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결과 발표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최하늘은 소름이 돋는지 살짝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유독 그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공모전에 그의 제자들이 많이 당선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하늘은 그 소문이 악의적이라고 생각했고, 터무니없다고 믿었다.
심사위원 한 명이 단독으로 결정할 사항도 아니었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지도 않았다. 적어도 최하늘이 생각하는 예술계는 그런 곳이 아니길 바랐으니까.
떠도는 소문은 잘 나가는 작가이자 교수에 대한 질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한국대 김보름 교수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한국 예술계를 이끄는 세계적인 작가이지 않은가. 예술가협회 회장 출신으로 정계 인사들과 어떤 식으로 연줄이 닿아 있는 거물이기도 했다.
게다가 국내외 언론에서 주목하는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김보름 교수의 제자가 당선된다면 본인 이름을 더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어찌 욕심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김보름 교수는 여러 공모전 심사에서 본인이 주도권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심사를 이끌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 모두 김보름 교수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세계적인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한 번도 뜻을 굽혀보지 못한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는가?
‘어떡하면 좋을까.’
최하늘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문화재단 복도를 돌아다니다, 이나영 팀장과 마주쳤다.
“어머, 최하늘 씨. 무슨 고민 있어?”
“그게…….”
“……말해봐, 뭔데?”
“공모전 심사가 걱정이라서요.”
별일 아니라는 듯, 이나영 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하겠지. 어떤 작품이 선정될지, 직원이 관여할 수는 없어. 아까도 공모전 진행 상황 체크 해 봤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던데. 걱정 안 해도 돼.”
답답한 듯 최하늘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팀장님이 아셔야 할 게 있어요.”
“어머, 진짜 뭔가가 있구나. 말해봐. 같이 고민해 보자고.”
최하늘은 심사위원들의 대화 내용을 이나영 팀장에게 전했다. 과장 없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나영 팀장의 과한 리액션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한국대 김보름 교수를 더욱 교활하게 묘사하고 말았다.
이나영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이쪽 계통에 헛소문이 많아. 경쟁도 치열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도 상당하지. 하지만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들 모두 세계적인 작가이자 교수들이야. 김보름 교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다른 공모전과 상황이 다르단 말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겠죠. 아까 얼핏 듣기론, 독보적인 작품이 하나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뛰어난 작품이 꼭 당선됐으면 좋겠어요.”
이나영 팀장이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뛰어난 작품이란 건 주관적인 거야. 누가 봐도 최고로 보이는 작품도 공모전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거지. 심지어 예전에 공모전 탈락한 작품인데, 해외 평론가의 눈에 들어서 유명한 작가가 된 사람도 있잖아. 우리 공모전도 다르지 않아.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 당선돼도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는 얘기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신수진 이사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놀란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신수진 이사장이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최고 작품이 당선돼야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나영 팀장님, 해명하시죠!”
얼음처럼 차가운 신수진 이사장의 모습에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은 꽁꽁 얼어버린 듯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이나영 팀장을 노려봤다.
“이나영 팀장님!”
이나영 팀장이 버벅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갑자기 해명하라고 하시면…….”
“왜 최고 작품이 당선 안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하셨죠? 공모전을 준비한 팀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이나영 팀장이 신수진 이사장 눈치를 엄청 살피며, 한국대 김보름 교수에 대한 소문과 최하늘이 들은 심사위원들의 대화를 전했다.
무표정하게 얘기를 듣고 있던 신수진 이사장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할게요.”
처리하다니? 이나영 팀장은 신수진 이사장의 꿍꿍이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을 압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작품 심사 및 선발은 철저히 심사위원들의 재량이다. 아마도 처음 진행하는 공모전인지라 이사장님이 뭔가 큰 오해를 한 것 같다.
이나영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사장님, 죄송하지만, 우린 심사에 관여할 수 없어요.”
“관여 안 해요. 다만, 모른 척하지도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신수진 이사장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방법은 만들면 되죠.”
* * *
오한결과 동생 오한수가 거실에서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웃음 장벽이 낮은 오한수는 대부분 장면에 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하.”
“난 안 웃긴데…….”
“푸하하하.”
영화는 다소 유치했지만 모처럼 동생과 즐겁게 보낼 수 있어 오한결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휴대폰 진동이 거칠게 울렸다. 하지만 영화에 집중하던 두 사람은 진동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영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웅. 웅. 웅.
진동 소리를 뒤늦게 들은 오한수가 시선을 텔레비전을 향한 채 말했다.
“형 휴대폰 아니야? 전화 온 것 같은데.”
오한결은 휴대폰을 슬쩍 보고 말했다.
“모르는 번호야. 그냥 무시하면 돼.”
다시 영화에 집중하는 두 사람. 하지만 오한결 휴대폰은 계속해서 울려댔다.
오한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 좀! 전화 받아. 급한 전화면 어쩌려고,”
오한결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급한 전화 없어. 공모전 당선 결과도 내일모레고.”
놀란 표정의 오한수가 벌떡 일어섰다.
“형! 미쳤어? 공모전 전화 맞네. 당선자에겐 미리 연락하잖아!”
공모전에 당선돼 본 적이 없던 오한결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 오한결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가 얽히고설킨 게 공모전 아닌가. 결과는 열어봐야 아는 것이다.
오한수가 휴대폰을 손에 쥔 오한결을 냉정하게 바라봤다. 동생의 표정은 ‘어서 받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한결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명일문화재단 이나영 팀장입니다. 오한결 작가님 휴대폰 맞나요?]
오한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어머나! 공모전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이나영 팀장이 높은 톤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역대급 지원자들이 모두 모인 공모전이었는데 말이죠. 월등한 실력으로 1등을 차지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으실까. 호호호.]
“아, 그렇군요.”
오한결이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나영 팀장이 불안한 말투로 물었다.
[저기, 진짜 오한결 작가님 맞죠? <그리움, 다시 시작> 작품을 제출하신…….]
“네, 맞아요.”
[어머머머!!! 너무 놀랐잖아요. 엉뚱한 곳에 전화한 줄 알고. 호호호. 작가님은 되게 차분하신가 보네요. 하긴 작품만 봐도 귀티가 좔좔 흐르실 거 같아요.]
“기뻐하는 중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축하 전화 드렸어요. 내부적으로 일정 정리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오한결이 전화를 끊자, 오한수가 바싹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무뚝뚝한 거로 봐서는 공모전 아닌가 보네. 응? 응? 아씨, 빨리 대답해!!”
오한수가 목소리를 높이자, 놀란 표정의 부모님이 안방에서 서둘러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혹시 싸우는 거니?”
오한결이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 공모전 당선됐어요.”
“!!”
오준근과 박선희가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자, 오한수도 주먹을 불끈 쥐고 승리의 포효를 했다.
“대박!”
오한결은 공모전 당선보다 가족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더 행복을 느꼈다. 회귀 전 작가로서 최고 영광을 누렸지만, 그는 언제나 공허함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가족을 잃고 얻은 성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자신의 모든 성공 과정을 가족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오준근이 소리쳤다.
“오늘은 아버지가 소고기 쏜다! 모두 외출 준비하도록!”
오한수가 소리쳤다.
“끼약~!”
* * *
며칠 후, 명일문화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
팝업 창이 뜨더니, 수상자에 이름에 ‘오한결’이 크게 보였다.
박수호 기자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최근 들어 예술계 전반에 오한결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파주 카페거리’ 작품부터 ‘부산 벽화’까지. 그가 남긴 작품은 대중들의 호기심을 넘어 예술계 종사자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박수호 기자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본선 진출 10 작품이 공개됐는데, 매우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최민희 작가’.
그녀는 분명 한국대 김보름 교수의 애제자 아닌가?
그 밑에 심사위원 명단이 보였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
H대 심수빈 교수.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 교수.
‘한국대 김보름 교수가 심사위원이었다고?’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예술가인 것은 확실하지만 파벌과 세력을 내세워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몇 년 전부터 예술계 주요 인사를 자신의 제자로 채우기 시작했고 그녀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김보름 교수는 최민희 작가를 선정하려고 했을 텐데, 문화재단은 어떻게 그녀의 만행을 저지했을까?
홈페이지 화면을 더 내렸다. 그때 박수호 기자가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가 꼼짝 못 할 비장의 무기가 있었네.’
심사위원 소개와 함께 공개된 그들의 대표작품.
10개의 본선 진출 작품과 세 명의 심사위원 작품을 모두 홈페이지에 공개해 버리다니…….
미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김보름 교수의 작품과 최민희 작가의 작품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절은 아니지만 분명 같은 예술적 방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다.
이번 문화재단 공모전은 국내외 예술계가 주목하는 공모전이다.
만약 최민희 작가가 당선되면, 김보름 교수는 자신의 대표작을 더는 떳떳하게 세상에 내놓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제자 작품과 표절 시비에 걸리기라도 하면 김보름 교수로선 무척 손해 보는 일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문화재단은 이렇게 김보름 교수의 손과 발을 꽁꽁 묶고 심사를 진행한 듯싶다.
어쨌든 심사위원들의 대표작품과 본선 진출작이 나란히 공개됐다는 그 자체만으로 김보름 교수는 상당한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확실히 명일문화재단에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항의를 못 할 것이다. 명일그룹에 등을 지고 버틸 수 있는 예술가는 아직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 * *
공모전 당선 후 수많은 축하 전화가 걸려와 며칠을 바쁘게 지낸 오한결.
회귀 전 미국에서 작가로 성공한 오한결은 항상 외로웠다. 성공에 따른 물질적 보상은 넘쳤지만, 마음은 언제나 텅 빈 상태였다.
이제는 그때와 완전히 다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오한결은 외롭지 않았다.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는 오한결을 무척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게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띠링. 띠링.
문자 소리에 오한결이 휴대폰을 살폈다.
「노을: 오늘 너무 재밌게 놀았어.」
「최무열: 난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내가 아는 사람이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당선되다니. 그것도 딱 1명 뽑는 곳에서 말이지.」
「노을: 맞아. 아직도 현실 감각이 없음. 여튼 오한결 작가님 대단해. 존경스러워.」
「오한결: 모두 너희들 덕분이야. 진심인 거 알지?」
「최무열: 이제 나만 남았네. 꼭 대박 작품 만들 거야.」
「노을: 또 그 소리네. 한결 작가님 덕분에 작품을 만들긴 했지만 나도 아직 엄청 부족하단 말이야. 자꾸 혼자만 남았다고 말하지 좀 마. 나도 아직 갈 길이 멀어…….」
「오한결: 앞으로 내가 계속 도울 테니까! 두 사람 걱정 그만!」
「최무열: 모두 고마워. 눈물이 나네.」
「노을: 어머, 뭐래. 안 되겠다. 우리 빨리 엠티 가자. 기분 전환해야지.」
「최무열: 오! 엠티! 빨리 가고 싶다. 하하.」
「오한결: 부산에서 벽화 같이 그렸던, 이풀잎과 차승현 친구들 기억나지? 혹시 같이 가도 될까?」
「노을: 물론! 그분들 요즘 뭐하지. 보고 싶다.」
「최무열: 풀잎이 누나 또 보겠네. 엄청 이쁘시던데.」
「노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