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아리미술관
며칠 후, 문화재단 실무진 연락을 받은 오한결이 재단 건물 앞에 도착했다. 시상식은 끝났지만 여전히 건물 외벽 대형 스크린은 남아 있었고, 화면에 오한결의 사진과 작품이 번갈아 보였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오한결이 당당하게 건물 입구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 사원이 오한결을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이나영 팀장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저는 작가 지원업무를 맡은 이나영 팀장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저랑 같이 일하는 최하늘 사원이고요.”
오한결은 최하늘을 알아봤다.
“그때 작품 접수하시던 분?”
최하늘은 오한결을 멍하니 바라봤다.
‘접수 마감 10분 전에 헐레벌떡 달려온 남자잖아? 솔직히 그땐 얼굴이 이렇게까지는 눈에 안 들어왔는데 근데 왜 지금은 잘생겨 보이지……?’
오한결의 멋진 수상 소감이 환청처럼 들려오자, 최하늘의 얼굴이 붉어졌다.
최하늘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이나영 팀장이 묘하게 웃었다.
‘어머! 지금 나 뭐 감지한 것 같은데!’
“네, 저 맞아요…….”
최하늘이 이사장님을 모셔오겠다고 말하며 급히 사라지자, 이나영 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작가님, 우선 회의실로 가실까요? 이사장님도 곧 오실 거예요.”
세 사람이 어색하게 회의실에 앉아 있는데, 똑딱똑딱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사장님 오셨나 보네요.”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실 문을 거칠 게 열고 들어오자, 짙은 향수 냄새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오한결이 천천히 일어나 당당하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한결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은 오한결의 노련한 표정과 행동에 살짝 당황했다. 수많은 프로젝트에서 신인 작가들을 만나봤지만 한 번도 자신에게 먼저 악수를 청한 작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움과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신수진 이사장입니다. 오늘은 간단한 상견례 자리예요. 작가님 바쁘신데 우리가 시간을 많이 뺏으면 안 되겠죠?”
오한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오늘 시간 많습니다.”
“잘 됐군요. 그나저나 우리 직원들하고 인사 나누셨죠?”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한결 작가님은 우리 문화재단의 자랑이자, 한국 예술의 미래입니다. 지금 국내외 예술계와 언론의 시선이 오한결 작가님을 향하고 있어요. 어떠신가요? 셀럽이 되신 소감이요.”
오한결이 살짝 미소지었다.
“좋습니다. 기회를 주신 문화재단에 감사할 따름이고요.”
흡족한 표정을 짓던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을 쳐다봤다.
“오한결 작가님께 말씀드리세요.”
이나영 팀장이 손에 든 자료를 오한결 앞에 내려놓았다.
“창작지원금 1억은 이번 주 내로 입금될 예정입니다. 공모전 상금은 기타소득이기 때문에 4.4% 세금인 440만 원 공제하게 됩니다. 실수령액은 9천 5백 6십만 원입니다. 서류 하단에 계좌번호와 세금 신고 시 필요한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주세요. 아, 그리고 여기 개인정보 동의서도 작성해 주시고요.”
펜을 건네받은 오한결이 계좌번호를 적으며 중얼거렸다.
“아, 세금……. 공모전 당선은 처음이라 생소한 게 많네.”
이나영 팀장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공모전 당선자에겐 단독 개인전, 국내외 레지던시 그리고 아뜰리에가 제공됩니다.”
오한결이 자료를 꼼꼼히 읽어 본 후 물었다.
“개인전은 어디서 하죠?”
신수진 이사장이 흡족한 미소로 대답했다.
“아리 미술관입니다.”
오한결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리 미술관은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의 뜻에 따라 2000년 겨울, 서울에 개관 후, 항상 최고 수준의 전시로 국내외 예술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곳이다.
한국의 전통과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대한민국 대표 미술관.
아리 미술관은 예술가들에게 꿈의 무대라고 불린다.
회귀 전 오한결이 뉴욕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에야, 그에게 전시를 제안했을 정도로 아리 미술관은 예술적 자존심을 지키는 곳이었다. 아쉽게도 오한결은 다른 미술관과 계약이 돼 있어 아리 미술관과 인연을 맺지는 못했다. 사실 못내 그 점이 아쉬웠었다.
“아리 미술관이라, 좋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끼어들었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릴 게 있어요. 아리 미술관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오한결 작가님 개인전을 20주년 기념 전시로 할까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에 오한결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상당히 좋은 기회네요.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명일그룹 회장님께서 추천하셨어요. 솔직히 저도 반대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옳은 선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한결 작가님께서 좀 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주셔야 할 듯합니다. 아시겠어요?”
“…….”
“오늘 여기까지 하죠. 참고로 해외 출장이 잦을 겁니다. 우리 문화재단이 해외 예술단체와 MOU를 많이 맺어서요. 가능하면 작가님과 함께 출장을 가려고 합니다. 해외 어느 도시를 좋아하시나요? 출장 장소 정할 때 참고할게요.”
오한결이 당황했다.
“음……. 뉴욕?”
“오, 뉴욕 좋죠. 다른 곳은요?”
“……공식적으론 해외에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느 곳이든 좋아요.”
“……네?”
회의가 끝나자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이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나영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완전한 국내파잖아? 내가 아는 작가들은 모두 금수저라 해외에서 조기 교육을 받거든. 그게 상식 아니겠어? 또 한 번 나의 상식을 깨는 오한결 작가님…….”
최하늘이 몰래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멋진 거 같은데요.”
이나영 팀장이 곁눈질로 쳐다봤다.
“어머! 이제 확실하군.”
“……네?”
“내일 오한결 작가랑 아리 미술관 방문하는 거 최하늘 씨 혼자 가세요.”
“정말요?”
“어머! 좋아하는 것 봐. 청춘 로맨스라니. 설렌다. 호호호.”
“…….”
* * *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도착한 오한결.
저녁도 먹지 않고 침대에 기절하듯 드러누워 버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오한결이 희미하게 웃었다.
‘문화재단 직원들은 참 흥미롭네.’
특히 세상일에 관심 많아 보이는 이나영 팀장. 옆에서 지켜보니 공과 사를 잘 구분 못 하는 것 같던데. 부하직원에게 사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최하늘 사원이라고 했나. 무척 고단한 직장 생활일 수도…….’
오한결은 그녀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그때, 불현듯 울리는 휴대폰 문자 알람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노을: 좋은 소식을 전합니당!」
「최무열: 오, 뭘까. 기대된다. 나는 좋은 소식 언제 전하나…….」
「노을: 뭐야! 미안하게.」
「최무열: 농담이야. 하하. 무슨 소식이야?」
「오한결: 오, 좋은 소식이라면 무조건 환영이지. 빨리 말해줘.」
「노을: 드디어 나도 전시한다! 서울시 ‘청년아트 페스티벌’에 내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어!」
「최무열: 우와, 그때 그 해골? 바니타스 작품?」
「노을: 맞아. 안 될 줄 알았는데. 호호호.」
「오한결: 이야! 너무 잘 됐다. 작품을 인정받았다는 얘기잖아. 그건 정말 대단한 거야.」
「최무열: 또 부럽다……. 근데 청년아트 페스티벌이 뭐야? 약간 생소한데.」
「노을: 복합 문화 행사 비슷한 거야. 일주일 동안 진행하는데. 공연, 푸드트럭, 플리마켓, 예술 전시 등 완전 다양한 행사로 꽉 차 있어. 아, 장소는 국회의사당 앞마당이고!」
「최무열: 대박. 재밌겠다. 누나 작품은 언제 전시돼?」
「노을: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들 올 거지?」
「오한결: 당연하지!」
「최무열: 빨리 가고 싶어서 현기증 난다.」
「노을: ……뭐래.」
「오한결: 왜 어지러워?」
「최무열: 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유머인데…….」
* * *
오한결이 택시에서 내리자, 유연한 곡선의 아리미술관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건축물로 인정받는 아리미술관.
건축가가 외국인이라는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이런 훌륭한 미술관을 한국에 세운 명일그룹에 다시 한번 놀랐다. 예술에 진심이 없다면 형식적인 사업만으론 이런 훌륭한 건축물을 짓지 못했을 것이다.
낮은 대리석 계단을 올라 입구에 다다르자,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최하늘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기에요, 작가님.”
“안녕하세요, 최하늘 씨. 여기서 기다리신 거예요?”
최하늘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리미술관이 처음이시면서요. 그럼 제가 안내해야죠.”
쑥스러운 듯 오한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최하늘 씨가 아리미술관 관리도 하나요?”
최하늘이 수줍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리미술관 전시 담당자는 한소정 큐레이터에요. 지금 사무실에 계실 거예요.”
바람이 건물 사이사이를 지나 입구를 거칠게 스쳐 가자, 최하늘의 원피스가 춤을 추듯 맹렬하게 펄럭였다. 얼굴이 붉어진 오한결이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별관을 바라봤다.
“모든 건물이 다 예술작품이군요.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맞아요. 저도 올 때마다 너무 크고 멋져서 놀라요.”
오한결과 최하늘이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비행기 내부 같은 로비가 나타났다. 천장과 바닥에 설치된 독특한 조형물 또한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무척 신선하고 창의적인 첫인상이었다.
오한결이 고개를 들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재밌네요. 마치 비행기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천장과 바닥에 스크린을 깔고, 입체적으로 공간을 연출했네요. 굉장히 독특하군요.”
“매주 컨셉이 달라요. 이곳은 어떤 공간이든 연출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놀이동산에 온 것 같죠?”
최하늘이 미소짓자 오한결도 같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층 사무실 앞에 도착한 오한결과 최하늘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 유리벽 회의실에서 이야기하던 세 사람이 인기척을 느끼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급하게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안녕하세요, 오한결 작가님. 이렇게 뵙게 돼 영광입니다. 저는 한소정 큐레이터입니다.”
한소정 큐레이터는 아나운서 같은 말투에 상당히 도시적인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오한결은 한소정 큐레이터가 내민 손을 잡고 간결하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한결입니다.”
최하늘이 회의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큐레이터님, 회의실에 계신 분이 데이비드 오 교수님 맞죠? 공모전 심사 때문에 문화재단에서 뵈었거든요.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예요?”
“개인전 준비 때문에, 서정익 작가님하고 같이 오셨어요.”
서정익 작가라는 말에 오한결이 흥미를 보였다. 최근 서울시립 미술관에서 본 그의 작품이 떠올랐다. 그는 신화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청년 예술가이지만 어떤 이유로 미래에 자취를 감추고 마는 작가 아닌가? 오한결은 그의 실물이 궁금해 회의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데이비드 오 교수와 서정익 작가가 회의실에서 나와 오한결 앞에 섰다. 데이비드 오 교수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야, 여기서 만나네요. 데이비드 오입니다. 공모전 당선을 축하드려요. 아주 월등한 실력으로 당선된 건 알고 계시죠? 제가 심사위원이라서 아주 잘 알고 있죠. 하하.”
오한결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악수를 받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과찬에 부끄럽군요.”
“겸손하기까지! 하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과 서정익 작가를 번갈아 쳐다봤다.
“혹시 두 사람 구면인가요?”
오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봅니다.”
서정익 작가는 오한결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오한결이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이 까칠함은…….’
한소정 큐레이터가 데이비드 오 교수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은 개인전 때문에 오셨어요. 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자는 아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기로 되어 있거든요.”
서정익 작가가 피식 웃으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웃기고 있네.”
“…….”
서정익 작가의 말에 놀란 한소정 큐레이터가 오한결의 눈치를 살피더니, 급히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했다.
“데이비드 오 교수님도 다음 달에 아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시거든요. 서정익 작가님의 전시도 기획 중이고요.”
오한결은 한소정 큐레이터의 말을 무시한 채 서정익 작가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서정익 작가님은 뭐가 그리 웃긴가요?”
서정익 작가가 한쪽 입술을 억지로 끌어당기듯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서 왜 개인전을 하지? 공모전 당선자면 완전 신인일 텐데. 아리미술관은 작가들의 자존심이란 말이야. 공모전 실력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고. 망신당하기 전에 개인전은 포기하는 게 나을 거야.”
데이비드 오 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서정익 작가! 어찌 그런 무례한 말을! 오한결 작가에게 사과하세요.”
오한결이 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교수님.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난번 시립미술관에서 서정익 작가 작품을 봤거든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오호라, 같은 작가로서 통하는 게 있었나 보죠? 그럼 다행입니다. 역시 작가는 작품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서정익 작가의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요?”
“작품에서 심리적 아픔이 보이더라고요. 사실, 그 부분이 우려스러우면서도 가장 마음에 들어요. 어쩌면 그게 예술가의 기질이잖아요. 슬프게도요.”
서정익 작가가 소리쳤다.
“그 말은 제가 미쳤단 말인가요?”
오한결이 말했다.
“아뇨.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