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오필리아
동생 오한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 혜화역에 도착한 오한결.
오한결은 역 근처에서 부모님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대학로 구경을 하고 싶다며 오한결을 집에 내버려 두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잠시 뒤, 누군가가 오한결의 등을 콕 찔러 뒤돌아보니, 부모님이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어머니 박선희 손에는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왔구나, 아들.”
“엄마, 동생 주려고 꽃다발 사셨어요?”
“그럼! 오늘 같은 날 꽃이 빠질 수 없지. 어때, 예쁘지? 호호.”
한껏 밝은 어머니에 비해 아버지 오준근은 몹시 어두워 보였다.
“아버지는 피곤해 보이시네요.”
“네 엄마가 얼마나 구경 다니는지. 다리 아파 더는 못 다니겠다.”
박선희가 흥분하며 말했다.
“이때 아니면 언제 또 대학로 구경해봐요. 당신도 여기 처음 왔잖아요!”
오한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싸우지 마세요. 제가 좋은 연극 있으면 수시로 모시고 올게요.”
“어머, 그럴래? 호호호.”
오준근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종이 하나를 꺼내 오한결에게 내밀었다.
“이것 봐라, 우리 한수 연극 홍보물 아니냐.”
포토샵으로 조잡하게 만든 연극 홍보 포스터를 보고 오한결이 웃고 말았다.
연내대학교 연극동아리 ‘놀자’의 <햄릿> 공연!
조잡한 폰트에 촌스러운 도형 이미지 사용한 포스터는 중고등학교 과제물보다 더 형편없어 보였다. 오한결이 한편으론 아쉬움을 느꼈다.
‘나한테 말하지, 멋지게 그려줄 수 있는데…….’
박선희가 오한결 손에 들린 연극 포스터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포스터도 너무 멋지지 않니? 우리 막내아들이 주인공 햄릿이라니. 세상에, 너무 기대돼. 호호호.”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빨리 극장으로 가시죠. 시간 거의 다 됐어요.”
오한수의 공연 장소인 ‘플라워소극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작았다. 무대와 객석 거리가 좁아 관객이 배우의 호흡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연극이 시작됐다.
하나둘 소등이 시작되고, 이어서 완전한 어둠에 잠긴 무대가 이어지는데.
잠시 후 서서히 조명이 밝아지면서 분장을 한 배우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대 정면에 등장한 건 막내 오한수였다. 주인공 햄릿답게 화려한 왕자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오한결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불리는 유명한 작품이다. 오한수가 연기하는 햄릿은 덴마크 왕자로 그의 숙부가 아버지를 독살한 사실을 알면서도 복수를 망설이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햄릿은 오해로 연인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그 사건으로 오필리아는 정신을 놓고 시냇물에 빠져 죽게 된다.
연기에 집중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기본적인 대사 전달력과 감정 표현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화를 내는 장면에서 무작정 소리만 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부모님은 아들의 연기력에 흠뻑 빠져 연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의 절규와 고민, 그리고 고통스러운 몸짓을 연기하는 동생을 향해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듯 그들은 집중하고 있다.
어머니는 주먹을 힘껏 쥐고는 연극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생 때문에 집중력이 흐려진 오한결은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오필리아 역할을 맡은 배우가 등장했는데, 그녀의 연기력이 너무 훌륭해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햄릿이 오필리아 아버지인 플로니어스를 죽이는 장면 이후 그녀는 서서히 미쳐가더니 실제로 정신적 충격으로 삶의 의지가 꺾여버린 한 인물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갈 때쯤, 오한결은 오필리아의 죽음과 관련된 위대한 그림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랐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햄릿>의 비극적인 여주인공 오필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
오필리아가 시냇물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는 그림이지만, 그런 비련의 여주인공을 청초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극적이고 관능적으로 묘사했다.
화가는 이 작품을 위해서 호그스밀 강가에 넉 달 동안 머물며 수십 종의 다양한 식물과 꽃을 작품 배경으로 그렸다고 한다.
오한결은 오필리아 연기하는 여학생을 감동적인 눈빛으로 쳐다봤다.
엄청난 재능이다.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통해 느꼈던 햄릿의 감동을 이런 소극장에서 이름 모를 대학생의 연기로 경험할 수 있다니…….
배우들의 열연이 이어졌고 연극은 서서히 막바지에 다다랐다.
인물들이 모두 독살되는 것으로 연극이 끝나자, 무대에 환한 조명이 들어왔다.
부모님과 오한결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열연을 펼친 배우들은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땀을 뻘뻘 흘리던 동생 오한수와 눈이 마주친 오한결은 그에게 엄지를 척, 하고 들어 올려 보였다.
‘훌륭한 연극이었다. 자랑스러운 동생아!’
동생을 지그시 바라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아버지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여보, 오늘은 맘껏 울어도 돼.”
“우리 막내아들 봐요. 언제 이렇게 훌륭하게 컸지. 연기도 너무 훌륭하고.”
오한결이 어머니를 지그시 바라봤다.
“동생이 엄마 닮아서 그래.”
눈물을 닦은 박선희는 꽃다발을 들고 무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준근과 오한결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신태진 회장이 명일그룹의 회장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신태진 회장이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서류를 든 양승호 비서가 신태진 회장 가까이 다가와 보고했다.
“아직 전국 단위는 아니지만, 수도권에 있는 모든 사설 유기견 보호소에 소량의 재정적 지원과 한 달 치 유기농 사료를 전달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양 비서는 일 하나 똑 부러지게 하는군.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앞으로 진행 상황 수시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줘요.”
양승호 비서가 몸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전에 말씀하신 걸 알아봤는데요…….”
신태진 회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 어떻게 됐나? 오한결 작가가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나?”
“그게……. 문화재단이 워낙 보안을 신경을 쓰고 있어서요. 저희로서는 공모전 참가자 명단을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협조 요청하면 되지 않은가? 그것도 신수진 이사장이 막은 건가?”
“네, 문화재단 직원들도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 딸이지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야. 그럼 이걸로 끝?”
“아, 어렵게 몇 가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현재 공모전 접수 작품이 무려 3천 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신태진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너무 많은 거 아냐? 경쟁이 치열하겠군.”
“워낙 문화재단 인지도가 높고 당선만 된다면 국내외 작가 활동이 보장되다 보니, 신인 및 기성 작가들 모두 공격적으로 지원하는 것 같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오한결 작가가 그 많은 지원자 중에서 1등을 할 것 같은가?”
“……저라면 1등을 뽑겠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만약 당선이 안 되면 오한결 작가에게 작품 받기 힘들겠구먼.”
“미리 걱정할 필요 없지 않을까요? 미술을 모르는 제가 봐도 오한결 작가님 작품은 너무 훌륭하니까요.”
정신을 퍼뜩 차린 신태진 회장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하하하.”
* * *
한 줄기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두운 방.
눈을 지그시 감은 오할결은 이젤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출품작 주제는 ‘삼각지 화랑거리’의 사람들이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오한결의 대학생 시절, 그림의 꿈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 아트화랑 홍철수 사장님과 홍미숙 누나.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화랑거리 사람들.
오한결은 옛 화랑거리의 추억을 작품으로 재연하여 다시금 화랑거리의 새로운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다.
‘공모전을 위한 작품? 그런 게 있을까…….’
기계적인 학습에 따른 작품이 공모전에서 경쟁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많이 봐왔다. 하지만 오한결은 그렇게 기존 형식을 답습한 작품 따위 제출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움은 언제나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것이고 그것은 작가의 ‘용기’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용기’
‘작품을 향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
오한결은 서서히 눈을 떴다.
두꺼운 암막 커튼에 가려진 창문은 어떠한 빛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 빛이 필요해.’
세상의 빛을 그림에 새길 수 있다면……. 수만 년 전 우주를 건너온 그 빛. 그것은 과거의 산물이고 현재를 비추는 나침반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다.
김환기 작가가 <우주>를 그렸을 때처럼, 오한결은 그림을 위한 처연한 노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점을 찍고, 한 선을 그어가며 작품을 완성한다면.
한 점은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고, 한 선은 빛의 흐름이 되어 과거의 영광이 현재가 되는 시간 여행과 같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묵직한 새벽이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삼각지 화랑거리의 역사를 함께한 사장님들의 음성이었다.
서정욱, 조성우, 김영숙 사장.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묻어 나왔다.
“화가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그때,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었어. 장사로 번 돈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예술가의 순수함에 감동하고 있었지. 삼각지 화랑거리는 언제나 그런 예술가들로 넘쳐났으니까. 진짜 예술가들 말이야.”
오한결은 그들이 말한 진짜 예술가란 누구인지 생각해 봤다.
입시 미술부터 시작하는 한국의 예술가들.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리고 똑같이 생각하고, 자신의 개성보단 심사위원의 특성을 먼저 분석해 작품을 그리는 사람들.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은 소위 명문대에 진학한다.
대학 교육이라고 뭐가 다를까. 소위 ‘새로움’과 ‘창작’에 대해 떠들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나 배우는 학생들 모두 진정한 새로움과 창작에 대해 알지 못할 뿐이다.
경직된 집단 문화는 개성을 드러낸 사람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예술이 피어날 수 있을까? 경직된 사회는 예술을 그저 신기한 놀이로 바라볼 뿐이다.
왜 한국은 문화 선진국이 되지 못했는가?
글로 배운 예술은 필요 없다.
도전하지 않는, 용기 없는 예술가 또한 필요 없다.
과거 ‘삼각지 화랑거리’의 순수성을 화폭에 부활시켜 그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 작품으로 현재에 안일하게 머무는 예술가에게 경종을 울리리라.
오한결이 암막 커튼을 젖히자, 푸른 아침 햇살이 그를 맞이했다.
오한결이 거실에 나와 물을 한 컵 마시자, 동생 오한수가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형, 설마 밤샌 거야?”
“아마도, 그런 거 같네…….”
“……불면증이야? 어쨌든 화장실 내가 먼저! 흐흐.”
오한결이 몹시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부터 사흘간 작업할 거야. 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
화장실 문 앞에서 오한수가 고개를 돌렸다.
“엥? 자발적 감금인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남은 물을 벌컥 들이켠 오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작품 완성할 때까지 잠은 안 잘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