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33화 (33/202)

제33화 눈보라

신태진 회장의 걸출한 웃음이 명일그룹 회장실을 가득 채웠다.

“하하하. 오한결 작가는 대단해! 보란 듯이 1등을 차지했구먼.”

소파에 편히 기댄 신태진 회장이 다리를 꼬며 양승호 비서를 쳐다봤다.

“궁금해서 말이지. 혹시 오한결 작가 작품을 실물로 볼 수 없겠나?”

양승호 비서가 당황했다.

“실물이요……? 워낙 문화재단에서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어서요. 그건 좀 힘들 듯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공개하지 않을까요……?”

아쉬운 표정의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조급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오한결 작가에게 축하 전화는 했나?”

“네, 회장님께서 아주 기뻐하신다고 전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꼰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오한결 작가는 뭐라고 하던가?”

양승호 비서가 다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냥 알겠다고 하시던데요…….”

“……까다롭군. 오한결 작가 일정이 어떻게 되나? 한 번 만나봐야겠어.”

“제가 알기론 지인들하고 MT를 간다고 들었습니다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신태진 회장이 흥분하며 말했다.

“오호라! 우리도 같이 갈까? 재밌겠는데!”

“저기 회장님……. 그건 좀……. 그리고 이미 출발했다고 합니다.”

신태진 회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일세.”

양승호 비서가 놀란 가슴에 손을 얹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신태진 회장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너무 좋네. 뭘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 전국 유기견 센터에 영양식을 기부하겠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거야!”

“넵! 회장님.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 * *

한편, 강릉 바다 근처 펜션에 도착한 오한결과 일행들.

모두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의 냄새에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펜션 뒤로 야트막한 산이 보였고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도 잘 정비돼 보였다. 무엇보다 조금만 걸어가면 맑고 푸른 바다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차에서 짐을 내리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을 때, 펜션 주인이 다가왔다.

“어이구, 홍 사장. 반갑네.”

“오랜만이네. 김 사장. 하나도 안 변했구먼.”

김 사장은 오한결과 친구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소개 좀 해주겠나?”

“물론이지. 자, 그럼 누구부터 소개할까나. 여긴 내 동생 홍미숙이고 사촌 동생 김일중 사장이야. 서로 구면이지?”

“당연히 알고 있지. 근데 말이야. 내가 궁금한 건 저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젊은 친구들일세.”

홍철수가 한 명씩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오한결. 매우 재능있는 예술가라네.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 공모전에서 당당하게 대상을 받았어. 그리고 거리 예술가 노을. 미대생 최무열, 미술학원 강사 이풀잎, 레크레이션 강사 차승현 일세.”

“좋아, 좋아. 모두 인상이 끝내주게 좋구먼. 홍 사장 식구면 내 식구와 마찬가지지. 자, 모두 날 따라오세요.”

일행은 꽃으로 장식된 아치형 입구를 지나 정원으로 들어갔다. 미니 축구장과 족구장이 보였고 야외 정원 곳곳에 바비큐를 먹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펜션이 크지는 않지만, 있을 건 다 있어요. 내부로 들어가면 노래방도 있으니까, 잊지 말고 이용하도록 하세요.”

김 사장이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 펜션의 자랑은 예쁜 조명입니다. 좀 전에 꽃으로 둘러싸인 아치형 문을 지나왔던 거 기억나나요? 저녁이 되면 예쁜 전구에서 빛이 나와 펜션 일대가 요정이 사는 공간처럼 예쁘게 변하니까 기대하셔도 좋아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최무열, 차승현과 다르게 노을과 이풀잎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 저녁이 너무 기대된다. 호호.”

김 사장이 펜션 문을 열고 사람들을 내부로 들여보내며 말했다.

“모두 짐을 풀고 잠시 쉬도록 하세요.”

모두 일제히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펜션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내부는 광이 날 정도로 깔끔했고 곳곳에 독특한 기념품들이 놓여 있는데 아마도 김 사장이 국내외 여행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사 모은 것 같았다.

오한결은 최무열, 차승현하고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세 사람은 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피곤했는지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오한결이 말했다.

“이대로 쉬자. 움직이는 것도 귀찮다.”

최무열과 차승현은 킥킥 웃었다.

“완전 공감. 말하기도 귀찮다.”

* * *

한 시간 뒤, 홍철수가 일행을 거실로 불러들였다.

“펜션 뒤로 둘레길이 있는데, 바닷가까지 이어진다고 하네. 모두 산책하러 갈 거지?”

“네!”

딱딱한 시멘트와 아스팔트 대신 푹신한 흙을 밟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힐링이 된다. 긴장의 연속인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오감으로 자연을 받아들일 때 방전된 삶의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노을과 이풀잎은 한순간도 입을 다물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최무열은 차승현에게 모던아트 기자와 인터뷰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홍철수 사장은 휴대폰으로 야생 꽃과 나무를 찍느라 바빠 보였고, 홍미숙과 김일중 사장은 저녁 식사 메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듯 보였다.

숲을 벗어나자, 푸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일렁일 때마다 햇빛이 부서져 반짝거렸다.

긴 산책에 모두 지쳤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잔잔한 바다의 일렁임이 지겨워질 때쯤, 홍철수가 말했다.

“모두 힘들지? 거의 다 왔으니까, 힘냅시다!”

생각보다 길었던 둘레길 산책을 마치고 펜션에 도착했다.

여자들은 급히 펜션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고, 남자들은 족구장에서 공놀이를 시도했지만, 모두 피곤해서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하고 금세 그들도 펜션으로 들어와 버렸다.

모두가 쉬는 와중에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은 부엌에서 식사 재료를 손질했고, 김일중 사장은 마당에서 바비큐 준비에 열을 올렸다.

오한결이 슬쩍 부엌에 다가와 말했다.

“뭐든 시키세요. 도와드리고 싶어요.”

홍미숙이 포장된 소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이렇게 음식 해서 먹이는 것도 큰 기쁨이야. 우리한테 그런 기쁨을 뺏지 말아줘. 너희들은 마음껏 먹고 쉬다 가면 돼. 알겠니?”

멋쩍은 미소를 지은 오한결이 말했다.

“그럼, 산책 좀 다녀올게요.”

“어머, 지금? 안 힘들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서요.”

홍미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한결이 조용히 펜션 밖으로 나왔다.

* * *

멋진 풍경을 기록하고 싶던 오한결은 스케치북을 들고 홀로 산책을 나섰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오감을 통해 전해졌다.

숨을 깊게 들이켜 신선한 공기와 숲의 냄새를 받아들였다. 울창한 나무와 형형색색의 꽃을 유심히 관찰하며 머릿속에 기록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이다. 오한결이 아니라면 감히 인간의 오감만으로 거대한 자연의 서사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이제 조금씩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불어와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먹구름이 하늘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은 어느새 회색 구름으로 청명함을 잃고 있었다.

오한결은 변덕스러운 날씨에 몹시 당황했다.

펜션에서 멀리 떨어진 지금, 무작정 뒤돌아 갈 수 없었다.

곧 하늘에서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걸음을 재촉하던 오한결은 매서운 바람을 뚫고 힘겹게 바닷가에 도착했다. 잿빛 파도가 눈앞에 일렁거렸다.

성난 자연을 홀로 마주 선 오한결은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한두 방울 비가 쏟아지자,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한결을 거세게 몰아세웠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오한결.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으로 떠 올랐다.

윌리엄 터너의 <눈보라: 항구를 나서는 증기선>.

바다의 거친 야생성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때마침 내리던 빗방울도 멈췄다.

무릎 꿇고 스케치북을 모래사장에 내려놓은 오한결.

오한결은 강렬한 흥분으로 온몸을 미세하게 떨기 시작했다.

펜 선의 강약만으로 울부짖는 바다의 느낌을 스케치북에 담고 싶다. 생각해보자. 윌리엄 터너라면 저 거친 바다를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회색 먹구름은 세상을 삼킬 듯 부풀어 오르고 거센 바람은 미친 듯이 오한결 주위를 감싸고 돈다. 검은 파도는 근처 바위에 부닥쳐 강렬하게 부서진다.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주자였던 ‘윌리엄 터너’.

대상이 아닌 시각을 그리려 했던 그는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에 맡기고 근원적 존재를 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거칠게 그러나 섬세하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오한결.

형태는 없다. 위풍당당한 먹구름과 화난 듯 솟구치는 파도는 거대한 에너지를 품은 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사물이 아닌 빛의 덩어리. 그것인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표현한 그림이다.

“오한결 작가님!!”

멀리서 들리는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에 오한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노을과 최무열이 거센 바람을 뚫고 오한결 곁으로 다가왔다. 최무열이 휘청이는 오한결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형! 미쳤어? 이러다가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노을이 울먹였다.

“너무 걱정돼서 숨이 멎는 줄 알았어. 위험하게 왜 이런 날씨에 혼자 여길 왔어?”

오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을 웅크리고 그림에 빠져들었다.

최무열과 노을은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바닷바람에 오한결이 다시 휘청이자, 얼른 두 사람이 우산을 펴 바람을 막아주었다. 신들린 듯 그림을 그리는 오한결을 말없이 지켜봤다.

힘겹게 작품을 마무리한 오한결.

노을과 최무열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그림에 빠지면 정신이 없어서…….”

최무열이 그림에 눈을 떼지 못했다.

“형태가 보이지 않잖아. 하지만 누가 봐도 성난 파도라는 걸 알 수 있어. 어떻게 느낌만으로 대상을 정확히 표현하지?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하자, 노을이 말을 보탰다.

“난 알 것 같아. 저 바다를 봐봐. 성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금방 깨닫게 되잖아. 나는 오한결 작가님의 그림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았어. 이 그림은 성난 바다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 인간의 마음을 담고 있어.”

노을이 잠시 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이 그림이 무서워.”

우르르 쾅!

갑자기 굵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번쩍하더니, 굉음이 울렸다. 빗방울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무열이 오한결에게 우산을 건네자, 오한결이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우산을 활짝 폈다. 이어서 최무열과 노을도 각자 우산을 폈고 세 사람은 펜션을 향해 걸어갔다.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더니, 이후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펜션에 도착한 세 사람.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두 펜션 밖으로 나왔다.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에게 다가왔다.

“한결 학생! 괜찮은 거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이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원하는 그림은 그렸고?”

오한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홍철수 사장이 활짝 웃었다.

“그래! 안 다쳤으니 됐다.”

오한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홍철수 사장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됐군요. 오늘 저녁은 여러분들이 기다리던 바비큐에요!”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텅 빈 배를 문지르며 소리쳤다.

“바비큐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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