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단군 신화
시청역에 내려 서울시립미술관을 향해 걸어가는 오한결.
회귀 전 작가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그림을 그리던 시절, 시립미술관은 오한결에게 꿈의 장소였다. 언젠가 멋진 예술가가 되어 꼭 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립미술관에서 서정익 작가는 개인전을 한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서정익 작가는 오한결과 다르게 엘리트 교육만 받고 자란 대한민국 대표 청년 작가이다. 그의 작품이 궁금하면서도 은근히 느껴지는 부러움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립미술관에 들어서자, 서정익 작가 개인전 홍보 문구가 오한결 눈을 사로잡았다.
「서정익 작가의 <단군 신화>」
「뉴욕타임즈 선정. 기대되는 아시아 작가 10인.」
‘단군 신화라고?’
단군 신화라면 고조선 시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이야기 아닌가. 하늘에서 날씨를 관장하는 신들이 내려와 인간이 되길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100일간 쑥과 마늘을 먹였다. 호랑이는 도망갔고 버틴 곰은 인간이 되어 환웅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단군이었다.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었다.
정치, 종교, 사회적 요소가 한데 어울린 신화를 어떻게 재해석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오한결은 기대를 안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 * *
오한결은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그가 바라보는 서정익 작가의 작품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청년 작가니까, 당연히 젊음의 패기를 보여줄 거로 생각했다. 높은 자존감을 캔버스에 당당하게 표현한 작품을 기대했다. 오한결 자신도 청년 작가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걸까.
오한결은 집중하는 눈빛으로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랄까, 신경증적 증상이 물씬 풍기는 그로테스크한 회화라고 불러야 할까…….
그로테스크는 문명사회에서 기존 질서가 해체되는 변혁기에 자주 발견되는 기법이다. 과장이나 왜곡 그리고 이질적인 것과 결합하여 합리적인 질서나 관념으로부터 해방을 꿈꿨다. 그렇다면 서정익 작가의 작품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읽어야 하는 걸까?
앙상한 선을 수십 번 겹쳐, 인물과 배경의 형태가 무척 기이해 보였다.
작가의 불안한 심리와 극복되지 못한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환웅이 비와 구름, 바람을 다스리는 관리들과 지상에 내려오자, 이를 경계하는 곰과 호랑이의 모습이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
혼란했던 세상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그 순간을 묘사한 듯 보였다.
오한결은 그림에서 서정익 작가의 ‘신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신화는 인간 정신의 원형이다.
신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 또한 한 개인의 뿌리까지 탐색할 수 있다.
서정익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불안감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심하게 생략된 배경은 서정익 작가가 느꼈을 소외감과 상실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 *
오한결이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최무열과 노을의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노을과 다르게 최무열의 표정은 무슨 일인지 시큰둥했다.
“무열아, 무슨 일 있어?”
최무열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난 정말 재능이 없는 거 같아.”
미간을 찌푸린 오한결이 대답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두 사람처럼 멋진 작품 만들고 싶은데……. 학교 과제는 항상 벅차기만 하지, 열심히 해도 좋은 성적은 안 나오고. 교수님은 칭찬 한 번 안 해주시고……. 나는 예술가로서 미래가 없는 것 같아. 포기해야 하나 싶어. 이제는…….”
노을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리야. 넌 나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예술 하잖아. 솔직히 난 대학도 안 나왔다고! 지금도 예술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어. 나야말로 편견을 이겨내며 겨우 작업하고 있다고. 배부른 소리 그만 하세요. 최무열 왕자님.”
무열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누나 그만해! 예술이 대학 하고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은 누나 작품을 보고 학력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제발 누나야말로 선입견을 좀 버려!”
“……무열아.”
“한결이 형님을 봐봐. 예술가는 타고나야 한다고. 시대를 읽는 능력과 타고난 감각. 그리고 넘치는 자신감이 보이잖아. 하지만 난 없어. 없다고!!”
홍철수가 시원한 수박을 테이블에 놓으며 오한결에게 윙크했다. 그는 최무열에게 조언을 좀 해줬으면 하는 신호를 보냈다.
오한결이 최무열의 등을 두드렸다.
“나도 무열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지. 수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재능’의 중요성을 매번 느꼈어.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시무룩해진 최무열이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자, 홍철수와 노을이 오한결을 향해 따가운 시선을 쏘아 댔다.
최무열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거봐. 예술은 나랑 안 맞아. 내가 재능 없는 거 다들 알잖아.”
오한결이 테이블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최무열을 지그시 바라봤다.
“무열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겠어. 고작 학교 과제 한 번 본 것밖에 없으니까.”
“…….”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봐. 그리고 내게 보여줘. 나는 그때까지 무열이의 재능을 판단하지 않을 거야.”
“다들 내게 실망할 거야…….”
“그게 두려워? 실망하면 어때? 과거 수많은 천재 예술가는 비평가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디며 작품 활동을 했어. 그들이 느꼈을 끝없는 절망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그들이 결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거야. 예술에 대한 평가 기준은 예술가 자신이 만드는 거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봐. 교수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그런 작품이 아니라.”
오한결의 진심 어린 조언에 최무열의 눈이 빛났다.
잠시 생각에 빠진 최무열이 입을 열었다.
“맞아. 어떻게 하면 교수님이 칭찬해 주실까 그런 고민만 했어. 생각해보니까 그건 진짜 예술가의 자세가 아니잖아. 내가 잘 못 생각했던 것 같아.”
노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무열 색깔이 물씬 풍기는 그런 작품을 보고 싶다.”
최무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 뭐지. 갑자기 자신감이 샘 솟는데. 고마워요, 다들. 이렇게 용기 주셔서.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 볼게요. 꼭 그러고 싶어요!”
대화를 흥미롭게 듣던 홍철수 사장이 말했다.
“다들 너무 멋지다. 이럴 때가 아니지. 뭔가 해줄 게 있나 찾아보자. 아! 우리끼리 엠티 갈까? 친구가 펜션을 운영하는데 놀러 오라고 어제 전화 왔거든.”
최무열과 노을이 신나서 소리를 지르자, 홍철수와 오한결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렇게 좋을까.”
때마침 홍미숙이 화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무슨 일 있어?”
노을이 조르르 달려가 홍미숙의 팔짱을 꼈다.
“언니, 우리 엠티 가기로 했어요. 이번이 저의 첫 엠티거든요.”
“어머, 그랬구나. 음식은 내가 담당할게. 배 터지게 준비하면 되지?”
다시 한번 큰 함성이 아트화랑에 울려 퍼졌다.
* * *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최종 심사가 진행 중이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 H대 심수빈 교수, 그리고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 교수가 한 달 만에 모두 모여 예심을 통과한 열 작품을 무척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김보름 교수가 감탄했다.
“열 작품 모두 수준이 굉장하군요. 시대적 흐름일까요. 예전에 비해 난해한 작품들이 많아졌어요. 그래도 작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대부분 표현력이 상당해 심사하는 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심수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지원자가 많아서 선정된 작품들도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을 겁니다. 얼마 전에 다른 공모전 심사를 갔는데, 그곳은 한두 작품 빼놓고는 전부 수준 미달이었어요. 무엇보다 문화재단 공모전에 경력 작가들이 지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작품을 관찰하는 데이비드 오에게 김보름 교수가 물었다.
“얼굴이 굳으셨습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나요?”
“공모전 심사가 처음이라 얼떨떨합니다.”
“호호호. 생각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작가들이 많아서 놀랐군요.”
“놀라긴 했는데……. 대부분 쓰레기 같아서 놀랐어요.”
“!!”
김보름 교수 얼굴이 몹시 붉어졌다.
“오만하군요! 데이비드 오 교수님. 어디 그 이유라도 들어봅시다.”
데이비드 오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들이죠. 이제 지겨워요. 요즘 한국 미대는 추상화 그리는 공식을 가르쳐줍니까? 어찌 한국 작가들은 이렇게 똑같은 그림을 그리죠? 이제는 양심이 없어 보일 정도예요.”
심수빈 교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신도 미대 교수잖아! 마치 남의 얘기하듯 말하지 마세요!”
국립예술교육원은 국가에서 예술 영재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다. 그곳은 일반 대학과 다르게 무척 자유로운 학습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교수와 학생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교수들도 본인보다 뛰어난 감각의 학생을 만나면 기꺼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곳으로 유명하다.
교수와 학생 모두 나이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소수정예로 운영하기 때문에 입시 미술로 그림을 배운 학생들은 감히 지원조차 못 하는 곳이다.
데이비드 오가 국립예술교육원 교수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 그림을 보십시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인을 형상한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정말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
“긴장감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고통을 표현한 작품이라면 충분한 감정적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아마 저 작가는 자신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말하더라도 타인의 삶을 비추는 거울 역할도 할 수 있어야죠. 자꾸만 자신의 삶만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
“김보름 교수님께 여쭐게요. 작품이 난해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인가요?”
“그건…….”
“김보름 교수님은 난해한 작품에 과대 포장을 하고 있어요. 이해되지도 않는 작품을 우리가 왜 봅니까? 호기심은 이해와 해석에 근거합니다. 관객은 친절한 작품에 호기심을 느끼는 법이죠.”
김보름 교수가 결국 짜증을 냈다.
“전 데이비드 오 교수님 말씀이 더 이해가 안 돼요! 어쨌든 이번 공모전 당선작을 뽑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
데이비드 오 교수가 방긋 웃었다.
“아니요. 한 작품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의 시선을 빼앗은.”
세 명의 교수 모두 고개를 돌려 오한결의 <그리움, 다시 시작>을 바라봤다. 데이비드 오가 말을 이었다.
“감히 평가조차 할 수 없는 작품이죠. 그래서 우리 모두 침묵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보름 교수와 심수빈 교수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오한결의 작품은 나머지 공모전 최종심 후보 작품들 사이에서 마치 푸른 우주의 별처럼 강렬하게 빛나 보였다.
데이비드 오는 <그리움, 다시 시작>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보면 볼수록 빨려드는 작품이다. 작품 속 한 점 한 점의 별들이 데이비드 오 교수의 원초적 감정을 마구 자극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데이비드 오 교수는 미술사를 장식한 작품이 아니면 어떠한 감정적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도도했던 데이비드 오 교수가 오한결 작품 앞에서 내심 위대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심사위원 모두 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작품을 향한 그들의 눈빛, 다소 흥분된 호흡은 <그리움, 다시 시작>의 향한 무언의 찬양과 다르지 않았다.
잠시 뒤 한국대 김보름 교수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저쪽에 있는 <축제> 작품이 마음에 드는군요. 제 경험상 저런 작품이 대상으로 뽑혀야 언론이 주목할 겁니다. 저 그림을 보세요. 감정이 폭발하듯 캔버스 안에서 물감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어요.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김보름 교수가 심수빈 교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말에 동의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심수빈 교수는 오히려 화를 냈다.
“교수님! 누가 봐도 교수님 제자 작품 아닙니까? 명일문화재단 공모전도 교수님 제자로 당선시키려고요?”
“아니! 익명으로 심사하는데, 내 제자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모함하지 마세요! 기분 나빠서라도 <축제>를 당선시킬 겁니다. 동의 안 하시면 이번 공모전 당선작은 없습니다!”
심수빈 교수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세요! 저도 이번에는 그냥 안 넘어갑니다. 당선자가 없더라도 제가 심사위원으로 있는 이상 부정행위는 없어요!”
“뭐! 부정행위? 야!!!”
“왜!!”
“…….”
다과를 주려고 회의실 문밖에 서 있던 최하늘이 몹시 놀라 사색이 되었다. 고성이 오가는 심사장에서 김보름 교수의 만행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 어떻게. 소문이 사실이었어. 김보름 교수가 심사위원이면 제자가 당선된다는 사실 말이야. 이 사실을 이사장님께 알려야 해.’
최하늘은 발길을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