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34화 (34/202)

제34화 공모전 시상식

어둑한 밤이 찾아오자 펜션 곳곳에 설치된 조명에서 따스한 불빛이 번져 나갔다.

마당을 둘러싼 조명은 이곳을 유럽의 여느 카페처럼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만들었다.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은 준비해온 재료로 요리를 했고 김일중 사장은 마당에서 바비큐를 굽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 모두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며 그들의 식사 준비를 도왔다.

김일중 사장이 노련한 솜씨로 불판 위 고기를 뒤집자, 황홀한 냄새에 끌린 노을과 최무열이 조용히 다가와 행복한 표정으로 고기 몇 점을 얻어먹었다.

모두 각자 먹을 음식을 커다란 접시에 담고는 마당 한가운데에 설치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풀잎이 샐러드를 포크로 집으며 오한결에게 물었다.

“공모전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 대충 실력을 짐작하긴 했는데……. 근데 이건 너무 충격적인걸. 어떻게 된 거야? 잠깐 산책하러 나가서 그린 그림치고는 너무 잘 그렸잖아.”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난 그저 바다를 보면서, 윌리엄 터너의 마음을 짐작했을 뿐이야. 그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어. 쉽게 생각하면 돼.”

샐러드를 먹지 못한 채 이풀잎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쉽다니. 근데 그림 제목은 정했어?”

“아직 가제이지만 생각해놓은 게 있지.”

“궁금하네. 알려줄 수 있어?”

“<바다>로 지었어. 무척 직관적인 그림이잖아. 제목 또한 그랬으면 하거든.”

최무열이 산처럼 쌓은 바비큐 접시를 조심히 들고, 오한결 곁으로 슬쩍 다가와 앉았다.

“이풀잎 누나는 오한결 형님하고 대학교 동문이잖아요. 한결 형님은 학생 때 어땠어요?”

이풀잎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엄청 노력파였지. 동기 중에 순수 미술을 하겠다고 한 건 한결이가 처음이었을걸. 그만큼 열정이 대단했어. 그래서 이렇게 멋지게 성공한 거 같아.”

차승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림 실력은 솔직히 평범했잖아. 오히려 풀잎이가 더 잘 그렸던 것 같은데. 근데 오늘 보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라. 어떻게 된 거야? 한결아?”

오한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벼락이라도 맞았나 보지. 하하하.”

노을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적이 일어난 거죠. 간절히 원하고 그만큼 노력하면 하늘이 응답한다고 생각해요. 한결 작가님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게 아닐까요?”

차승현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노력이라…….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윌리엄 터너 화풍으로 바다를 스케치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정말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인 거냐고?”

노을이 차승현을 노려보자, 분위기가 상치 않음을 느낀 오한결이 차승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게 기적이 일어난 건 맞아. 하지만 노력도 굉장히 많이 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미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냥, 네 그림이 너무 훌륭해서.“

오한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기분 하나도 안 나쁘니까. 그동안 사물과 빛을 보는 훈련을 꾸준히 해왔어. 무엇보다 어쩌다 보니, 암기력이 많이 좋아졌거든. 내 머릿속 어딘가에 윌리엄 터너가 바라봤던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기회가 돼서 그걸 끄집어냈을 뿐이야.”

오한결은 언젠가 자신의 천재적 능력에 대해 친구들에게 설명할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노을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예술가의 노력이 기적의 능력을 낳을 수 있다는 그녀의 굳건한 믿음을 어찌 깨트릴 수 있겠는가?

오한결의 천재적 능력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가 작가로서 수많은 위대한 작품을 남길 것이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삶의 변화를 맞이한다면 그것도 그 능력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홍철수 사장이 수제 맥주를 한 잔씩을 돌리자, 분위기는 금세 풀렸다. 모두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후 한순간도 입을 닫지 않고 왁자지껄 수다를 떨었다.

마지막으로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의 공모전 당선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짧지만 즐거웠던 그들의 엠티 첫날이 막을 내렸다.

* * *

문화재단 대강당에서 명일문화재단 제1회 아티스트 공모전 시상식이 열렸다.

문화재단 건물 외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오한결의 얼굴과 작품 사진이 번갈아 나오고 있다.

건물 주변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는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고급 세단들이 건물 입구에 잇달아 정차하자, 국내외 예술계와 정재계 인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국내외 문화·예술 언론들이 총출동하여 경쟁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번쩍. 번쩍. 번쩍.

셔터 소리가 들리자, 명품으로 치장한 거물급 인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언론에 자신을 최대한 노출하고 있었다. 이런 대형 시상식이야말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각인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대형 고급 세단이 당당한 기세로 건물 앞에 정차했다.

오한결과 그의 가족이 차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오한결을 알아보고 플래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동생 오한수는 자신 있는 포즈를 취하며 마치 주인공인 듯한 행동을 보였다.

오한결이 타고 온 세단은 오늘 아침, 신태진 회장이 보낸 차였다. 그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동생 오한수가 세단을 보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기뻐하는 바람에 오한결은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시상식 시간이 다 되어 가자 대강당에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몇몇이 속닥거렸다.

“공모전 시상식을 이렇게 호화스럽게 하다니, 참 별일이군. 역시 대기업에서 하니까 뭔가 다르긴 달라.”

“명일그룹 회장실에서 국내외 유명 인사들에게 초대권을 돌렸다고 하지 않던가. 어찌 그걸 거절해. 명일그룹과 등을 진다는 건 한국에서 활동을 포기하는 거와 같지. 당선자가 누구라고? 오…….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똑딱, 똑딱.

선명하게 들리는 구둣발 소리.

신수진 이사장이 붉은 정장을 입고 중앙 무대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명일문화재단 이사장 신수진입니다. 먼저, 한국 예술을 이끌어갈 재능있는 한 청년 예술가의 공모전 수상을 축하하러 오신 국내외 귀빈분과 언론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오자, 신수진 이사장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명일문화재단은 상당히 많은 사업을 합니다만, 그중 한국의 유능한 예술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공정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 소수 예술가에게 그 혜택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몇몇 미디어가 신랄하게 이 부분을 비난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엔 공모전 당선자를 한 명을 뽑았더니 그 비난이 너무 세서 좀 아프더군요.”

“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제1회 명일문화재단 아티스트 공모전은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예술 공모전 역사상 지원자가 삼천 명에 이르렀으며 신인만이 아니라, 기성 작가들도 대거 참여했습니다. 당연히 참가자들의 작품을 평가할 최고의 심사위원들을 모시는데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며 긴장을 고조시킨 신수진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님.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 교수님. H대 심수빈 교수님.”

한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예술가의 이름이 불리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하나의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이미 언론을 통해 당선자가 누군지 알고 계실 거로 생각됩니다만, 오늘 시상식장에서 여러분께 정식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참, 잊을 뻔했네요. 제가 행사 진행을 보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말이 많아서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람들이 웃음이 들렸다.

“시상식 진행을 맡아 주신 유미진 아나운서를 소개합니다.”

단정한 외모의 아나운서가 등장 후 정확한 발음으로 시상식을 진행했다.

VIP 소개와 시상식 후 기자회견 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행사 내용을 전달했다.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의 짧은 축사를 끝으로 드디어 오한결의 차례가 왔다.

아나운서가 수상자 이름을 부르자, 오한결이 강당으로 올라가 상패와 꽃다발을 수령했다. 기자들이 앞다퉈 무대 근처로 다가와 그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오한결이 수상 소감을 말하기 위해 무대 중앙에 서자,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오한결을 향했다.

오한결은 잠시 숨을 고르고 빼곡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회귀 전 수많은 공모전에 불합격하여 낙담하던 그때가 생각났다. 미국으로 건너가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불현듯 우울감이 찾아온 적도 많았다. 한 번도 당선되지 못한 공모전 경험은 실패자라는 인식이 각인된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 같다.

이제 그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야 눈물을 글썽이며 오한결을 바라보는 가족들과 아트화랑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가로서 성공적인 첫 시작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나 1등했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오한결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비록 제가 1등을 했으나, 당선되지 못하신 분께도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명일문화재단이 앞으로 그 역할을 해주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시 한번 박수가 쏟아졌다.

“제가 아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지방대 출신의 열정만 가득했던 예술가 지망생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외면했지만, 노력하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경과 실력이 충족되지 않는 사람이 예술가를 꿈꾼다면 그건 몽상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고 싶었지만, 그는 완전하게 그들의 이론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작가는 모든 공모전에 실패했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오한결이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후 말을 이었다.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도망치듯 떠난 미국 생활이 절대로 편할 리 없을 테니까요. 더 고약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갖 노동에 시달리다가,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 동화니까……. 반전이 있습니다. 다행히 신이 그에게 천재적인 능력을 주게 됩니다.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 그 능력으로 미국에서 작가가 되는 꿈을 이뤘습니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요.”

잠시 뜸을 들인 후 오한결이 말했다.

“또 반전이 있습니다. 최고의 예술가가 되었는데,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가? 그가 원했던 삶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에서 예술가는 그가 선택한 직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예술가로 성공해도, 가족은 이미 그의 곁은 떠난 상태였죠. 그는 깨달았습니다. 예술 그 자체가 성공을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한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속 주인공과 다르게, 저는 지금 몹시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공모전 당선이라는 아주 흡족한 결과를 얻었으니까요.”

다시금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앞으로 진짜 예술이란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앞서 살다간 위대한 예술가의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예술정신을 따르겠습니다. 예술계의 엘리트적 관행을 뿌리 뽑고 배경이 다양한 예술가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오한결은 객석에 앉아 있는 노을과 최무열을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예술로 보는 아름다운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거리의 예술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가 손대는 일상의 사물은 사람들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는 예술 작품이 됩니다. 한국 예술계는 그런 예술가를 품을 수 있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받는 청년의 미래도 고민해야 합니다. 과거 위대한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에 대한 반기로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 시대 아카데미는 달라져야 합니다. 기존 사조를 답습하는 예술을 가르칠 게 아니라 예술대 학생 한 명 한 명이 고유한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그들의 예술적 활동을 돕는 아카데미가 되어야 합니다.”

오한결의 진심이 담긴 수상 소감이 끝나자, 외신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나운서가 그를 제지하며 기자회견은 따로 마련돼 있다고 말했지만, 그 외신 기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했다.

“CNN 마이클 기자입니다. 언론을 통해 당신 그림을 보게 됐습니다.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이용하여 시대의 유행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신선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보수적인 화풍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적 방향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오한결이 영어로 대답했다.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려야 할 때 그들의 영혼이 말을 겁니다. 그들이 바라본 세상의 시선과 예술적 마음이 온전히 느껴질 때 나는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위대한 예술가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합쳐질 때 나만의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게 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원어민 수준의 오한결의 영어 실력에 모두 깜짝 놀랐다.

노을이 혼자 중얼거렸다.

“한결 작가님은 교포였나 보네.”

오한수가 그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 형은 해외를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데요.”

“뭐? 거짓말……. 진짜야?”

오한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의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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