숙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나 이런 곳 처음 와봐. 사람도 많고, 예쁜 가게도 많고, 어머! 푸드트럭도 있네.”
“언니, 배고프세요? 하나 사 드릴까요?”
“아냐, 우선 노을 작품부터 구경해야지. 그게 우선 아니겠니?”
“어머! 감동! 제가 안내할게요. 호호. 그리고 이따가 버스킹 공연도 있대요. 공연 보고 가실 거죠?”
“당연하지! 꺄악! 넘 기대돼.”
홍미숙과 노을은 팔짱을 끼고 작품 전시장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한결과 최무열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김명호 PD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방송국 복도 끝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거칠게 회의실 문을 열자, 자료를 검색 중인 김 작가가 놀라 소리쳤다.
“어머! 깜짝이야. PD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김명호 PD가 자리에 앉고는 거칠게 말했다.
“제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프로그램 말아먹은 게 모두 내 책임인가? 원래 EBC는 교육방송이라고. 왜 시청률을 따지고 지랄이야! 프로그램의 질을 봐야지.”
김 작가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솔직히 너무 재미없긴 했어요. 시청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죠.”
김명호 PD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박 PD 그놈이 만든 어린이 심리 프로그램이 동 시간대 1위를 했잖아. 국장님이 그놈을 얼마나 칭찬하던지, 내 귀가 다 아프더라. 국장님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입사 때부터 줄곧 무난하게만 가자고 했던 분 아니었나!”
김 작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시대가 바뀐 거죠. 요즘 EBC 프로그램도 달라지고 있어요.”
“……그래도 난 박 PD 인정 못 해.”
“솔직히 우리 프로그램보다 내용도 알차고 재미까지 있잖아요. 인정할 건 인정하시죠. PD님.”
“……가끔 보면 김 작가는 누구 편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뼈 때리는 말은 하여간 잘해요……. 좋은 아이템 없어? 우리도 예전처럼 실력 발휘 좀 해보자고.”
한때 김명호 PD도 천재적인 감각의 소유자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입사 초기에 잠깐이었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의 과거는 모두에게 잊히고 말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김명호 PD는 꼰대 마인드를 갖게 됐고, 지금은 재미없는 프로그램 한 두 개 만들면서 방송국에서 겨우 버티고 있다.
이것저것 검색하던 김명호 PD가 우연히 김 작가 SNS를 보게 됐다.
“어라, 멋진 그림을 올렸네. 김 작가가 직접 그린 거야?”
김 작가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디자인을 전공해서요. 좀 그립니다. 호호.”
김명호 PD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 작가! 우리 대박 날 것 같아.”
“네? 갑자기요?”
김명호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림 그리는 예술 프로그램 만들어 보자. 예전에 ‘밥 아저씨’ 기억나지? 그런 프로를 만들어 보는 거야. 어때? 재밌겠지?”
“어머! 추억 돋네요. 저 어렸을 때, 그거 보려고 EBC 틀고 기다렸거든요. 제목이 <그림을 그립시다>였을 거예요.”
김명호 PD가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기획해 보자. 그림만큼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잖아! 한국판 ‘밥 아저씨’를 만들어 보자고.”
“그럼, 실력이 뛰어나야 할 텐데요. 유명한 작가를 섭외하려면 엄청난 제작 비용이 들 거고…….”
“뭘 걱정해! 신인 작가를 찾으면 되잖아!”
인터넷을 뒤지던 김 작가가 기사를 꼼꼼히 읽고 말했다.
“최근 명일문화재단이 공모전을 했네요. 1명 뽑았는데……. 오! 다행히 신인 작가예요. 이름은 오한결이라고 하네요. 당선된 작품이 국내외 예술계에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나 봐요. 우와, 관련 기사도 엄청나네요. 해외 언론도 극찬하고 있어요.”
“좋았어! 때마침 천재 신인 작가도 나타났단 말이지.”
“근데……. 섭외되겠어요……?”
김명호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명일문화재단에 다녀올게. 공모전 담당자를 만나봐야겠어!”
* * *
똑. 똑. 똑.
이나영 팀장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이나영 팀장이 잠시 머뭇거리자, 신수진 이사장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죠?”
“그게……. EBC PD가 문화재단에 찾아왔는데요…….”
“방송국 PD가요? 무슨 일로?”
“그게……. 오한결 작가를 섭외하고 싶다고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네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신수진 이사장이 말했다.
“섭외요? 인터뷰를 원하는 건가요?”
“……아니, 그게요. 피디가 좀 황당한 제안을 하네요. 90년대 인기 프로였던 <그림을 그립시다>를 아세요? 밥 아저씨라는 푸근한 인상의 화가가 나와서 그림을 그렸던 방송이고, 상당히 인기가 많았어요. 피디가 비슷한 포맷으로 방송을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 출연자로 오한결 작가를 섭외하고 싶다고 하네요.”
신수진 이사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우리 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자를 그림 방송에 출연시키겠다고요? 지금 제정신입니까?”
이나영 팀장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저도 같은 말을 했죠. 공모전 당선자가 비록 신인이지만, 수준 높은 예술가로 대접받는 작가라고요. 근데 계속 고집을 부리네요.”
신수진 이사장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이건 문화재단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감히 재단 공모전 당선자에게 그런 제안을 하다니. 앞으로 오한결 작가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일 천재 작가란 말입니다. EBC PD 지금 어딨습니까?”
“회의실에 있습니다만……. 설마 직접 만나시려고요?”
신수진 이사장의 표정이 결연하다.
“물론이죠.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김명호 PD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제안에 무척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담당 팀장은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을까?
방송만큼 신인 작가 홍보에 도움 되는 게 또 어딨겠는가. 자신을 귀한 손님 대접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찜찜한 느낌을 주다니. 일단 상급자한테 보고해야 한다고 하니, 기다릴 수밖에…….
김명호 PD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시청률 1등을 상상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신수진 이사장의 압도적인 아우라에 김명호 PD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신수진 이사장이 냉정하게 말했다.
“신수진 이사장입니다.”
김명호 PD는 몹시 놀랐다. 신수진 이사장이라면,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의 막내딸 아닌가? 일개 공모전 당선자를 섭외하는 자리에 왜 이사장이 나타난 거지? 설마,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왔나?
김명호 PD가 기분 좋게 말했다.
“EBC 교육방송 PD 김명호입니다.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PD님께서 오한결 작가가 그림 그리는 방송에 출연하길 원한다고요?”
“네, 맞습니다. 저희도 신인 작가를 쓰는 리스크가 있지만, 그래도 기성 작가보다 신선하다는 생각에 아주 긍정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문화재단도 만족하실 겁니다. 신인 작가가 방송에 나오면 쉽게 얼굴을 알릴 수 있어 상당한 홍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하.”
신수진 이사장이 화를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오한결 작가가 방송에서 뭘 하게 되나요?”
“풍경화 위주로 그림을 그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저희가 그림 샘플을 주면 그대로 연습해서, 카메라 앞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그리면 됩니다. 대사도 있는데, 그건 방송작가가 써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뭐……. 카메라 앞에서 풍경화를 그린다고요?”
김명호 PD가 눈치 없이 말을 이었다.
“풍경화를 그릴 자신 없으면, 다른 것도 됩니다. 오한결 작가님이 잘 하시는 거로 하면 돼요. 혹시 그림 실력이 부족하면 저희가 전문가를 붙여서 속성 그림 과외를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산이 더 들어가겠지만, 감수해야 한다면 그래야죠.”
신수진 이사장이 폭발했다.
“피디님!!! 지금 장난합니까!!”
“!!”
“오한결 작가는 수천 대 일을 뚫고 당선된 국내 최고 실력자입니다. 문화재단에서 찾아낸 최고의 예술가이고요. 외국에서도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런 작가가 한낱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림을 그린다고요? 앞으로 오한결 작가의 그림이 수십억에 팔릴 수도 있을 텐데요?”
김명호 PD가 분노를 삭이며 생각했다.
‘한낱……. 지금 한낱이라고 그랬나? 와, 이런 갑질은 또 처음이네…….’
김명호 PD는 신수진 이사장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성공 열쇠는 바로 오한결 작가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리고 신수진 이사장의 엘리트주의적 발상에 은근 반발심이 생겼다.
“그렇군요. 오한결 작가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
“무슨 권한으로 문화재단이 오한결 작가 섭외를 거절하는 겁니까? 적어도 오한결 작가에게 물어는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수진 이사장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압니까?”
김명호 PD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 제가 직접 출연 의사를 묻겠습니다. 오한결 작가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세요.”
신수진 이사장이 당황했다. 사실 공모전 당선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문화재단이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인 건 사실이니까.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나영 팀장이 정중하게 말했다.
“피디님.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작가 개인 연락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김명호 PD가 화를 냈다.
“개인정보! 좋습니다. 그럼 오한결 작가는 문화재단에 언제 옵니까? 기다렸다가 만나야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시간이 아주 많군요!”
“문화재단에 오시진 않습니다. 아뜰리에에 머물며 작업하고 있거든요.”
김명호 PD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아뜰리에요?”
이나영 팀장은 자신이 실수한 것 같아 창백한 얼굴로 변명을 이어갔다.
“아니, 아뜰리에도 안 갈 겁니다. 문화재단 창문으로 바로 보이는 건물이라 제가 수시로 보거든요. 최근 한 번도 작업실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 아뜰리에가 문화재단 바로 옆에 있습니까?”
엉겁결에 말실수를 한 이나영 팀장이 신수진 이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신수진 이사장은 한숨을 푹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한 건 건졌다는 표정으로 김명호 PD가 기분 좋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나영 팀장은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려고 생각을 쥐어 짜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한 마디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