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믹스견 복실이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 사원이 문화재단 회의실에 앉아 말없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종이 넘기는 소리, 거칠게 필기하는 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날카롭게 들리고 있다.
신수진 이사장이 여느 때처럼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굿모닝.”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이 벌떡 일어섰다.
“오셨어요. 이사장님.”
신수진 이사장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자기들도 제주도 가봐. 출장으로 갔는데도 너무 좋더라.”
이나영 팀장이 기회를 엿보다가 끼어들었다.
“우와. 답답한 도시보다 제주도가 백배 낫죠. 부럽습니다. 이사장님!”
“그럼 우리도 엠티갈까? 제주로도?”
“…….”
“싫구나?”
“……아뇨. 좋습니다……. 와……. 신난다…….”
신수진 이사장이 직원들의 힘없는 환호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됐어요. 나도 직원들하고 가면 불편하거든요!”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에 앉자 최하늘이 회의자료를 가지고 왔다. 신수진 이사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자료를 세심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명일문화재단이 처음 하는 예술 공모전이니까 꼼꼼하게 보자고요.”
눈치를 살피던 이나영 팀장이 입을 열었다.
“공모전 공고는 이미 홈페이지 업로드와 언론사 보도자료를 통해 공지된 상태입니다. 수많은 예술가 지망생과 신인 및 기성작가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얘기도 있고요. 아마도 우리나라 역대 공모전 통틀어 제일 많은 작품이 접수될 것 같습니다.”
“흠, 그건 두고 봐야겠죠!”
“…….”
신수진 이사장이 냉철하게 물었다.
“심사방법은 어떻게 되죠?”
“예심과 본심으로 진행할 예정이고요, 본심은 심사위원들끼리 치열한 토론을 통해 한 작품을 선정할 예정입니다.”
“좋습니다. 심사위원이 중요하겠네요. 예심과 본심 심사위원은 별도로 가나요?”
“네. 예심 심사위원 30명, 본심 심사위원 3명이고요. 예심은 전국 예술대 교수를 대상으로 최근 5년간 국내 작품 활동을 평가 기준으로 선정할 예정입니다. 본심도 국내 예술대 교수를 대상으로 선발하지만, 예심과 다르게 3년간 해외 전시 경력과 해외 예술계의 평판을 기준으로 선발할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신수진 이사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섭외가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심사비를 다른 공모전보다 두세 배를 더 드린다고 하세요. 그리고 추후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명일 문화재단에서 작품 활동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정보를 흘리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네.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요. 역시 이사장님이십니다!”
신수진 이사장은 직원의 아첨에 유쾌하게 웃으며 물었다.
“본심 심사위원 후보가 정해졌나요?”
“세 후보가 결정됐습니다. 한국대 김보름 교수, 국립예술교육원 데이비드 오 교수, H대 심수빈 교수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세 명의 교수 이름을 노트에 적었다.
“좋습니다. 훌륭한 분들이네요. 본심 세 분은 제가 직접 만나보도록 하죠.”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은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까탈스러운 교수를 상대로 섭외 업무를 진행하는 것만큼 피곤하고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었다. 신수진 이사장이라면 오히려 그들이 눈치를 보는 인물 아닌가. 어쩔 수 없다. 가진 자는 힘 있는 목소리를 내는 법이니까.
신수진 이사장의 질문이 이어졌다.
“창작지원금은 1억이라고요? 더 줄 수는 없나요?”
“1억도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상금만 있는 게 아니라 개인전과 해외 레지던시, 아뜰리에까지 제공까지 할 예정입니다.”
찜찜한 표정을 짓는 신수진 이사장.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개인전은 어디서 하죠?”
“아리미술관이 유력합니다.”
“해외 레지던시라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 예술 선진국 대상입니다.”
“좋습니다. 준비가 아주 잘 된 거 같네요.”
침묵하던 최하늘이 슬쩍 말했다.
“아……. 아뜰리에는 안 물어보셔서요.”
“이미 알고 있어서요. 문화재단 옆 신축 건물이죠?”
“……네.”
신수진 이사장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최하늘 씨.”
“네.”
“질문 잘하셨어요. 회의는 자신감으로 하는 겁니다. 앞으로도 질문 계속해주세요.”
이나영 팀장이 환하게 웃는 최하늘을 보며 같이 웃음 지었다. 신수진 이사장이 피곤한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하며 말했다.
“출장 때문에 피곤하네요. 특별한 일 없으면 퇴근해봐도 되겠죠?”
이나영 팀장과 최하늘이 동시에 외쳤다.
“네!”
* * *
유기견보호소에 들어선 신태진 회장이 급히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냄새가 심하군요. 왜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죠? 오한결 작가님!”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자 방금까지 꼬리를 살랑대던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몇몇 개들은 철장에 매달리듯 다리를 걸치고 침을 질질 흘리며 낯선 이들을 경계했다.
양승호 비서가 신태진 회장 곁에 바싹 붙고는 주위를 경계했다.
오한결이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회장님과 그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인상을 구기던 신태진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새로운 작품 소재가 개들과 관련된 건가요? 그래서 영감을 받으려고 이곳에?”
“아마도……. 그전에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도움이요?”
때마침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 남성이 사료를 담은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어이구. 안녕합니다.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김용인 소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오한결입니다.”
“박선희 선생님 아드님이군요. 말씀 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곧 이쪽으로 오시기로 하셨어요.”
신태진 회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머니?”
“네, 이곳에서 어머님이 자원봉사하고 계셔서요.”
“그렇군요. 너무 좋군요. 유기견과 예술이라니.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가 되겠어요. 내가 뭘 도우면 될까요? 작가님.”
오한결이 김용인 소장에게 물었다.
“이곳을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어요?”
김용인 소장이 사료 수레를 내려놓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여기는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유기견보호소인데, 요즘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운영이 힘들 지경입니다. 인근 주민들은 땅값 떨어진다는 이유로 아우성이고 시시때때로 시청에 민원은 왜 그렇게 많이 넣는지, 아주 미쳐버리겠어요. 이 아이들 좀 보세요. 눈병에, 피부병까지 달고 사는데 병원비와 약값은 터무니없이 비싸서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물었다.
“정부 지원이 없나요?”
“백 프로 후원금과 기부금으로 센터를 운영하고 있어요. 사료값이 없을 땐 몇몇 동물보호단체에 요청하면 기부해주고 있지만, 대부분 외상으로 사고 나중에 후원금으로 갚는 처집니다. 그런데 경기가 더 안 좋아지면서 그나마 있던 후원금도 많이 줄어들었어요.”
오한결이 거들었다.
“제가 알아보니까, 선진국들은 유기동물 보호와 관련해서 체계적인 법령이 잘 돼 있더군요. 영국, 독일 등 유럽 국가의 경우 반려동물보호에 대한 오랜 역사가 있어 국민의식 수준도 높고요.”
“그런 면에서 유럽은 천국이죠. 한국은 말이죠. 전문가도 부족하고, 법령, 정책 등 모든 게 미흡합니다.”
신태진 회장이 김용인 소장의 하소연을 집중해서 듣고 있자, 오한결이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다.
“회장님 생각은 어떤가요? 한국의 미흡한 동물보호 실태를 적나라하게 예술로 고발해 볼까 하는데요.”
회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예술이 가진 힘이란, 이성과 감성 모두를 흥분시키는 일 아니겠습니까. 오한결 작가님의 작품으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곳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정책과 법령 제정의 기틀을 마련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오한결이 슬쩍 말을 흘렸다.
“제 작품을 회장님이 사주실 건가요?”
“!!”
신태진 회장이 흥분으로 휘청하자 양승호 비서가 재빨리 부축했다.
“한결 작가님. 방금 그 말은. 그림을 그려주겠다는 건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다 들어줄게요.”
“돈은 안 받겠습니다.”
“!!”
신태진 회장은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다. 천문학적인 돈을 요구했다면 차라리 나았지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익숙한 거래 방식이니까. 하지만 지금 오한결 작가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신이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그의 작품을 포기해야 할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전국에 유기견보호소를 명일그룹에서 후원해주세요.”
신태진 회장의 두 눈이 커졌다.
“정말 그게 답니까?”
“이곳을 보세요. 법적으로는 동물이 물적 지위를 갖는다고 하지만, 엄연한 생명체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자신의 삶을 위한 복지만 신경 쓸 뿐, 함께 살아가는 동물 복지에는 나 몰라라 하고 있어요. 명일그룹이 나서준다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화하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주세요. 전국에 있는 유기견보호소에 후원을 하려면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은 아닙니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왈. 왈. 왈.
힘차게 울리는 강아지 짖음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뒤를 향했다. 박선희가 파르르 떨고 있는 새끼강아지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오한결이 강아지를 건네받고는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결정하시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귀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오한결이 강아지를 내밀자, 신태진 회장이 얼떨결에 조심히 품에 안았다. 신태진 회장이 강아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야, 귀엽구나. 우쭈쭈.”
박선희가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복실이에요. 암컷이고요.”
신태진 회장이 복실이를 품에 안고는 오한결에게 말했다.
“덕분에 식구가 생겼군요. 하하.”
* * *
신태진 회장이 강아지를 안고 집에 들어오자 이현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 예뻐라. 이게 무슨 일이에요! 꺄악!!! 귀여워!!”
“…….”
이현미가 신태진 회장 품에 쌔근쌔근 잠든 강아지를 조심스레 넘겨받았다. 신태진 회장이 대수롭지 않듯 말했다.
“새 식구가 늘었어. 하하. 당신 강아지 좋아하잖아. 잘 키워보자고.”
“어머. 당신 진심이죠? 평생 애완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하더니. 이게 뭔 일이에요? 털 날리는 거 싫다고 끔찍하게 생각하던 양반이……. 어머, 별꼴이야.”
신태진 회장이 몇 번 헛기침하고는 기회를 엿본 뒤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현미가 양승호 비서에게 물었다.
“신 회장님은 동물을 안 좋아하시잖아요……. 이게 말이 돼요?”
“아……. 그게.”
우물쭈물하던 양승호 비서가 그간 신태진 회장와 오한결 작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집중해서 듣던 이현미가 크게 웃었다.
“호호호. 오한결 작가라는 사람이 대단하군요. 작가라고요? 어디 소속이죠?”
“아니, 아직 정식으로 데뷔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아……. 맞아요. 회장님이 말씀해주신 적이 있네요. 파주라고 했나요?”
“네, 파주 카페 거리에 오한결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고민하던 이현미가 휴대폰을 들고 신수진 명일 문화재단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 딸. 엄마가 부탁 좀 하자.”
[피곤해……. 제발. 제주도 출장에, 문화재단 회의까지. 오늘 엄청 바빴어.]
“네가 들으면 좋아할 텐데.”
[뭔데…….]
“회장님이 강아지를 데리고 왔어. 우리가 키울 거래. 너 어려서부터 소원이었잖아. 강아지 키우는 거. 호호.”
[어머!! 엄청 예쁘겠다. 성별은 뭐야? 아니, 이름은 뭐야?]
흐뭇한 미소를 짓던 이현미가 고개를 돌려 양승호 비서에게 물었다.
“강아지 성별하고 이름이 뭐죠?”
“암컷이고 이름은 복실이, 진돗개로 추정(?)됩니다.”
이현미가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이름은 복실이고 암컷. 진돗개로 추정이라는데, 내가 볼 땐 믹스견인데……. 호호.”
[엄마, 믹스견이 더 예뻐! 바로 집으로 갈게. 근데 부탁이 뭐야?]
“강아지 좀 봐 달라고. 급하게 나갈 데가 있어서.”
[어디 가는데?]
“파주에. 그림 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