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30화 (30/202)

제30화 공원 산책

대형 체육관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수천 점의 공모전 작품들.

스무 명의 심사위원과 그들을 보조하는 직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써 2주 넘게,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심사가 진행됐다. 수많은 작품에 잠식된 듯 피곤에 찌든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안쓰러워 보였다. 명일문화재단의 엄격한 심사요청으로 심사에 속도를 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사위원 A가 투덜거렸다.

“마치 우리가 심사 시험을 받는 것 같군요. 심사 작품 모두 비평을 남기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심사위원 K.

“명일문화재단은 아마추어 같군요. 아마도 처음 공모전을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 작품은 수준 미달이에요. 그중에서 진짜 평가할 만한 작품은 10퍼센트를 넘을까 싶습니다. 문화재단은 예심 심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요.”

심사위원 P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 생각이 다른데요. 문화재단에서 모를 리가 없어요. 단지 꼼꼼하게 심사를 하고 싶은 거겠죠. 결국, 수상자는 한 명 아닙니까. 솔직히 여기에 있는 작품들을 눈으로 쓱 보고 괜찮은 거 서너 개 뽑아 본선에 올려도 수준 높은 당선작 한 개를 뽑는데 문제없어요. 명일문화재단은 그게 싫은 겁니다.”

심사위원 A가 P를 바라봤다.

“불합리한 심사 방식에 정식으로 항의합시다.”

P가 메모장에 작품 심사평을 적으며 말했다.

“교수님. 우린 심사비를 다섯 배는 더 받았어요. 다 돌려주시게요?”

“…….”

심사위원 A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은근슬쩍 자리를 옮겼다.

며칠 뒤, 스무 명의 예심 심사위원들이 심사평을 공유하고 본선 심사 대상자 선정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한 자리에 다시 모였다.

평소 말을 아끼던 심사위원 C가 먼저 입을 열었다.

“블라인드로 평가하고 있지만, 오랜 기간 예술에 종사한 사람들은 바로 알 수 있죠. 아마추어 작가부터 프로까지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위권 작품을 추리는데, 어려움은 없었고요. 재밌는 사실은 몇 년 사이 작가들의 작품이 굉장히 다양해졌다는 겁니다. 물론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입시 교육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요. 그건 한국 미술계가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몇몇 작품들에서 특이한 점이 발견되는데요. 본인들은 개성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 외국 작품을 카피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저는 표절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전통회화를 고수하는 심사위원 A가 말했다.

“어설픈 그림들의 잔치라고 생각합니다. 조형적 미감을 상실한 작품은 평가 가치가 없어요. 자고로, 미술이란 철저한 훈련과 지식 습득의 결과여야 합니다.”

날카로운 반발이 들렸다.

“요즘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군요. 그럼 피카소가 환생해서 공모전에 작품을 냈다면 당연히 예선 탈락이겠군요.”

“추상화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 같군요.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수많은 추상화가가 접수됐지만 모두 차별성이 부족해요. 모호하다고 할까요. 작가의 설명 없이는 아예 해석이 불가했어요. 공모전에 어울리는 그림들이 아니죠.”

심사위원 P가 반발했다.

“공모전에 어울리는 작품이요? 그게 뭔데요?”

“성실함 그리고 작가의 일관된 작품세계죠. 물론 신인 작가에게 그런 걸 요구하긴 무리지만 말입니다. 몇몇 작품을 보면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작품인 걸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묘사의 충실도와 차별성도 보였고요. 그런 작품에 마음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묵직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웃기고 있네. 여기가 무슨 입시 미술 심사 장소인가? 이러니까 한국의 미대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지.”

다수의 심사위원이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섰다.

“뭡니까? 어찌 그런 모욕적인 말을!”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당당하게 일어 섰다.

“제 말이 틀렸다는 겁니까? 성실함, 일관성이요? 그렇게 뽑은 미대생 중에 지금 세계적인 작가가 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가끔 개인의 영재성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가 나오긴 하지만, 과연 교육과정 혜택을 본 사람이 있느냐 말입니다. 순수한 창작을 원하는 예술가 지망생들의 의욕을 꺾은 한국 미술은 반성해야 합니다!”

“…….”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필 때, 백발의 노인이 손을 천천히 들었다. 모두 그의 모습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다.

“이 늙은이 한마디 하겠습니다. 예술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주지 못했죠. 저는 여러분들이 주장이 모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단, 하나만 추가하죠. 심사위원은 작가의 고뇌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밀한 묘사를 하든, 추상화로 어린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든 상관없어요. 이 작가가 정말 섬세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영혼을 담았는지가 중요합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점에서 아주 특별한 작품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제가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더군요. 작가가 자신의 진심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느낌이 납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모두 B섹션으로 이동해서 그 그림을 먼저 보고 오시는 건 어떠신지요? 그리고 다시 심사 기준을 토론해 봅시다.”

* * *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신태진 회장과 그의 부인 이현미가 복실이와 함께 호수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때마침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복실이의 완강한 힘에 신태진 회장이 쩔쩔매며 말했다.

“아이구, 이놈이 힘이 장사네.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어.”

이현미가 쭈그려 앉고는 복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복실이 덕분에 바쁜 당신이 이렇게 산책도 같이 나오고. 복덩이가 왔어요.”

복실이가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왈, 왈!

신태진 회장은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복실이가 온 뒤로 유난히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많아졌고 집안 분위기도 밝아졌다.

‘인간과 교류하는 한 생명의 힘이란 이런 걸까.’

신태진 회장은 일에 치여 애완동물을 귀찮아하던 젊은 날의 자신을 반성했다. 진작에 이런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공원 호수를 한 바퀴 돈 두 사람은 호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따스한 음료수를 주문했다.

신태진 회장은 강아지를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어쩌면 오한결 작가는 그림보다 더 소중한 가족의 행복을 신태진 회장에게 선물했는지도 모른다.

신태진 회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테이블 위에서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현미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양 비서님, 회장님 화장실 가셨는데 급한 일인가요?”

“안녕하세요, 사모님. ……그게,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혹시 가깝다면 이곳에 오실래요? 차 한잔 대접할게요, 양 비서님.”

“아……. 거기가 어딘데요?”

회장 부부가 있는 카페 앞에 도착한 양승호 비서가 크게 심호흡하고 천천히 들어갔다. 양승호 비서를 발견한 이현미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여기에요!”

이현미가 미소를 한껏 장착하고 말했다.

“회장님 모시느라 고생이 많아요, 양 비서님.”

양승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회장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크게 웃었다.

“나도 자네와 일하게 돼서 무척 기쁘네.”

이현미가 손수 커피를 가져다주자 양승호 비서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귀한 손님으로 모실게요. 양 비서님.”

신태진 회장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양 비서, 저녁 먹고 가지. 뭘 좋아하지? 뭐든 말해보게.”

화들짝 놀란 양승호 비서가 말을 더듬었다.

“전……. 그저 업무 보고만 하려고 했는데. 제가 두 분께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업무 보고는 회사에서 제대로 들으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네…….”

신태진 회장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자네가 회사에 온 지 3년 정도 됐구먼. 이제는 양 비서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아직 제대로 식사 대접도 안 했으니 내가 너무 무심했어. 미안하게 됐네.”

울컥해진 양승호 비서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한 번도 자신에게 목소리를 높이지도, 업무적으로 부당하게 압박을 가하지 않았던 신태진 회장. 그는 강자에게 강했고 약자에겐 언제나 인자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흔히 ‘가족’ 같다는 회사 분위기란, 상급자에게 몹시 유리한 회사 분위기를 말한다. 거리낌 없이 눈치 보지 않고 명령을 내릴 테니, 사생활을 반납하고 회사에 충성하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신태진 회장은 양승호 비서를 정말 가족처럼 대했다. 때론 업무적으로 무척 깐깐했지만, 신태진 회장의 무한한 신뢰는 양승호 비서로 하여금 회사에 소속감을 느끼게 했다.

양승호 비서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낸 뒤 말했다.

“그래도 간단하게 보고 먼저 하겠습니다. 비서실에서 알아본 결과,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1차 심사가 끝났다고 합니다. 총 10 작품을 선정했으며, 다음 주 중 본선 심사위원들이 한 작품을 선정하게 됩니다.”

“오호, 이제 거의 마무리돼 가는구먼.”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유난히 한 작품의 작품성이 뛰어나 심사위원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오호! 당연히 오한결 작가겠구먼.”

양승호 비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확신할 수 없습니다. 비서실에서 알아볼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조용히 양 비서의 보고를 듣던 이현미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관심이 대단하군요. 그러지 말고, 오한결 작가를 집으로 초대하세요.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신태진 회장과 양승호 비서가 동시에 외쳤다.

“그건 안 돼!”

“안 됩니다!”

이현미가 어깨를 삐죽 올리며 두 눈을 크게 뜨자,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공모전에 공정성 시비가 붙으면 안 돼. 심사 도중 당선이 유력한 지원자를 초대할 수는 없지.”

이현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큰 실수할 뻔했네. 그건 기본인데 말이죠. 공모전 결과 나오면 그때 초대하도록 하죠. 우리 회장님께서 몹시 아끼는 예술가니까요. 호호.”

해가 완전히 저물자, 카페 주변으로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가득했다.

이현미가 휴대폰을 확인하고 말했다.

“양 비서님 배고프겠다. 이제 일어나죠. 제가 아까 근사한 곳 예약했어요.”

* * *

오한결이 메일함에서 서울시립미술관 홍보 메일을 발견했다.

「서정익 작가 개인전을 초대합니다」

최근 들어 종종 접하는 이름. 서정익.

오한결은 망설임 없이 메일을 클릭했다.

「대한민국 청년 예술가를 대표하는 작가 서정익. 한국의 신화에 꾸준한 관심을 보인 서정익 작가의 다채롭고 신비스러운 작품세계를 시립미술관에서 만나보세요.」

오한결은 피식 웃었다.

‘신화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한다고? 흥미로운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할 정도라면,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긴데. 이렇게 주목받던 예술가가 왜 미래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걸까? 실력의 한계를 보인 걸까, 아니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술을 포기한 걸까?

오한결은 그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정리한 오한결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