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그리움, 다시 시작
이른 아침.
오준근과 박선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한결 방문 앞을 서성대자, 거실 소파에 편히 앉은 오한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이 알아서 하는 거죠.”
박선희가 불안한지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래도, 사흘을 방 밖으로 안 나오겠다니. 그건 너무 하잖아.”
“설마, 화장실도 안 가는 건가?”
오준근이 진지하게 말하자, 박선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요. 사흘 동안 방에서 집중하겠다는 거죠.”
오한수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부모님께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번엔 어마어마한 그림을 그리려고 하나 봐요.”
“그러게……. 하지만 무리하면 몸이 상할 텐데.”
박선희가 조심스레 노크를 해봤다.
똑. 똑. 똑.
“한결아 아직 자니?”
방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피곤에 찌든 오한결의 얼굴이 스윽 나타났다.
“사흘이에요. 엄마.”
“……네 몰골이, 그게 뭐야.”
“사흘이에요, 사흘. 집중하게 해주세요.”
다시 문이 닫히고 집 안은 묵직한 정적이 가득했다.
오한수가 혼자 중얼거렸다.
“방금, 그건 형이 아니라 좀비였어.”
* * *
캔버스를 바라보던 오한결의 눈에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이 온통 검고 푸르게 변하더니,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반짝반짝 별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것처럼 오한결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오한결은 손을 뻗어 반짝이는 별들을 만져보려 했지만, 묵직한 공기만이 그의 손가락 사이 사이를 빠져나갈 뿐이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별들이 마법처럼 늘어나고 있다.
오한결은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무질서.’
흩뿌려진 별들의 무질서가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혼돈의 카오스는 예술적 영혼의 원천이자 어느 한 무명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 아닐까?
잠시 뒤, 오한결은 수십 년 전 ‘삼각지 거리’를 가득 채웠던 예술혼을 상상했다.
그토록 바라던 예술을 하고자 했으나, 굶주림을 피할 수 없었던 그 시절.
그래도 누군가는 붓을 들었고 예술혼은 꺼지지 않았다.
오한결은 급히 캔버스에 짙은 파랑과 검정을 칠했다.
오한결이 캔버스의 거친 표면을 따라 물감을 칠해갔다. 그가 그려내는 푸른색이 가미된 어둠은 몹시 깊고 심오해 보였다.
화랑거리 예술가들과 화랑 가게 주인들의 소망은 캔버스에서 반짝이는 별빛이 되어 어둠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오한결은 어두운 캔버스에 빛을 새기듯 붓을 들고 점을 찍었다.
한 점 한 점. 오한결이 무척 신중하게 점을 찍어냈다.
그것은 의도적인 무질서를 이루고, 대상성을 파괴하는 현대 예술이 돼야 한다. 무존재는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창작의 유연성도 보여야 한다.
한 점은 하나의 별이자, 우주가 된다.
그렇게 오한결은 온 에너지를 쏟으며 작품을 완성해갔다.
‘하나의 점에 모든 영혼을 담아 찍어야 한다.’
점 하나에 사라진 예술가의 영혼과 화랑거리 사람들의 그리움과 꿈이 묻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까.
알알이 박힌 별들이 제법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오한결은 ‘빛’과 ‘점’과, ‘선’으로 작품을 그리고자 했다.
‘그래! ‘선’이 없구나.’
선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빛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오한결은 재빨리 붓을 바꿔, 캔버스에 ‘선’을 감각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공간을 가로질러 시간의 한계를 극복한 ‘선’이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몇 시간 뒤, 멀리서 그림을 바라보자, 한 줄기 빛이 별들로 반짝이는 어두운 캔버스를 관통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오한결.
잠시 휴식을 취한 오한결은 영혼을 담아 빛을 캔버스에 새겨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집 안은 숨 막히는 정적이 가득했다.
가족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한결 방문만 바라볼 뿐,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모든 에너지를 쏟은 오한결.
<그리움, 다시 시작> 작품을 완성했다.
기력을 다한 오한결이 천천히 문을 열고 나오자, 가족들은 마치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힘껏 소리를 지르며 손을 잡고 거실에서 방방 뛰었다.
오한결이 물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동생 오한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 걱정돼서 우리도 사흘 동안 제대로 잠 못 자고 이러고 있잖아!”
오한수가 천천히 걸어 식탁에 앉았다.
“정말? 왜 그랬어…….”
어머니 박선희가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린 걱정하지 마라. 충분히 잤으니까. 작품은 완성했고?”
오한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밥 좀 주세요. 너무 배고파…….”
박선희가 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전자레인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굶다가 갑자기 먹으면 큰일 나. 우선 죽부터 천천히 먹자꾸나.”
하지만 오한결은 전복죽을 단숨에 쩝쩝거리며 퍼먹고는 배를 두드렸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근데, 지금 몇 시죠?”
“오후 4시.”
“……요일은?”
“목요일.”
오한결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휴……. 공모전 접수 마감이 금요일 6시거든. 다행히 오늘 금요일이 아니네. 하하.”
오한결이 식탁에서 힘없이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잠 좀 자겠습니다. 졸려 죽을 거 같아요…….”
오한결이 힘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동생 오한수가 부모님을 쳐다봤다.
“아, 궁금해. 어떤 작품을 그렸길래, 저렇게 집중을 했을까요?”
아버지 오준근이 그릇을 치우며 대답했다.
“작품은 모르겠지만, 난 한결이 건강이 더 걱정되는구나.”
오한수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아까, 형이 죽 먹고 있을 때, 슬쩍 작업실 들어가 봤어야 했는데!!”
어머니 박선희가 오한수 등짝을 탁, 치며 나무랐다.
“형 건강 걱정부터 해라. 이놈아!”
“아! 아파. 왜 때려! 때렸으니까, 나도 전복죽 줘.”
“네 건 없어!”
“왜 없어. 내가 아까 봤는데. 남겨뒀잖아!”
“그거 한결이 줄 거야!”
오한수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오준근이 슬쩍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고기 사 놨어. 형 깨면 같이 구워 먹자. 그때 많이 먹으면 되잖아.”
“오예! 소고기!”
* * *
몇 시간이 지나고, 오한결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을 걷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빛나 보였다.
다시 침대에 누운 그는 시원한 바람을 기분 좋게 느끼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인데. 좋네.’
그렇게 삼십 분 정도 하늘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느껴지는 불안감에 오한결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뭔가 놓친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급히 휴대폰을 켜고 오한결이 날짜를 확인하는데.
금요일 오후 5시.
“!!”
오한결은 목청껏 소리쳤다.
“안 돼!!!”
거실에서 후다닥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와 동생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오한결이 휴대폰을 한 손에 쥔 채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모전 작품 접수가 오늘 오후 6시까지인데, 지금 5시에요.”
동생 오한수가 소리쳤다.
“……1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무거운 침묵이 오한결 가족을 삼켜버리자, 박선희가 칼날 같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다들 외출 준비! 1분 이내로!!”
가족들이 일제히 방을 나가자, 오한결도 작품을 들고 거실로 뛰쳐나왔다.
박선희가 손가락 관절을 풀며 말했다.
“한수가 택시를 잡으러 먼저 나갔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 서둘러, 오한결!!”
박선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버지 오준근이 현관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잡았고, 오한결과 박선희는 그림을 함께 들고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뒤늦게 발바닥으로 찬 기운이 올라오자, 오한결은 자신이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신발을 안 신었네요.”
“신발이 뭐가 중요하다고! 사흘을 고생했는데, 작품 접수조차 못 하면 말이 안 되지!”
“……엄마, 너무 멋지시네…….”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하자, 그들은 집 앞에 정차한 택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빨리!!”
오한결, 박선희, 오준근이 택시에 오르자, 미리 승차해 있던 오한수가 소리쳤다.
“좋았어!! 기사 아저씨, 출발해주세요!!”
택시 기사가 불안에 떨며 물었다.
“다들, 괜찮아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쥬?”
오한결이 소리쳤다.
“아저씨! 명일문화재단으로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박선희가 거들었다.
“아저씨, 1시간 안에 도착하면 두 배로 드릴게요! 어서 출발해주세요!”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한 택시기사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좋아요! 실력 발휘합니다. 출발!!”
* * *
끼이익!
명일문화재단 정문에 정확하게 택시가 멈춰섰다.
오한결과 식구들은 재빨리 택시에서 내려 문화재단 입구로 달려갔다.
건물 안에서 서류 작업하던 최하늘이 놀란 표정으로 입구를 쳐다봤다.
“어머, 이게 무슨 소리지?”
오한결이 문을 벌컥 열고 빠른 걸음으로 최하늘 앞에 다가와 그림을 내밀었다.
오한결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공모전 마감 아직 안 했죠?”
최하늘이 시계를 바라봤다.
5시 50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네, 10분 전이에요. 작품 주세요. 접수해드릴게요.”
작품을 건네받은 최하늘이 몹시 놀란 표정으로 오한결과 작품을 번갈아 봤다. 짙은 어둠 속에서 희망의 별빛이 반짝이는 매혹적인 그림. 모든 빛에 작가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한 점 한 점 너무나 정성스레 찍은 별들이 최하늘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어머나!”
오한결이 물었다.
“왜요?”
“너무 멋져요. 이런 그림은 처음 봐요…….”
최하늘이 고개를 들고 자신도 모르게 오한결을 빤히 쳐다봤다. 최하늘의 얼굴빛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 도대체 뭐지……. 잘 생겨 보이네…….’
오한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접수증은 안 주시나요?”
오한결의 목소리에 정신 차린 최하늘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네. 드려야죠. 잠시만요.”
부모님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오한수가 슬쩍 접수대로 다가왔다.
“얼마나 접수했어요? 많아요? 많겠죠?”
최하늘이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네, 상당히 많아요. 저희 공모전에 관심 있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요.”
오한수가 최하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한결이 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파주…….”
오한결이 재빨리 오한수를 입을 틀어막으며 최하늘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생 놈이 헛소리를 가끔 해서…….”
최하늘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접수증을 내밀었다.
“접수 완료됐습니다.”
정확히 시계가 6시를 가리키자, 복도 끝에서 똑딱똑딱 구둣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신수진 이사장이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최하늘 곁으로 나가 왔다.
“하늘 씨, 접수 마감하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네, 이사장님!”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최하늘 옆에 놓인 오한결의 그림을 발견했다. 신수진 이사장이 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그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뭐지? 세상에, 숨 막힐 정도잖아.’
넋 나간 표정을 짓는 신수진 이사장에게 최하늘이 말했다.
“여기 계신 분께서 마감 10분 전에 접수한 작품이에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한결을 바라보는 신수진 이사장.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정도 실력이면 벌써 예술계에서 소문이 났을 법한데 말이지. 하여튼 무척 흥미로워. 신인 작가는 저렇게 당당한 표정과 여유로움을 갖지 못할 텐데……. 정체가 뭘까?’
최하늘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사장님, 접수 마감 결과 보고 드리겠습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퍼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그래요, 이나영 팀장님하고 한 시간 후 회의실에서 뵐게요.”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를 비우자, 오한수가 흥분하며 오한결에게 속삭였다.
“대박! 여기 이사장이 명일그룹 회장 막내딸이래. 가끔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다. 와, 포스 대박.”
오한결은 복도를 걸어가는 신수진 이사장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태진 회장 막내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