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바니타스
오랜만에 아트화랑에 모인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노을과 최무열이 기겁하며 오한결을 향해 소리쳤다.
“뭐! 늦잠을 잤다고?”
“10분만 늦었다면 공모전 접수를 못 할 뻔했다고?”
오한결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너무 피곤해서 말이지…….”
최무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사흘이나 밤새워서 그린 그림을 못 낼 뻔하다니. 나라면 심장 떨려서 벌써 기절했을 듯…….”
노을이 두 손을 꼭 잡고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대단한 작품이었겠다. 정말로 궁금하네.”
오한결이 웃으며 대꾸했다.
“잘 그리긴 했지. 70 평생 한 작품을 그리면서 사흘 동안 밤샌 건 처음이니까.”
“70 평생? 방금 내가 잘 못 들었나?”
오한결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둘러댔다.
“아니, 70 작품 정도 그렸는데, 사흘 밤을 새운 건 처음이라고…….”
노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난 또, 오해할 뻔했잖아. 평소에도 좀 젊은 느낌이 안 나서 말이지. 호호.”
팔짱을 끼고 조용히 대화를 듣던 홍철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사흘 밤을 새웠다면 과연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무척 궁금하네.”
최무열이 소리쳤다.
“나도! 혹시 사진 찍어 놓은 거라도 있어?”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진은 없어. 공모전 결과 발표하면 그때 확인하면 되지.”
“만약 떨어지면?”
천진하게 묻는 최무열의 어깨를 노을이 손으로 툭 쳤다.
“야! 오한결 작가님이 당선 안 되면 누가 되냐.”
“그래도…….”
홍철수 사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공모전 당선은 운도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 우연에 맡기라는 말이 아니야. 공모전 심사위원들의 성향도 큰 변수라는 뜻이지. 나도 한결 학생이 무조건 당선되리라 생각하지만, 떨어져도 실망한 건 없어. 그게 공모전의 특성이니까. 같은 작품을 여러 곳에 제출해도 어느 곳은 예선탈락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당선될 수도 있어.”
“들었지, 노을 누나? 알지도 못하면서!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야.”
가게 구석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홍미숙이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한결 학생이 당선 안 되면 누가 돼요?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어느 심사위원이 우리 한결 학생 작품을 부정할 수 있겠어요!”
오한결이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누나. 하하.”
홍미숙이 두 팔을 허리춤에 올리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공모전 탈락이니, 그런 말 하는 사람에겐 이따가 피자는 없습니다!”
홍철수가 웃으며 말했다.
“다들 말조심해야겠는걸. 미숙이가 새벽부터 도우를 직접 반죽해서 만든 피자란 말이야. 한결 학생의 공모전 당선 기원이라고 할까. 하하.”
최무열이 허기진 배를 문질렀다.
“여기서 누가 한결 형님의 실력을 의심해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모두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트화랑 사람들은 이어서 자신들의 일상을 공유하며 소소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창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노을이 팔꿈치를 괴고 노곤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먹구름이 심하더니 이제야 비가 오네요.”
홍미숙이 비에 젖은 창밖으로 흐릿한 가로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들 우산 가지고 왔어?”
“아, 맞다!!”
“우산 충분히 있으니까, 하나씩 가져가도록 해요. 대신 꼭 돌려주고!”
“예! 아트화랑 만세!”
잠시 뒤, 고소한 피자 냄새가 아트화랑을 가득 채우자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최무열이 피자! 피자!를 외치자 노을이 그만하라고 소리 질렀다.
홍미숙이 주방에서 커다란 피자를 들고나오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와, 비주얼 죽인다!”
손수 만든 도우를 얇게 펴 그 위에 토마토 소스와 자연산 치즈를 듬뿍 올린 홍미숙표 수제 피자였다. 오븐에서 갓 나온 피자 위에서 치즈가 보글보글 춤을 췄다.
홍철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왜 아직도 안 오지?”
“누가 오나요?”
때마침 아트화랑 문이 열리고 인상 좋은 서정욱 사장이 우산을 접으며 들어왔다.
“이야! 피자 냄새 죽이네. 나만 빼고 먼저 먹은 건 아니겠지?”
오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정욱 사장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한결 작품을 위해 삼각지 거리의 오랜 추억을 공유해준 감사한 분이었다.
홍철수가 말했다.
“여기 서정욱 사장은 건너편 골목에서 화랑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 한결 학생의 성공적인 공모전 수상을 위해 파티를 한다니까, 이렇게 축하해 주고 싶다고 찾아왔답니다. 모두 박수!”
모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자, 서정욱 사장이 쑥스러운 듯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오한결 작가의 팬이라서 말이지. 이런 자리에 안 올 수가 있나!”
홍미숙이 테이블에 접시 하나를 놓으며 말했다.
“사장님 여기 앉으세요.”
홍미숙이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올리자 치즈가 끝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모두 그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예!! 대박!”
제일 크게 소리친 최무열의 접시에 홍미숙이 먼저 피자를 놓으며 말했다.
“맛있게 먹어요. 최무열 학생.”
쩝. 쩝. 쩝.
모두 말없이 피자를 먹으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오한결의 그림 솜씨가 아닌 홍미숙의 요리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홍철수가 두 손 한가득 캔맥주를 들고 나타났다.
“깜빡했지 뭐야! 여기 수제 맥주 하나씩 들어요!”
노을이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사장님, 수제 피자는 홍미숙 언니가 만든 거고. 수제 맥주는 홍철수 사장님이 만든 건가요?”
“난 솜씨가 없어서. 맥주는 편의점에서 사 왔어. 하하.”
오한결이 맥주 캔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쓰여 있네. 수제라고. 누가 만들면 어때? 맛있으면 됐지.”
“대기업의 맛인가…….”
홍철수가 벌떡 일어나 맥주 캔을 추켜들고 말했다.
“자, 건배합니다. 오한결 작가의 성공적인 공모전 당선을 위하여! 건배!”
“건배!!”
* * *
오한결과 최무열은 노을의 옥탑방에 있는 작업실로 향했다.
오한결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퀭한 눈빛을 한 최무열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피곤해 보이네. 잠은 잔 거야……?”
최무열이 힘없이 대답했다.
“아뇨. 예전에 제게 해준 작품 충고 때문에 생각이 너무 많아요. 더는 시간에 쫓겨 대충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저도 한결 형님처럼 진짜 예술을 해보고 싶다고요.”
오한결이 대견하다는 표시로 최무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무열이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야! 근데 피곤한데 왜 따라왔어?”
최무열이 스윽 고개를 돌려 오한결을 쳐다봤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노을 누나의 작품 발표회인데 내가 빠질 수 없죠. 우리는 한 팀이에요!”
“과연 어떤 작품을 보여줄까, 노을은?”
“저도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요. 빨리 가시죠, 누나가 기다리겠어요.”
오한결과 최무열이 작업실 건물 아래에 도착해 위를 올려다보니, 옥탑에 거대한 검은 형상이 보였다. 아마도 노을이 작품을 천으로 가린 것 같았다.
노을이 힘겹게 계단으로 올라오는 두 사람을 보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 운동 부족이야!”
최무열이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대답했다.
“이상하다……. 지난번엔 수월했는데. 계단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오한결이 최무열에게 말했다.
“몸이 피곤해서 더 힘들게 느껴질 거야. 예술가는 체력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 맞아요. 오늘 저녁엔 꿀잠을 좀 자야겠어요. 하하.”
최무열이 검은 천으로 가린 작품 형상을 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노을 누나! 오늘 누나 작품 보고 영감 잔뜩 얻어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노을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으……. 너무 부끄럽잖아. 넌 왜 따라왔어? 한결 작가님만 부른 건데!”
“와, 엄청 서운하다.”
“그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그런 거지.”
“걱정하지 마. 누나는 내가 인정하는 예술가니까.”
오한결과 최무열은 노을이 건네준 음료수를 시원하게 마신 후 평상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바람에 불어오자, 작품을 가린 검은 천이 위태롭게 펄럭였다.
오한결이 검은 천을 보며 말했다.
“저렇게 가려놓으니까, 더 궁금한데.”
“부끄러워서…….”
최무열이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부끄러워하면 안 돼.”
“……이렇게 공개적으로 작품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는 게 처음이라 그래. 난 미대도 안 나왔잖아. 사실 이런 분위기는 딱 질색인데……. 그래도 오한결 작가님과 무열이가 이렇게 와서 작품을 봐준다고 하니까,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해!”
오한결이 노을을 바라봤다.
“우린 평가하러 온 게 아니라 감상하러 온 거래도. 하하.”
자리에서 일어난 노을이 작품을 가렸던 검은 천을 천천히 벗겨냈다. 부드럽게 미끄러진 천이 사라지면서 상당한 크기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깡통을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린 작품. 층별로 색을 달리해 작가가 어떤 경계와 상징을 나타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특이한 점은 깡통들이 모두 ‘해골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십 개의 깡통을 일일이 해골로 조각했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것이 당연해 보였다. 오한결은 작품이 주는 직관적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작가의 입을 통해 작품이 상징하는 게 무엇인지 직접 설명을 듣고 싶었다.
“작품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노을 작가님?”
노을이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한결 작가님이 그랬잖아. 내 작품은 너무 1차원적이라고. 그리고 작품에 시적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수많은 고민 끝에 계층적 상징이 가능한 피라미드 형태를 선택했어. 물론 이 모양이 극적인 역동성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한 작품에 시적 표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거로 생각했어.”
미간에 잔뜩 주름잡은 최무열이 물었다.
“오! 난 마음에 들어. 근데 왜 하필 해골이지?”
오한결과 노을이 동시에 외쳤다.
“바니타스!”
감동한 노을이 오한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역시 단번에 알아보는구나, 한결 작가님은.”
오한결이 차분하게 말했다.
“바니타스를 조형물에 적용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발전이야. 하지만 바니타스의 상징적 의미를 정말 잘 살렸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이질적인 면도 많고 말이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을에게 최무열이 소리쳤다.
“아! 답답해! 도대체 바니타스가 뭐야?”
노을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살핀 후 말했다.
“인생무상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어. 삶의 허무를 그림 주제로 삼는 예술이지.”
“허무? 해골이 허무를 나타낸다고?”
오한결이 답답해하는 최무열을 위해 직접 설명했다.
“16,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해골과 뼈, 유리잔, 거울, 책 등을 이용해 삶의 일시적이고 부질없음을 그린 정물화로 이해하면 될 거야.”
“아……. 해골 그려진 정물화를 본 적 있어. 그게 바니타스구나. 그 시대 사람들은 왜 그런 그림을 그린 거지?”
“중세 유럽인들은 흑사병과 30년 전쟁으로 삶이 무척 고단했어. 그들에게 죽음이란 눈앞에서 목격하는 흔한 현상이었던 거지. 삶에 대한 정의가 자연스레 ‘공허’, ‘헛된’, ‘가치 없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최무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 절반이 사망했을 거라며? 와, 그런데 전쟁까지 겪었다고? 삶이란 건 미래가 있어야 하는 건데 죽음이 미래라니. 정말 허망했겠다.”
최무열의 말대로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피해가 컸던 전염병으로 기록됐다.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의 90%가량이 사망했을 정도였다.
바니타스의 유래에 대해 생각하던 오한결은 노을의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난 왜 이 작품에서 희망이 느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