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사회공헌사업
사진을 정성스레 눈에 담은 오한결이 거대한 회색 벽 앞에 서 있다. 잠시 뒤 그는 춤추듯 유려한 붓놀림으로 인물의 형태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회색 벽에 그려지는 선들은 쌓이고 쌓여 대상의 입체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을과 최무열은 익숙한 듯 감상하고 있지만, 이풀잎과 차승현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한결아, 너 실력이 엄청나구나.”
“헐. 대가의 느낌이 물씬 풍기네…….”
그림에 집중한 오한결은 친구들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림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대략 한 시간이 흐른 뒤, 오한결이 붓을 내려놓고 말했다.
“인물과 배경을 대략적으로 그려봤어. 이제 너희들이 채워봐.”
노을이 신기한 듯 그림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은 선들로 대충 그린 것 같지만 멀리서 보면 완성된 형태가 정확히 보이네. 신기해.”
오한결이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히 봐봐. 표정, 근육, 배경의 자세한 형태는 없어. 이제 너희가 그려 넣으면 돼.”
차승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 그림을 망칠까 봐. 손을 못 대겠어…….”
오한결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수정해 줄 테니까. 다들 즐기면서 그리면 돼!”
모두 붓을 들고 각자 맡은 부분을 그리기 시작했다.
달리기하는 아이들을 그리던 노을은 그림을 그릴수록 마치 자신이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순수한 눈빛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무열은 놀다가 넘어져 엉엉 우는 아이의 모습을 그리며 방긋 웃고 있었다.
이풀잎과 차승현은 아이를 응원하는 할머니를 그리는데, 어쩐 일인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운 할머니를 떠올리는 걸까?
오한결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그림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흔히, 보이는 대상을 묘사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주관적 행위임이 틀림없다.
저들은 모두 그림에 자신의 진심을 투여하고 있다. 이런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면 어떤 그림이 세상에서 빛날 수 있을까.
즐겁게 그림을 완성한 친구들은 오한결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때? 이상하지 않아? 너무 엉망이지. 고칠 수 있겠어?”
오한결이 보기엔, 벽화 작품 모두 충분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오한결이 처음 잡았던 그림의 형태가 어그러지고 인상이 조금 기울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정확한 형태가 아니니까.
“이대로 채색에 들어가도 좋겠어.”
모두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안 돼!”
놀란 오한결이 물었다.
“왜……?”
노을이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린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니까 오한결 작가님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사실적인 묘사가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어. 개성이 중요한 거지.”
최무열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을 주민들 얼굴이잖아요. 정말 잘 그린 벽화를 선물하고 싶어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상을 사진처럼 재현한 그림만큼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도 없으니까. 최무열의 간절함에 공감한 오한결이 다시 붓을 들었다.
그들이 그린 세부 형태를 손보기 시작하는 오한결. 지우지도 덧칠하지도 않았는데, 오한결의 마법 같은 실력에 의해 벽화 속 그림의 형태는 사진처럼 정밀해져 갔다.
오한결의 그림 실력에 모두 말문이 막혔는지, 탄성에 가까운 감탄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오한결이 말했다.
“자, 됐습니다. 이제 색칠해볼까요?”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했던 오후의 태양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갔다. 붉은 하늘이 찬 바람을 몰고 올 때, 오한결과 친구들의 벽화는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최무열의 연락을 받은 할머니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벽화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오마야. 시상에. 예쁘게도 그렸구먼.”
“이거 내가? 젊고 이쁜 게 꿈만 같네. 내가 이마이 예쁘긴 했지.”
“옛날 생각나는구먼. 우리 아덜, 어렸을 때 저랬지.”
흐뭇하게 벽화를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마음이 환한 꽃 같은 젊은이들. 너무 고마워. 추억을 되살려주다니.”
할머니가 덥석 최무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자, 다들 배고프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렸으니까. 은자 먹으러 가자고.”
“네!”
최무열이 눈치를 살피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한 시간 안으로 식사 완료해야 합니다. 서울행 기차 시간이 거의 다 돼서요. 물론 이번에도 무궁화호…….”
노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또 무궁화호라니. 도착은 밤 12시에 하겠네.”
최무열이 슬쩍 말했다.
“아니, 새벽 1시 도착.”
“야!”
* * *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명일그룹 회장실에 신태진 회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양 비서, 우리나라 유기견 보호소가 얼마나 있나?”
사전 조사를 마친 양승호 비서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최근 실시한 농림축산식품부 실태조사 결과. 전국 82곳 정도 되지만 드러나지 않은 곳을 포함하면 150여 곳이 넘을 거로 예상합니다.”
오한결이 보여준 보호소를 떠올리던 신태진 회장이 말했다.
“지난번에 보니까 매우 열악한 환경인 것 같은데, 국가에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건가?”
양승호 비서가 재빨리 자료를 뒤진 후 간신히 대답했다.
“사설 보호소는 관리할 법적 근거가 부족해 사실상 방치된 실정입니다.”
양승호 비서가 다른 자료들을 살핀 후 말을 이었다.
“전국 사설 보호소 절반 이상이 소장 한 명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운영비 대부분은 후원금과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하던 신태진 회장이 창가로 다가가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양 비서, 자네 의견을 묻고 싶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돌려 양승호 비서를 바라봤다.
“명일그룹에서 사설 유기견 보호소를 후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회사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네. 무명작가의 그림을 구매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면 이사들이 동의해주겠나? 또 반대 여론이 형성되면 그것도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야.”
“한 해 수십억 예산이 필요한 만큼, 그에 맞는 명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태진 회장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리고?”
“회사 자금이 투입된 만큼 오한결 작가의 그림을 개인 소유하실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
“음……. 뾰족한 수가 있나?”
“회사 로비에 전시하시죠. 오한결 작가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것이고 추후 그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구매할 기회는 다시 올 것입니다.”
신태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쉽지만 그럴 수밖에. 빨리 오한결 작가가 유명해져야 할 텐데 말이지.”
양승호 비서가 안경을 올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명일문화재단 아티스트 공모전에 출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호, 그러겠구먼. 이번에 문화재단에서 칼을 갈았다더군. 예술가라면 거부할 수 없는 혜택들이 많다고 들었어.”
“공모전 당선 결과가 나오면 그때 그림을 제작하시죠. 세상 사람들 모두 오한결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을 때 말입니다.”
“좋았어! 양 비서 제법이야.”
얼굴이 살짝 붉어진 양승호 비서가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일단, 회장 명의로 오한결 작가 어머니가 봉사하시는 유기견 보호소에 후원금을 보내주게나.”
“네, 회장님.”
* * *
띠링.
단톡 알림 메시지가 울리자 오한결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최무열: 대박 사건! 알려드립니다.」
「노을: 뭐야, 갑자기……. 불안하게.」
「오한결: …….」
「최무열: 우리가 그린 벽화가 잡지에 실렸어! 다들 모던아트 알지?」
「노을: 와우. 잘 됐다. 어떻게 벌써 소문이 났지. 신기하네.」
「최무열: 이미 SNS에 벽화 사진이 돌고 있어. 하하하하.」
「노을: 어머, 잘 됐다. 어르신들 적적해하셨는데.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가면 활기가 넘치겠네.」
「최무열: 이풀잎 누나랑 차승현 형님에게도 고맙다고 내가 연락했어.」
「오한결: 기특하네. 잘 했어!」
「최무열: 그리고 모던아트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다들 시간 좀 내줘.」
「오한결: 아……. 인터뷰……. 벽화 봉사를 기획한 건 무열이니까, 무열이가 대표로 하면 어떨까?」
「노을: 맞아. 이번 벽화 프로젝트는 무열이 작품이지. 화이팅!」
「최무열: 왜? 다 같이 하면 좋잖아. 인터뷰 떨린단 말이야!」
「오한결: 음. 솔직히 난 바빠서…….」
「노을: 나도.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네.」
「최무열: ……님들 좀 치사한 듯.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 * *
오한결과 양승호 비서가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었다.
오한결이 윤기가 흐르는 초코케이크를 포크로 조각내 오물오물 씹어 삼키자, 기다렸다는 듯 양승호 비서가 말을 꺼냈다.
“회장님께서 고민이 많으셨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뒤 오한결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회장님께서 후원을 결정하셨나요?”
“그럼요. 좋은 일을 하는 건데요.”
오한결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 됐군요. 이제 제가 그림을 선물할 차례겠죠?”
양승호 비서가 반듯한 자세로 정중하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그림 제작을 좀 미뤘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그림을 늦춰달라고? 오한결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회장님께서 그토록 원하던 그림 아니었습니까? 늦출 수 있다면 저도 좋지요. 곧 바빠질 거라서요.”
양승호 비서의 눈썹이 꿈틀댔다.
“무슨 일로 바쁜지 여쭤봐도 될까요?”
“공모전에 나가볼까 해서요.”
오한결의 말에 양승호 비서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 했다. 오한결 작가가 명일 문화재단 공모전에 참가할 거라는 자신의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오한결이 양승호 비서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혹시, 제가 공모전에 당선되면 그때 작품을 의뢰하고 싶은 건가요?”
푸우우.
오한결의 말에 놀란 양승호 비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신도 모르게 내뿜고 말았다. 양승호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다행히 옷에 튀지 않은 걸 확인한 오한결이 티슈를 건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비서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잖아요.”
티슈로 옷에 묻은 커피를 닦은 양승호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공모전 이후에 작품을 받고 싶어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작품 제작 요청을 뒤로 미룬 것도 그렇고. 공모전 참가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결국에는 답은 하나 아니겠어요?”
“……죄송합니다.”
오한결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왜 죄송합니까? 좋은 전략이에요. 지금은 무명작가 신세지만 이후 몸값을 생각 안 할 수 없겠죠.”
“감사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하지만 지금 당장 사료값도 없는 유기견 보호소가 많다고 들었어요. 공모전 이후 그들을 도우면 너무 늦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일그룹 만큼 대규모로 사회공헌사업을 하는 기업도 없습니다. 이번에 회장님의 특별 지시로 전국에 열악한 유기견 보호소에 사료값을 충분히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와우,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기대 하겠습니다. 작가님.”
오한결과 양승호 비서는 각자 승리의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