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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9화 (19/202)

제19화 거대한 회색 벽

“으아아악!”

갑작스럽게 들리는 동생의 고함에 놀란 오한결이 급히 거실로 뛰쳐나와 오한수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야!”

오한수가 책상에 앉은 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난 끝났어……. 내일까지 번역해가야 하는데. 학사경고 먹게 생겼다고…….”

“뭐? 학사경고?”

“난 틀렸어. 형은 잘 나가니까 이제 나를 버려…….”

“뭔 소린지…….”

오한수의 엄살에 오한결은 책상에 놓인 자료들을 살폈다. 대부분 영어 논문자료였고 중간중간 형광펜으로 지저분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오한결이 자료를 집어 들고 물었다.

“시험 한 번 못 봤다고 학사경고는 아닐걸. 걱정 마.”

오한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수업을 많이 빼먹었거든. 교수님이 최후의 과제를 내줬는데, 내일까지 논문 번역해오면 F는 안 준다고 하셔서…….”

오한결이 몹시 놀라 소리쳤다.

“뭐! 수업을 빼먹어? 야! 정신 안 차려?”

오한수가 덥석 오한결의 손을 잡고 비굴한 표정을 연기했다.

“……제발 부모님께 얘기하지 마.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고, 형은 이해하지? 천재 작가잖아? 안 그래? 위대한 아티스트 형님???”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동생의 표정에 오한결이 피식 웃었다.

“됐다, 이놈아. 그래, 그 사정이 뭐야? 형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머뭇거린 오한수가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내가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어서. 공연 준비 때문에…….”

“뭐? 네가 연극을 한다고?”

오한결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자, 오한수가 예상했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오한결을 노려봤다. 순간 미안해진 오한결이 표정을 다듬고 진지하게 물었다.

“……연극이라. 셰익스피어 햄릿이라도 연기하는 거야?”

오한수가 너무 놀라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으악! 어떻게 알았어?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한껏 기대를 품은 동생을 배신할 수 없어 오한결이 주춤하며 변명했다.

“그게……. 원래 최고의 배우는 햄릿 정도는 연기해 줘야…….”

“형!! 너무 멋진데. 역시! 진정한 아티스트!!”

“…….”

오한결은 잠시 동생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표정과 몸짓. 화려한 조명에 홀로 빛나는 동생의 모습이 무척 낯설지만, 자랑스러워 보였다.

오한결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영어 자료를 바라봤다.

“아무튼, 논문 번역 과제만 해가면 되는 거야? 미리미리 하지!”

오한수가 두꺼운 논문을 양손에 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이 두꺼운 걸 언제 하느냐고! 이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어. 암, 그렇고 말고! 그래서 안 한 거야…….”

오한결이 논문 제목을 확인했다.

「국내외 기업의 지배구조 비교 및 상장기업의 추정가치」

오한결도 논문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경영학과 1학년 과제가 논문 전체 번역이면 문제가 있는데……. 생각보다 두꺼운 논문에 오한결도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과제가 이렇게 무식한가? 논문 전체를 번역해오라니.

“이걸 정말 다 하래?”

오한수가 침대 모서리에 털썩 앉고는 어설픈 연기를 시작했다.

“난 이미 틀린 거지? 그치? 아냐,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이렇게 학교 짤리면, 바로 연극 배우로 시작하면 돼. 형은 나의 가치를 알아볼 거야. 같은 예술 계통이니까…….”

오한결이 동생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어서 일어나!”

“응? ……영어도 할 줄 알아? 아, 맞다! 미국 간다고 했었잖아. 그럼 영어 정도는 껌이겠네.”

오한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내 동생이지만, 말이 너무 많아…….’

오한결이 논문 한두 페이지를 훑어보고 말했다.

“독해는 문제가 안 되는데, 번역에서 걸리네. 전문용어도 많이 있고.”

오한수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내가 전공 서적 찾아볼게. 인터넷 서치해도 금방 나와.”

“좋아, 내가 읽으면서 말로 번역해 줄 테니까, 받아적어. 알았어?”

“와우! 형! 진짜 정체가 뭐야. 어메이징하다. 역시 허풍이 아니었어. 진짜 천재가 된 건가……. 비결이…….”

오한결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간이 의자를 가지고 왔다.

“시작하자.”

그렇게 그들은 세 시간 동안 번역에 집중했다.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오한수가 눈을 껌벅이며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진 동생을 오한결이 안쓰럽게 바라보며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침대로 가서 자. 나머지는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좀비처럼 벌떡 일어난 오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눕고는 바로 잠들어 버렸다.

기지개를 켠 오한결은 차분히 나머지 번역문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든 과제를 내주다니. 담당 교수도 참 별로네…….’

삼십 분 뒤, 오한결이 마지막 문장을 입력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다했다! 곧 아침이 오겠구나. 오랜만에 밤을 새웠네.’

힘들지만 흐뭇한 표정을 짓는 오한결이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한 오한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든 오한수를 쳐다보며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야! 오한수 이 멍청한 놈아!!”

깜짝 놀란 오한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전쟁 났어? 아니면 불?”

오한결이 동생의 수첩을 손에 들고 소리쳤다.

“야, 여기 수첩에는 논문 Abstract 번역이라고 적혀있잖아!”

“……그래, 논문 번역. 뭐 문제야?”

깨질듯한 두통에 오한결은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Abstract, 논문 초록 몰라? 논문 첫 페이지에 연구주제, 방법, 방향 등 몇 줄짜리 요약 내용! 논문 전체가 아니라!”

오한수는 말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하긴 과제가 많다고 생각했어. 잘 못 알았구나.”

“……잘 못 알았구나?”

오한결이 폭발했다.

“야! 삼십 분도 안 걸릴 과제를 새벽까지 하게 만들다니! 너 죽었어!”

오한수가 번개처럼 재빨리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갔다.

“엄마!! 살려줘!!! 헬프미!”

* * *

최무열이 기획한 벽화 봉사를 하기로 한 날.

다행히 하늘도 기분 좋게 푸르고 화창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오한결은 양손 가득 짐을 든 노을과 최무열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둘 다 일찍 왔네.”

“오한결 작가님! 이쪽으로!”

최무열이 짐을 내려놓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

“떨려서 잠이 안 왔어요. 오늘 벽화가 성공적이어야 할 텐데…….”

노을이 최무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한결 작가님도 있는데 뭔 걱정. 우린 오늘을 즐기면 된다고! 오케이?”

든든한 오한결을 바라보자 최무열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결이 형 친구들은?”

오한결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곧 오겠지. 아직 약속 시간 안 됐잖아. 우리가 빨리 온 거야.”

잠시 뒤 이풀잎과 차승현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오한결 곁으로 다가왔다.

“마이 프렌드. 한결! 우리 왔어.”

“어서 와!”

오한결은 친구들에게 어색하게 서 있는 노을과 최무열을 소개했다.

“내가 얘기했지? 벽화 알바하면서 만난 친구들이야. 여기 이 친구는 노을이고 거리 예술가야. 그리고 우리 무열이는 H대 미대생. 멋지지?”

노을과 최무열이 꾸벅 인사를 하자, 이풀잎과 차승현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난 미술학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요. 여기 승현이는 레크레이션 강사.”

“우와! 멋져요. 두 분 다 얼굴이 거의 연예인급인 듯.”

이풀잎이 찡긋 윙크하며 말했다.

“오늘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얼굴이 붉어진 최무열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고맙죠. 오늘 멋진 벽화 그려봐요. 우하하하.”

노을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한 최무열이 급히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런, 벌써 시간 다 됐네요. 빨리 열차에 오르지 않으면 놓치겠어요.”

노을이 흥분하며 말했다.

“어머……. 부산 오랜만에 가본다. 호호.”

이풀잎이 웃으며 대답했다.

“KTX 타면 금방이에요. 우리 나중에 같이 놀러 가요.”

“네! 너무 좋아요!”

최무열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오한결이 걱정돼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KTX라니……? 우린 무궁화호 타고 갈 건데…….”

노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뭐!! 미쳤어?”

차승현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다들 왜 그래? 아무거나 타면 되잖아.”

이풀잎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궁화호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5시간 걸려…….”

“…….”

무궁화호에 착석한 오한결과 친구들은 빈티지 느낌의 열차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풀잎은 명절에 무궁화호를 타고 시골에 내려갔던 추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오한결과 친구들은 연신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략 두 시간이 지나자, 결국 노을이 다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세 시간이나 더 가야 해요. 입이 아파서 수다도 못 떨겠어요.”

이풀잎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오늘은 분명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차승현이 끼어들었다.

“난 괜찮은데. 교통비 모두 무열 씨가 부담한 거 아냐? 5명 KTX 승차권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 더군다나 아직 대학생이라며. 나 같아도 무궁화호를 선택했을 거야. 굿 초이스!”

“무슨 소리야! 우리가 걷어 간 돈에 교통비 포함이야!”

“……그렇구나. 천천히 바깥 구경하면서 가면 되지. 많이 낭만적이잖아…….”

최무열이 속삭이듯 차승현에게 말했다.

“역시, 예술하는 분이라 낭만을 아시네요. 오늘 여행의 콘셉트는 낭만입니다.”

“……아, 네.”

* * *

부산의 어느 후미진 골목.

경제 성장과 함께 화려한 외관을 가지게 된 부산. 그 뒤에 숨겨진 골목은 여전히 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오한결과 친구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있다. 최무열이 앞장서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힘내세요!”

“…….”

한참을 더 오르자 아찔하게 치솟은 거대한 회색 벽이 나타났다. 오한결은 회색 벽을 보는 순간, 이곳에 주민들의 무채색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먹먹한 생각이 들었다.

최무열이 회색 벽을 바라보며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제야 모두 계단에 털썩 주저앉고 각자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아우, 힘들어!”

최무열이 감탄사를 내뱉자, 그들 모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렁이는 푸른 바다 위로 햇볕이 쪼개지며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답다.”

모두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자, 바다 냄새를 품은 시원한 바람이 그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기분 좋게 말려주었다.

“속이 뻥 뚫리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생수를 꿀꺽꿀꺽 마시던 오한결이 말했다.

“모두 눈에 푸른 바다를 담아봐. 오늘 이 풍경이 예술 활동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모두 말없이 푸른 바다를 응시하며 각자의 생각에 빠지던 순간,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한 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그 학생들이구먼.”

모두 일제히 일어나 할머니께 고개를 꾸벅 숙이자, 최무열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전화 드린 최무열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다섯 가구도 안 남은 오래된 동네를 이렇게 꾸며준다고 하니 고맙네 그려. 예전이야 동네 주민도 많았지만, 이제는 다 떠나고 없어. 예전엔 몰랐는데, 지금은 회색 벽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말이지. 그나저나 동네가 누추해서 어쩌누.”

“전혀요. 이렇게 예쁜 동네는 흔치 않을 거예요.”

“청년이 말도 참 예쁘게 하네. 너무 고생하지 말고. 후딱 그림 그리고 쉬었다가 가요.”

최무열이 슬쩍 말을 건넸다.

“할머니 제가 부탁드린 건…….”

“아!”

할머니가 주머니를 뒤져 사진첩을 내밀었다.

“옛날 사진 보니까 그때가 그리워지더라고. 이제는 다 지난 세월이지만.”

“저희가 벽화에 담을게요. 할머니 적적하지 않게요.”

“그러면 너무 좋지.”

할머니가 떠나자 오한결이 물었다.

“그 사진첩은 뭐야?”

“동네 추억이 담긴 사진첩. 오늘 저 까칠한 회색 벽에 추억을 그릴 거거든.”

이풀잎이 다가와 사진을 구경했다.

“어머, 흑백 사진도 있네. 이야, 진짜 오래된 사진이다.”

차승현이 물었다.

“그럼, 흑백으로 그릴 건가요?”

“아뇨. 오늘 제가 다채로운 색을 준비했어요. 흑백 사진을 컬러로 바꿔보죠. 하하.”

네 사람은 바닥에 50장이 넘는 사진을 펼쳐 놓고 벽화에 쓰일 사진을 골랐다. 그들은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사진 속 마을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리고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게 안타깝기도 했다.

“오! 이게 제일 좋은데.”

최무열은 어른들과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사진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동네 초등학교 운동회 사진인 것 같다.

이풀잎이 흥분하며 말했다.

“너무 좋다. 이 사진을 잘 활용하면 역동적인 마을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거 같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이풀잎 의견에 동의했다. 차승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겠지? 할머니께 멋진 벽화를 선물하고 싶어.”

최무열이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에겐 오한결 작가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모두 오한결의 얼굴을 바라보자, 오한결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우선 마음껏 그려봐…….”

각자 챙겨온 물건들을 가방에서 꺼내자, 상당한 분량의 미술 재료가 바닥에 쌓였다.

“시작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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