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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21화 (21/202)

제21화 우주

“회장님, 신수진 문화재단 이사장 도착했습니다.”

잠시 뒤, 신수진 이사장이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 수진이 왔어요.”

신태진 회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어이구, 우리 딸 신수진, 어서 와라. 요즘 바쁘지?”

신수진 이사장이 회장을 살포시 안은 후 말했다.

“얼굴 보기 힘들어요, 아버지. 건강 잘 챙기세요.”

“그래, 고맙다. 일단 앉아라.”

신수진 이사장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문화재단 업무가 보통이 아니네요. 작가들 지원업무부터 전시 기획까지. 이번에는 공모전까지 하니까,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래도 너만큼 문화 예술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도 없잖니. 넌 어려서부터 모든 일에 완벽했으니까. 문화재단 일도 잘 해낼 거야.”

“아버지도 참…….”

신수진 이사장이 회장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아버지. 저를 왜 부르신 거예요?”

“딸, 얼굴 좀 볼까 해서…….”

신수진 이사장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 거짓말 못 하는 거 아시죠? 얼굴에 티가 너무 나요.”

“……그게.”

신수진 이사장이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

“아, 맞다! 아버지, 정말 개를 입양했어요? 복실이요. 너무 귀엽던데요.”

“하하. 복실이가 귀엽지. 네 엄마도 무척 좋아하더구나.”

신수진 이사장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버지는 동물 안 좋아하시잖아요. 털 날리는 것도 엄청 싫어하시고.”

신태진 회장이 당황했다.

“……나이를 먹으니 바뀐 거겠지. 뭐. 음.”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에요. 최근에 유기견보호소 후원도 하신다면서요.”

당황한 신태진 회장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회사에서 사회공헌활동을 하잖니. 프로젝트를 좀 키운 것뿐이야.”

“아무튼, 평소와 다른 모습에 놀랐어요.”

“내가 뭐 어쨌다고. 원래 강아지에 관심이 많았어…….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신수진 이사장이 휴대폰 화면에 공주처럼 꾸민 복실이 사진을 보여줬다.

“어머니가 애정을 듬뿍 주고 있어요. 유기농 사료에 천연 샴푸까지. 요즘 강아지 용품 쇼핑에 푹 빠져 지내신다니까요. 호호.”

“……암컷이었구나.”

다시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신수진 이사장.

“정말 수상하네요. 직접 데리고 온 강아지 성별도 모르시고.”

신수진 이사장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무슨 부탁이라도 하려고 부른 건 아니시죠?”

신태진 회장이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부탁은 무슨……. 딸 얼굴도 보고 맛있는 식사도 하려고 부른 거지…….”

신수진 이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맞네요. 부탁! 어떤 부탁인데요?”

“……아니 뭐, 그냥 물어볼 게 있어.”

잠시 뜸을 들인 신태진 회장이 말을 이었다.

“공모전 관련해서 말인데.”

“아버지 그만!!!”

신수진 이사장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놀란 신태진 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진아…….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냐?”

“오케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신태진 회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니……?”

“아버지, 이번 공모전 관련해서 제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 어떤 청탁도 심사에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걸고 그 약속은 꼭 지킬 겁니다.”

신수진 이사장의 기세에 눌린 신태진 회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청탁이라니. 오해하지 마라. 난 널 격려하려고 꺼낸 말인데.”

신수진 이사장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요? 제가 또 오해했나요? 호호호.”

“수진아, 너는 성질 좀 죽여라. 간 떨어질 뻔했잖니.”

“죄송해요. 아버지.”

띠리리. 띠리리.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받은 신수진 이사장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말했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저녁에 복실이도 볼 겸 집으로 갈게요. 이따 봬요, 아버지.”

“그래, 바쁜데, 어여 가봐.”

신수진 이사장이 요란하게 회장실을 나가자, 양승호 비서가 슬쩍 들어와 문을 닫았다.

“회장님, 오한결 작가님 말씀은 해보셨습니까?”

“입도 뻥긋 못했어. 어쩌면 잘 된 것일 수도…….”

* * *

이젤에 앉아 빈 캔버스를 응시하는 오한결.

공모전 접수 기한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이제는 예술 영혼을 불태워 캔버스에 작품을 그려 넣어야 한다.

회귀 전, 수없이 지원했던 공모전의 당선 작품을 떠올려 봤다.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 특색 없고 밋밋한 작품이거나 너무 개성이 넘쳐 기괴해 보이는 작품들. 어떻게 저런 작품이 당선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내곤 했다.

무엇보다,

순수예술의 죽음을 알리는 미술계의 썩은 곰팡내가 역겹다. 무언가 잘못됐다. 몇몇 작가들은 작품보다 권위에 집착하고 치열한 작품을 향한 고민은 사라진 채 아무런 감동도 없는 작품만 기계적으로 찍어내고 있다.

정말 대중들은 그들의 안일함과 게으름을 눈치채지 못할까? 절대로 대중의 수준을 낮게 평가해선 안 된다.

예술이란 언제나 대중의 시선에서 해석되고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중이 외면한 한국 미술계는 스스로 반성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세월을 역행한 미술계는 새로움을 추구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를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일명 전위예술이라 불렸던 그것은 이성에 기반한 근대성에 환멸 했고, 결국 비이성주의에 방향을 돌렸다.

회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예술활동으로 이어진 아방가르드는 유럽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되었다.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 거부, 기술과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을 옹호했다.

참고 자료를 찾기 위해 예술인 카페에 접속한 오한결은 적나라하게 적인 공모전 당선 팁과 노하우를 발견하고는 몹시 화를 냈다.

‘이렇게 엉망일 수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예술계의 고질적인 보수성에 있고, 예술가들의 ‘용기’ 부족일 수도 있다. 팔리는 작품, 상업적인 작품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려는 예술가의 처지도 알겠으나, 그것 또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한결은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의 새로운 도전은 무엇을 표현해야 할까. 본능적으로 꿈틀대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자 어떤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빛의 이야기’

‘점과 선의 무질서’

회귀 전, 추상예술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랐던 오한결.

그때의 그 감각이 되살아나 오한결을 부르고 있다.

‘빛과 점과 선으로 무엇을 그려내야 할까?’

띠링. 띠링.

깊은 고민에 빠진 오한결을 깨운 건 휴대폰 문자 알람이었다.

「한결 학생, 아트화랑으로 와요. 요청한 물건 준비했어요.」

“맞다! 삼각지 화랑거리!”

오한결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 * *

오한결은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을 지그시 바라보며 작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은 추상화를 낯설게 느꼈던 홍철수 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삼각지 화랑거리를 빛과 점과 선으로 표현하겠다고? 그게 가능해……?”

홍미숙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한결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

홍미숙이 오한결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어투로 말을 이었다.

“김환기 작가의 <우주>와 닮았어. 그렇지 한결 학생?”

“맞아요! 단번에 알아내다니, 멋져요, 누나!”

“사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작가거든.”

잠깐 고민하던 홍철수 사장이 손가락을 튕기며 감탄했다.

“옳거니! 김환기 작가의 <우주>라니……. 이제 알겠어. 한결 학생이 어떤 형식의 작품을 그리려고 하는지.”

오한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분 모두 김환기 작가를 잘 아시니까. 너무 좋은데요. 하하.”

홍철수 사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내겐 좀 어려운 작품이야. <우주>라는 작품이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는 건 알고 있지. 100억에 거래됐다던데.”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람들은 김환기 작가의 작품보다 작품 거래 가격에 관심을 보이죠. 그럴 만도 해요. 워낙 큰 금액이잖아요.”

“정확히 얼마에 거래됐는데?”

“2019년 11월 23일 홍콩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 작가의 <우주>가 131억 8천 7백만 원에 낙찰됐어요.”

“와!! 방금 그 얘기 듣고 소름 돋았어. 어마어마하구나.”

“역대 한국 작가 작품 중 제일 비싸게 거래되는 9개가 김환기 작가 작품이에요. 이중섭 ‘소’ 작품이 8위에 머물고 있고요. 그만큼 김환기 작가는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얘기죠.”

홍미숙이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한결 학생이라면 나중에 10위 안에 들지 않을까.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

오한결은 대답 대신 감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각한 표정의 홍철수 사장이 휴대폰 화면을 보며 말했다.

“지금 <우주> 작품을 보고 있는데, 이해하기 힘드네. 왜 이렇게 점을 찍은 걸까. 작가는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오한결이 대답했다.

“글쎄요, 감상 방법엔 정답이 없죠. 무엇을 느껴야 한다는 그 자체가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인 거죠.”

“……그래도 미술 평론가들이 분석한 게 있지 않을까? 점은 어떤 상징이고 관객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홍철수 사장을 바라보며 오한결이 대답했다.

“김환기 작가의 생애를 들으시면 도움이 되실 거예요.”

“아, 그 방법이 있었구나. 아는 것이 좀 있니?”

오한결이 막힘없이 설명했다.

“김환기 작가는 초반에 일본에서 유학하며 아방가르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렇게 자유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하던 그는 돌연 뉴욕으로 떠났고 거기서 다양한 실험을 수없이 진행했어요. 그때부터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지고 점과 선들로 이뤄진 추상화를 그렸고요.”

“그 당시에는 꽤 용감한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

“맞아요, 그 결과,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해요.”

“저런, 그랬구나….”

홍철수 사장은 그동안 자신의 화랑을 스쳐 갔던 재능있는 작가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김환기 작가는 끈질긴 노력 끝에 ‘우주’라는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고향을 추억하고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캔버스에 점을 찍었다고 해요. 무엇보다 수묵화의 번짐 효과를 이용해 동양화의 독특한 효과를 적용했는데, 그게 신의 한 수였죠.”

“아, 그래서 먹먹함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거구나.”

“맞아요. 그리고 김환기 작품에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건, 작가가 밝혔듯이 그림이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오호, 그런 뜻이 있었구나.”

홍철수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감정이 자세한 설명을 듣자,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보이네. 점이 만들어 내는 질서와 균형……. 동양화의 번짐 효과가 더해져 더욱 신비스럽고 오묘해 보이는구나.”

김환기 작품에 매료된 홍철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오한결이 말했다.

“생전에 김환기 작가는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어요.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

그 말에 감동한 홍미숙이 눈시울을 붉혔다.

“뉴욕이라는 낯선 땅에서 찾은 균형이라니, 정말…….”

홍철수 사장이 벌떡 일어섰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당장 화랑거리 사장들을 만나야겠어. 한결 학생이 삼각지 화랑거리를 주제로 그런 훌륭한 작품을 만든다는데, 당연히 그들도 협조해야 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흥분한 홍철수가 가게 밖으로 나가버리자 오한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사장님이 저렇게 흥분한 건 처음 보네요.”

홍미숙이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충분히 오빠 마음 이해해.”

“그런가요……. 저야 그럼 고맙죠. 하하.”

“아, 참!”

홍미숙이 잠시 사라지더니 붉은색 케이크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께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주렴.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오한결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케이크 상자를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누나. 제가 번거롭게 한 건 아니죠?”

“절대로! 이걸 만들면서 얼마나 행복했는데. 다음에도 또 부탁해줘!”

“넵! 이거 너무 맛있어 보여요.”

홍미숙이 손바닥으로 오한결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어머, 상자에 담긴 케이크가 보이니. 농담은. 호호.”

“아…….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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