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하트 케이크
어깨를 축 늘어뜨린 오준근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인기척이 없는 거실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적막감만 가득했다.
“오늘 다들 늦나 보네.”
오준근은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켰다.
“생일 축하합니다!!!”
전등이 켜지자 요란스러운 고깔모자를 쓴 가족들이 환하게 웃으며 오준근을 맞이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다들…….”
말을 잇지 못하는 오준근을 향해 박선희가 다가가 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불 꺼 놓고 한 시간을 기다렸지 뭐예요. 호호.”
가슴이 먹먹한 오준근이 식구들을 빤히 쳐다봤다. 열심히 일했지만, 세상일이 마음 같지 않았고, 결국 위태롭던 사업은 부도가 나고 말았다. 한참 하고 싶은 게 많을 자식들에게 경제적 뒷받침이 돼주지 못한 게 한이 돼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가족들과 생일날 웃으며 대화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오늘도 예년처럼 그렇고 그런 하루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언젠가 삶의 어두운 터널이 끝나면, 웃으며 생일을 축하할 날이 오겠지, 했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예상치 못했다.
오한결이 하트모양의 케이크를 양손에 꼭 쥐고 다가왔다.
“아버지, 꼭 소원 빌면서 끄셔야 해요.”
쑥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린 오준근이 후, 하고 촛불을 끄자 오한수가 크게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모두 식탁으로! 어머니께서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셨도다!”
윤기가 흐르는 갈비, 잡채, 떡볶이, 치킨 등등 온갖 음식이 식탁 위에서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오한수가 갈비를 뜯으며 물었다.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했어. 힘들었겠네.”
박선희가 동생이 노리고 있는 갈비 접시를 재빨리 오준근 앞에 놓으며 말했다.
“평소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몽땅 해버렸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네요.”
오준근이 갈비를 입에 가득 넣고 말했다.
“정말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고마워.”
오한수는 멀어진 갈비 접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쩝쩝 입맛을 다셨다.
평소 소식하던 부모님도 젓가락을 쉬지 않고 계속 음식을 집어 먹었다.
오한결은 자신의 노력으로 집안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이곳이 이제는 기대와 희망으로 채워지고 있어 몹시 만족스러웠다.
오준근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이고 배부르다. 케이크도 먹어야 하니, 그만 먹어야겠다.”
박선희도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근데 케이크는 어디서 샀어? 너무 예쁘던데.”
오한결은 동생과 식탁 위 음식을 치우고 하트모양의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제가 자주 가는 화랑이 있는데요. 거기서 일하시는 누나가 음식 솜씨가 굉장해요, 아버지 생신이라고 수제 케이크를 이렇게 만들어 주셨어요.”
“어머나, 정성이 대단하구나. 마음씨가 너무 예쁘다. 언제 한번 집에 오라고 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오한결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오한결이 조심스레 케이크를 잘라 가족에게 한 조각씩 전달했다.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한입 떠서 입에 넣었다.
“와, 담백하고 크림도 느끼하지도 않네.”
“솜씨가 장난 아니다.”
달달한 휴식으로 식사를 마무리할 때쯤, 어머니가 슬며시 자리를 비운 뒤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당신, 우리가 선물 언제 줄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작게 말했다.
“에이, 무슨 선물까지. 이렇게 멋진 생일상을 받았는데.”
“그래도 기대했을 텐데. 짜잔!”
박선희가 상자 뚜껑을 힘차게 열자 오준근의 두 눈이 엄청 커졌다.
“이건!!”
“맞아요. 당신이 평소 갖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등산화! 돈 좀 썼어요.”
튼튼해 보이는 가죽 등산화가 상자 안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오준근이 몹시 흥분하며 소리쳤다.
“이야! 이것만 있으면 백두산 정상도 거뜬하지. 정말 최고의 생일 선물이야!”
오한결도 준비한 선물을 꺼내 아버지께 드렸다.
“지갑이에요. 지난번에 보니까 낡았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고맙구나. 사실 이제 바꿀 때가 됐지. 하하.”
지갑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아버지가 몹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이거 직접 만든 거니?”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생이 놀라 말했다.
“형, 도대체 정체가 뭐야. 못하는 게 없어.”
“뭐, 고맙다……. 하하.”
이제 마지막 한 사람, 동생 오한수만 남았다. 모두 은근히 오한수를 쳐다보며 그의 선물을 기대하자, 오한수가 당당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공연 티켓을 꺼냈다.
“내 선물은 이겁니다!”
“연극 티켓?”
갑자기 오한수가 자리를 박차고 거실로 달려가 무대 위 배우처럼 포즈를 취했다.
“이제 저의 정체를 밝힐 차례가 온 것 같군요. 자 보세요, 막내아들의 진짜 모습을!”
어머니가 놀란 눈빛으로 티켓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설마……. 이 연극에 네가 나오는 거니?”
“네, 엄마, 맞아요. 우하하.”
아버지가 안경을 벗고 티켓을 자세히 관찰했다.
“아아, 여기 있네. 햄릿 배역에 오한수라고 적혀 있어.”
오한수가 다시 연극하듯 억지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 숨겨서 죄송합니다! 진정한 연기자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흘렀네요. 일단 와서 보세요. 막내아들의 엄청난 연기력에 놀라실 겁니다.”
오한결이 웃으며 말했다.
“암튼, 축하한다. 근데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냐.”
“형만큼 하겠어? 본인이 천재라고 말하고 다니잖아. 풋.”
“저게…….”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웃으셨다.
“하하하.”
오한결과 오한수가 멍한 표정으로 부모님을 바라보자 아버지가 말했다.
“너무 기대되는데요. 여보.”
“그러게, 막내가 끼가 많아서 잘할 거예요.”
다시 자신감이 붙은 오한수가 두 팔을 벌리며 연극 톤으로 소리쳤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와서 보세요, 여러분!”
* * *
최무열이 난생처음 하는 인터뷰가 긴장되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마 전, 모던아트 기자로부터 부산에서 그린 벽화를 취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오한결과 노을은 모두 바쁘다는 핑계를 댔고 결국 최무열이 대표로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기자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최무열 학생? 괜찮은 거죠?”
긴장한 최무열이 멍하니 눈만 껌뻑이자, 말끔한 정장 차림의 기자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소개를 먼저 할게요. 모던아트 박수호 기자입니다.”
기자가 주는 명함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최무열이 대답했다.
“아……. 모던아트. 전, 최무열입니다.”
“하하. 긴장했나 봐요. 간단한 인터뷰니까 편하게 하세요.”
잠시 자리를 비운 박수호 기자가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기자는 노트북을 켜며 최무열을 힐끔 쳐다봤다.
사실 박수호 기자는 이번 인터뷰가 썩 내키지 않았다. 까탈스러운 김재진 팀장이 본인 고향인 부산에 유명한 벽화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박수호 기자에게 취재를 강요한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할까 하다가 왠지 낯익은 벽화 그림을 보는 순간, 박수호 기자는 생각을 달리했다. 파주 카페 거리 작품을 그린 작가와 연관돼 있을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부산에 그린 벽화를 직접 보니 굉장하던데요.”
“아……. 기자님께서 직접 보러 가셨어요?”
“그럼요. 설마 SNS에 떠도는 사진만 보고 이렇게 인터뷰할 순 없죠.”
“그……. 그렇죠.”
“마을 주민을 만났는데, 청년들이 와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그중 한 분이 최무열 학생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고요.”
“맞아요. 다섯 명이 그린 거예요. 오늘 모두 바쁘다고 해서 제가 대표로 나왔고요.”
박수호 기자가 강한 호기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다섯 명이라…….”
“저 혼자 나와서 실망하셨나요……?”
박수호 기자가 화들짝 놀라고 말했다.
“아뇨!!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암튼 벽화 덕분에 마을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네? 정말요?”
“발길이 끓긴 마을에 새 기운을 불어 넣어줬잖아요. 노인들만 남은 동네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드니 당연히 마을 분위기가 달라지죠. 시들었던 골목상권도 살아나고 있다고 들었어요.”
최무열의 표정이 밝아졌다.
“와, 정말요? 봉사한 보람이 있네요.”
“봉사활동이라……. 그렇게 전문가 수준의 벽화를 봉사활동으로 그렸다고요?”
“고수가 한 명 같이 갔거든요.”
박수호 기자가 최무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고수?”
최무열이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한결 형님이 본인을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어쩌지, 실수한 건가?’
최무열의 당황한 표정을 놓치지 않고 박수호 기자가 물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군요. 유명 작가가 동행한 거죠?”
“아뇨……. 같이 갔던 사람 중에 작가로 데뷔한 사람은 없는데…….”
박수호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믿을 수 없군요. 부산 벽화 그림은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사실적 묘사를 잘하는 화가들은 세상에 널렸죠. 하지만 작품 전체에 작가의 마음을 새겨 넣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런 실력을 갖춘 사람이 아직 작가가 아니라고요?”
“이번에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최무열이 눈을 질끈 감으며 해선 안 될 말을 한 자신을 원망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박수호 기자가 살짝 미소지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공모전이요? 설마,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말하는 건가요?”
“……전 몰라요.”
박수호 기자는 자신이 방금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파주 그림부터 부산 벽화까지. 소문만 무성했던 작가의 정체라…….’
그가 명일문화재단 공모전에 참가한다면 당선은 확실하지 아닐까. 기자 생활 10년 동안 어떤 그림에서 대가의 아우라를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박수호 기자가 최무열 쪽으로 몸을 기울인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학생, 뭐 하나 물어볼게요. 솔직히 얘기해 줄래요?”
“…….”
“파주 카페 거리에 갑자기 이름 모를 작가가 나타나 두 개의 훌륭한 작품을 남겼어요. 회사에서는 한낱 SNS 홍보용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박수호 기자가 최무열의 눈을 쳐다봤다.
“파주하고 부산에 제가 직접 가 봤거든요. 그건 진짜 대단한 작품이었다고요.”
“…….”
“솔직하게 말해줄래요?”
“……뭘요?”
“파주 작품을 그린 작가가 이번 부산 벽화도 그런 거 맞죠?”
긴장한 최무열의 손바닥에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기자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니 거짓말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무열은 오한결 작가와 한 약속이 자신의 양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절대로 오한결 작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다섯 명 모두 그림을 전공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최무열의 흥분한 모습에 박수호 기자가 살짝 당황했다.
“그래요? 하지만…….”
박수호 기자가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다는 거 알아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죠. 이번 명일문화재단 공모전 당선자가 발표되면, 제가 그 당선자를 찾아가 파주와 부산 벽화 인터뷰를 하면 됩니까?”
“……아마도, 당선된다면야.”
박수호 기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물었다.
“당연히 당선될 거로 생각하잖아요. 아닌가요?”
날카로운 질문에 최무열은 대답 대신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박수호 기자는 최무열의 어설픈 행동이 몹시 귀여워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