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변기
흥분한 이나영 팀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문화재단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늘 씨! 그거 알아? 요즘 SNS에서 파주 미술이라고 이미지 올라오는데. 그게 또 엄청 난리야. 어머, 그걸 누가 그렸을까. 실제로 보면 장난 아닐 것 같아.”
“맞아요. 저는 지난 주말에 직접 가서 봤거든요.”
“어머! 어땠어? 진짜로 어마어마한 거야?”
“그림 앞에서 말문이 턱 막히더라고요. 정말 굉장했어요. 근데 벽화 그림을 강화유리로 가려놨던데요. 빛이 반사돼서 보기가 좀 힘들었어요.”
이나영 팀장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어머머. 그건 넘 오바다. 그게 뭐니. 모나리자 흉내 내고 있네.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훼손될까 봐 그런 거 같아요. 사람들이 벽화 앞에서 인증샷을 엄청 찍더라고요.”
“오, 그럼 하늘 씨도 인증샷 찍었어?”
최하늘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자 이나영 팀장이 소리쳤다.
“어머, 진짜네. 유리 때문에 사진이 별로다. 근데 사진 속 옷 뭐야? 신상 같은데. 설마 명품이야? 취향이 나랑 비슷하네. 호호.”
“…….”
이나영 팀장이 골똘히 생각하며 물었다.
“근데 벽화를 그린 작가 누구야? 우리 문화재단 소속 작가는 아니지?”
“그게 미스터리예요. 유명한 작가가 진행하는 비밀 프로젝트 아닐까요?”
“비밀 프로젝트?”
“네, 일종의 실험이죠. 작가를 밝히지 않고 자기 작품을 평가받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거예요.”
이나영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얻는 게 뭐지? 내가 아는 작가 중에 자신을 드러내길 꺼리는 사람들은 없었어. 어떻게든 이름을 알리려고 엄청 노력하지.”
“그래도 작가마다 스타일이 있잖아요. 이번에 신태진 회장님이 그림을 부탁했다는 기사도 났고요. 분명 엄청 유명한 작가인 게 확실해요. 혹시 신태진 회장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이나영 팀장이 턱을 괴고는 무심히 말했다.
“하늘 씨는 상상력이 풍부해서 좋겠다.”
“……네?”
불현듯 이나영 팀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근데, 파주는 누구랑 갔어? 혹시……. 남자 친구?”
“……사진 보셨잖아요. 그냥 친구들하고 갔어요.”
“어머, 맞다! 근데 최하늘 씨는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 친구가 없어? 내가 소개해줄까?”
“…….”
때마침 신수진 이사장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이나영 팀장은 소개팅 전문이야?”
이나영 팀장이 뻘쭘한 듯 대답했다.
“들으셨어요? 호호. 선남선녀들이 만나면 좋으니까요.”
“요즘 그러면 못 써. 직장에서는 사생활을 지켜주자고.”
신수진 이사장이 최하늘에게 몰래 윙크하자 최하늘이 소리 없이 ‘감사합니다’를 벙긋거렸다. 신수진 이사장이 자리에 앉고는 이나영 팀장을 향해 물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어? 물론 소개팅 빼고.”
신수진 이사장의 말에 이나영 팀장이 자세를 곧추세우고 대답했다.
“이사장님도 파주 미술 관련해서 소문 들으셨죠?”
“들었어. 실제로 가서 봤고.”
“네? 어머, 이사장님께서 직접 가셨어요?”
“이나영 팀장은 설마 안 갔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예술 작품이 있는데, 어떻게 문화재단 직원이 그렇게 관심이 없을 수 있지?”
“아니, 이번 주에 가려고 했어요……. 정말입니다…….”
신수진 이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농담이고. 다들 알잖아. 신태진 회장님이 기사까지 내면서 작품 의뢰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것을. 아버지가 그러실 분이 아니신데 말이지. 그래서 직접 가 봤어. 내 눈으로 직접 작품을 보고 작가를 판단하고 싶어서.”
최하늘이 말했다.
“저는 완전히 반했습니다. 다시 가보고 싶을 정도예요.”
신수진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훌륭했어. 아버지가 욕심낼만해. 도대체 작가가 누굴까?”
이나영 팀장이 말했다.
“파주에 그림을 그린 작가가 ‘명일문화재단 아티스트 공모전’에 참가하지 않을까요?”
신수진 이사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만한 인재를 선발하고 키우는 게 우리 일이니까.”
“하지만 기성 작가들도 지원 가능하니까. 만약 신인이라면 불리하지 않을까요?”
“꼭 그렇지 않아. 심사는 철저히 블라인드로 하니까. 이름에 기대어 작품 활동하는 실력 없는 기성 작가를 거를 수 있을 거야.”
최하늘이 자신 있게 말했다.
“명일 문화재단에서 처음으로 하는 공모전이잖아요. 수상자 혜택도 다른 공모전과 비교 불가고요. 신인이든 기성 작가든 분명 지원할 거예요. ”
신수진 이사장이 노트를 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지금 제주도 출장 가야 하거든. 복귀하면 바로 공모전 회의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넵!”
“……네.”
* * *
신태진 회장이 흐뭇한 미소로 회장실 소파에 앉아 있는 오한결을 바라보고 있다.
“작가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다니, 예상 밖이군요. 놀랐어요.”
최고급 가죽 소파의 안락함을 느끼며 오한결이 대답했다.
“회장님의 흥미로운 인터뷰를 보고, 한번은 찾아 봬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럼 성공했군요.”
오한결이 휴대폰을 보며 기사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평소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신 회장은 막강한 재력으로 미술계를 움직이는 권력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술계도 신 회장의 관심을 받은 신인 작가가 누구인지 상당히 궁금해하고 있으나, 아직 작가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전해진다. 소문에 의하면 벽화 알바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는 미대생일 가능성…….”
신태진 회장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적셨다.
“내가 무슨 권력자라고……. 그림 몇 개 사준 것뿐인데. 하하.”
오한결이 슬쩍 웃으며 벽면 스크린을 바라봤다.
“회장님의 클림트 그림은 여전히 그대로 있네요.”
회장이 고개를 돌려 <키스>를 지그시 바라봤다.
“작가님이 말씀하셨죠.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고. 나는 클림트 <키스>에서 사랑을 봤고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왔어요. 그림의 진실을 보고 있다는 믿음이 깨졌을 때 제가 느낀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런데 그 진실이라는 게 뭘까 생각해 봤어요. 그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내 마음의 믿음이더군요.”
“맞아요. 그래서 재해석된 클림트 그림에도 예술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 거죠. 믿음과 진실성. 그게 느껴지거든요.”
신태진 회장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을 <키스>에 시선을 고정하던 신태진 회장이 문득 생각나는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작가님의 해석을 듣고 작품을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어요. 나름 그림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신태진 회장의 말에 오한결이 히죽 웃기만 했다. 회장도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더더욱 작가님에 대해 궁금해지더군요. 명작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훈련을 받으신 듯한데, 어느 나라에서 유학하셨는지 여쭙고 싶군요.”
오한결이 신태진 회장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전혀요. 전 유학하고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만.”
“이런, 제가 실례를 했군요. 국립예술교육원이나 서울대 같은 국내 명문대도 충분히 뛰어난 곳이지요. 이제 한국 교육기관도 훌륭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어요, 내가 그 부분을 간과했습니다.”
헛다리를 짚는 신태진 회장을 향해 오한결이 히죽 웃었다.
“훌륭한 학교들이죠. 하지만 저는 지방대를 나왔습니다. 예술가에게 학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신태진 회장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렇긴 하죠.”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키스>를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는 당시 보수적인 아카데미와 ‘빈 미술과협회’ 세력을 비난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게 분리주의 미술이죠. 클림트가 소위 한국의 미술 명문대를 직접 본다면, 아마도 ‘예술’이 없는 예술대라고 욕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물끄러미 오한결을 바라보다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작가님 말대로 클림트는 당시 아카데미의 보수성과 화풍에 반기를 들었고 저는 그 점을 좋아했어요. 그걸 잊고 있었군요. 이런, 오한결 작가님의 창의적이고 뛰어난 작품에 놀라놓고 기존 아카데미 교육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군요.”
“아직도 제가 어디 학교 출신인지가 궁금한가요?”
“전혀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단지 습관적인 질문이었을 뿐 너무 괘념치 마세요.”
신태진 회장이 눈치를 살피다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요청해 보죠. 작품을 그려줄 용의가 있나요?”
오한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개인을 위한 그림은 그리지 않습니다. 다만, 회장님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높게 사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동생이 회장님을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과 비유하던데요.”
“이런! 하하하. 오한결 작가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그 역할을 해보고 싶군요.”
“안타깝게도 전 메디치 가문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저 말고 다른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완고하시군요.”
“이번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혹시, 내가 신인 작가를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씀하신 건가요?”
신태진 회장이 양승호 비서를 호출했다.
“양 비서, 아직인가?”
“지금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 잘됐군. 이리로 모셔오게.”
* * *
양승호 비서가 문을 열자, 폭탄 머리를 한 남자가 화구통을 어깨에 메고 느릿느릿 들어왔다. 오한결은 그 남자의 묘한 자신감에 살짝 웃음이 났다. 뭐지, 저 사람은…….
신태진 회장이 남자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을 했다.
“오랜만이구나. 많이 기다렸니?”
남자는 건들건들 몸을 들썩이며 대답했다.
“쪼금요. but I’m OK.”
신태진 회장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인사해라. 여긴 오한결 작가님이시다.”
오한결이 웃음을 간신히 참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한결입니다. 풋.”
“와우. 아티스트! 바앙가워요.”
남자는 오한결에게 관심이 없는지 바로 고개를 돌려 회장실을 둘러봤다.
“와우! 회장실은 다르군요. 판타스틱!”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신태진 회장이 오한결을 바라봤다.
“여기 이 학생은 ‘대니 최’입니다. 뉴욕에서 예술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죠. 대니 최가 고등학생 때부터 명일그룹은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꾸준히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이렇게 멋진 예술대 학생이 됐네요. 현재 뉴욕에서 주목받는 젊은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니 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타며 말했다.
“이얍. 우리의 인연은, 3년.”
“아니지, 대니 최. 4년이지.”
“이얍. 마이 미스테이크.”
오한결이 웃을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좋…… 좋은 일 하시네요.”
“사실, 대니 최를 오한결 작가님께 소개하고 싶어 불렀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입니다. 그래도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작가님이 보시고 한 수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태진 회장이 대니 최에게 말했다.
“부탁한 그림은 가지고 왔니?”
“이얍.”
대니 최는 화구통을 열고 그림 한 장을 정성스레 꺼냈다. 오한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지, 무슨 그림이지. 꽤 파격적인데.’
어두운 배경에 강렬한 원색들이 휘몰아치듯 빛나고 있다.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작가 자신만의 감정만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깊은 우울감.
아니다. 이건 절망이다.
삶의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그 누군가의 절규로 읽힌다.
오한결이 입을 열었다.
“대니 최 씨. 작품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대니 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품 설명 따윈 노우. 그딴 건 무의미! Nothing.”
신태진 회장이 은근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해하세요. 대니 최가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어서요.”
오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그림도 주인을 닮아 무척 자유로워요. 굉장히 솔직한 그림입니다.”
“그렇습니까? 작가님께서 명일 그룹 장학생에게 칭찬을 해주시니 무척 기쁩니다. 좀 더 해주실 말이 없나요?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좋습니다. 하하.”
오한결이 딱 잘라 말했다.
“전 평론가가 아니라서요. 이 그림을 어떻게 보든 관객에게 달렸죠. 무엇보다, 현대 미술을 평가하기가 참 애매해요. 대니 최 씨의 그림은 얼핏 보면 인상주의 화풍과 무척이나 닮아있어요.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쓴 모습이 보입니다. 물감을 흩뿌린 것도 추상표현주의 선구자였던 잭슨 폴록의 작품과 닮았고요.”
대니 최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전 최곱니다.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BEST 작가입니다. 이얍.”
오한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술계는 대니 최 씨의 그림에 최고 평점을 줄 수 있지만, 그들은 언제든 대니 최 씨의 그림을 수준 이하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죠.”
“노우……. 오 마이 갓. 그건 임파서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대니 최를 보던 오한결이 피식 웃고는 휴대폰으로 ‘변기’ 이미지를 검색 후 보여줬다.
“뒤샹은 변기를 예술품으로 만들었죠. 솔직히 말해보시겠어요? 지금 보이는 변기가 대니 최 씨에게 예술로 보이나요?”
“오 마이 갓. 솔직히 난 인정할 수 없어요. 변기가 작품이 된다고요?”
“대니 최 씨의 생각이 어떻든, 현대 예술계는 뒤샹의 변기를 예술로 인정했어요. 그럼 대니 최 씨는 현대 예술을 부정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