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흥망성쇠
사람들로 북적이는 아트화랑.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이 커피와 음료수를 뚱한 표정의 화랑거리 가게 사장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다. 아트화랑 건너편에서 그림을 팔고 있는 서정욱 사장이 손목시계를 보며 툴툴거렸다.
“홍 사장, 나 다른 약속 있어요. 아직 더 기다려야 합니까?”
홍철수 사장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에이, 형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하실까. 자자, 시원한 음료수 나갑니다.”
화방을 운영하고 있는 조성우 사장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홍 사장님 부탁이니까 오긴 했는데,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러시지?”
미술 재료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김영숙 사장이 대뜸 소리 질렀다.
“참 말들 많네. 홍철수 사장님이 불렀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다들 장사는 안 되는데, 입만 살았나 보네.”
“뭐야! 김 사장, 당신은 위아래도 없어?”
“위아래? 여기가 군대야? 어디서 꼰대 같은 소리 하고 있어!”
“이제 막가자는 거지!”
홍철수 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리쳤다.
“모두 그만!!”
음료수 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은 홍철수 사장이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여러분께 작가 한 명을 소개해주려고 합니다. 이름은 오한결. 아직 젊지만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실력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서정욱 사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한결? 그게 누구여. 첨 들어보는구먼. 그건 그렇고 왜 그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하는 거지?”
김영숙 사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 사장님! 홍철수 사장님이 지금 설명하려고 하잖아요. 왜 말을 끊어요!”
“뭐야! 김 사장! 나랑 해보겠다는 거여!”
김영숙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해봐! 그동안 쌓인 거 한번 풀어보자고!!”
홍철수 사장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소리쳤다.
“다들 그만 좀 하세요!!”
홍미숙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홍철수 사장 대신 말을 이었다.
“오한결 학생은 아트화랑과 인연이 깊어요. 정말 성실하고 누구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청년이죠. 그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현재 한결 학생은 제가 아는 어느 작가보다 훌륭한 예술적 감각과 실력을 갖추고 있어요. 아마 여러분들도 그의 작품을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최근에 한결 학생이 삼각지 화랑거리를 소재로 작품을 준비 중인데, 사장님들의 도움이 꼭 필요해 보여서요. 그래서 오빠와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이라고 말씀드렸고요.”
홍철수가 말을 덧붙였다.
“다들 화신벽화 김일중 사장 아시죠? 얼마 전에 한결 학생이 김일중 사장과 파주에서 벽화 작업을 했는데, 사람들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죠. SNS에 작품 사진 많이 올라왔었는데, 혹시 보셨나요?”
“아, 그거! 알지! 오호라……. 그래서 요즘 김일중 사장 입꼬리가 귀에 걸렸구먼.”
홍철수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오한결 학생이 아니었으면, 화신벽화 사업은 이미 접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화신벽화 대출금 일부를 상환해야 해서……. 자연스레 아트화랑 운영도 힘들어졌을 거고요. 그런데 오한결 작가가 모든 걸 해결해줬습니다. 마침 오한결 학생이 화랑거리를 주제로 작품을 준비한다고 하니,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히 말을 듣던 서정욱 사장이 말을 했다.
“그랬구나……. 참말로 고마운 사람이구먼. 홍철수 사장은 우리 화랑거리의 상징인데, 어려울 때 도와줬다면 우리도 그 학생을 도와줘야지. 그게 인간의 도리인 거야.”
김영숙 사장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고. 홍 사장님 마음고생이 심하셨겠다. 어머, 눈물이 나네.”
조성우 사장도 말을 보탰다.
“화랑거리를 주제로 한다니, 기특하구먼. 그래서 지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홍철수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방금 지하철역에서 내렸다고 하네요.”
* * *
오한결이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랑거리 가게 사장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오한결은 당당하게 인사를 하고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이야, 잘 생긴 청년이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오한결이 홍철수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홍철수 사장님이 워낙 절 좋게 봐주셔서요. 과찬이십니다.”
김영숙 사장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사람을 좀 잘 보는데. 한결 학생은 상당한 예술적 아우라가 있어. 신기하네, 보통 그 나이에 갖기 힘든 건데.”
홍미숙이 홍철수 사장에게 소곤댔다 말했다.
“오빠, 그 그림도 보여줄까?”
“그래, 그러자.”
화랑거리 사장들이 오한결에게 폭풍 질문을 쏟아내고 있을 때, 홍미숙이 그림 한 장을 탁자 위에 조심히 올려놓았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헐떡였다.
“이건……. 홍 사장하고 미숙 씨 초상화 아닌가.”
“어머! 이건 보통 그림이 아니잖아. 유명한 명화가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그래! 생각났다. 렘브란트 화풍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비슷하게, 아니 똑같이 그렸을까. 믿을 수가 없어.”
김영숙이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어머! 그럼 우리도 그려주는 거예요? 다 같이 모여서 그리면 <야경> 같은 작품 나오겠네. 기대된다. 호호.”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 초상화는 아니고요……. 오한결 작가는 화랑 거리를 추상화로 표현하고 싶다고 합니다. 빛과 점과 선으로요.”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추상화요? 아니, 이렇게 뛰어난 인물화 실력을 갖춘 작가님이 왜요?”
오한결이 자신 있게 설명했다.
“화랑거리를 향한 여러분의 애정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애정과 그리움?”
“제가 삼각지 화랑 거리에 대해 조사를 좀 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몽마르트 언덕이 있다면 한국에는 삼각지 거리가 있죠. 과거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화가들이 2천 명 가까이 모여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땐 프랑스의 몽마르트 언덕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화랑거리는 전성기를 누렸고요. 하지만 90년대 저렴한 중국산 그림이 등장함에 따라 자연스레 쇠퇴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여러분은 삼각지 화랑 거리의 흥망성쇠를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잠깐 옛 추억에 빠져들던 사장들은 먹먹함에 가슴이 아렸다.
“이제는 추억일 뿐이지.”
오한결이 자신이 있게 말했다.
“아뇨. 제가 다시 그 영광을 되찾게 해드릴게요.”
“……어떻게?”
오한결이 <홍철수, 홍미숙> 작품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렇게 작품을 통해서요. 진심을 담아 작품을 만들면 사람들이 알아주리라 믿습니다.”
“정말 그걸로 될까…….”
홍철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직간접적으로 예술과 연결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예술의 힘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습니까. 안 그래요?”
모두 대답 대신 홍철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한결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을 보탰다.
“전 이번 작품을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출품할 예정입니다. 만약 당선된다면 예술계와 대중들은 자연스레 그림 소재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각지 화랑거리는 다시금 화재의 중심에 서게 되지 않겠습니다. 그때 기회가 오는 겁니다.”
화랑거리 사장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될까?”
“사장님들을 인터뷰할게요. 삼각지 거리의 추억과 소중한 경험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서정욱 사장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가만있어 봐,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도 안 온 사장들이 있네. 내가 당장 잡아 와야겠어. 이렇게 단합이 안 돼서야!”
서정욱 사장이 급히 나가자 김영숙 사장이 투덜거렸다.
“서 사장……. 도망간 거 아닌가? 도통 믿을 수 있어야지. 호호.”
홍미숙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에이, 설마요…….”
조성우 사장이 오한결에게 악수를 청했다.
“난 조성우라고 하네. 이곳 화랑거리에서 50년을 일했어. 묻고 싶은 거 있음, 다 물어보게. 모르는 거 빼고 다 알려줄 테니. 하지만 모르는 건 없을 거야! 하하.”
오한결은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 모습을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지켜보고 있었다.
* * *
명일문화재단 회의실 밖.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 사원이 귀를 쫑긋 세우고 회의실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나영 팀장이 속삭이듯 말했다.
“신수진 이사장님 대단하시다. 거물급 미술계 교수 세 명을 이렇게 한곳에 모으다니 말이야.”
“그래요? 다들 안 친한가 보죠?”
이나영 팀장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 말도 마. 경쟁이 얼마나 심한데.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일걸. 남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게 이곳이라고. 잘 새겨들어.”
“그래요? 안 그래 보이는데…….”
“어머머머, 최하늘 씨는 아직 멀었네. 근데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 교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지. 엄청 젠틀하셔.”
똑딱, 똑딱.
익숙한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 사원이 몹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해요?”
“이사장님 오셨어요? 이사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 여기서 나를? 왜요?”
이나영 팀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심사위원 세 분 모두 도착했다고 알려드리려고요.“
“아……. 가서 일들 보세요. 심사위원 상대는 내가 직접 할게요.”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이사장을 반겼다. 신수진 이사장이 회의실 책상에 다이어리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쁘신 세 분을 이렇게 한 곳에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가 능글스럽게 웃었다.
“명일문화재단이면 우리 예술계를 이끄는 곳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신수진 이사장님께서 부르시면 와야지요. 전 하나도 안 바쁩니다.”
H대 심수빈 교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님과 제가 인연이 깊어요. 그러면 자연스레 따님이신 신수진 이사장님과도 연이 아주 깊다고 할 수 있죠.”
과묵한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를 향해 신수진 이사장이 먼저 말했다.
“데이비드 오 교수님.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뉴욕타임즈에서 현대 예술의 거장으로 10년째 이름을 올리고 있는 데이비드 오 교수. 다른 교수들과 다르게 신수진 이사장의 심사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었다.
언제나 파격적인 작품으로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데이비드 오.
그래서일까, 수많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평론가는 그의 작품을 혐오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데이비드 오 교수는 평론가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데이비드 오 교수가 말했다.
“솔직히, 공모전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당선작들의 형편없는 수준에 신물이 났거든요. 제가 심사위원으로 온 이상 더는 그런 작품 따윈 뽑지 않을 겁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래야죠. 하지만 다수결로 선정될 겁니다. 아무리 독특해도 나머지 두 교수님께서 동의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게 심사 룰 입니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머, 데이비드 오 교수님은 외국에 오래 살아서 잘 모르나 본데. 한국에서는 파격적인 게 꼭 좋은 건 아닙니다. 예술가로 성장 가능성이 큰 작품이 선정되는 게 맞아요. 당선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를 찾아야죠.”
H대 심수빈 교수가 언짢게 대꾸했다.
“신기한 게, 김보름 교수님이 심사하신 공모전 당선작들을 보면 죄다 한국대 출신 작가들 작품이에요. 우연인가요?”
“무슨 그런 막말입니까!!”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하나하나 다 까발려 볼까요?”
신수진 이사장이 소리쳤다.
“조용!!! 제발 그만 하세요. 한국 최고의 예술가들을 모셨는데, 이렇게 의견이 달라서야 쓰겠습니까.”
데이비드 오가 태연하게 질문했다.
“그럼 심사위원 세 분이 각자 다른 작품을 선정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당선작이 세 개입니까? 아니면 당선작이 없는 건가요?”
“무조건 하나로 통일하셔야 합니다. 합의를 보셔야죠.”
데이비드 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분들이 남의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요!! 어디서 그런 막말을! 데이비드 오 교수 당신 몇 년 생이야!”
신수진 이사장은 밀려드는 두통에 미간에 잔뜩 주름 잡았다.
‘이들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은 타인을 향한 질투심에서 촉발했나…….’
정말로 김보름 교수가 자신의 제자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는 걸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바닥이 원래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하지만 신수진 이사장은 자신이 이사장으로 재임 중일 때 그런 편파적인 심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