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해도 완벽한 예술 천재-15화 (15/202)

제15화 등반길

묵묵히 산을 오르던 오준근과 오한결.

그들은 쏟아지는 땀을 식히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근처 바위에 몸을 등지고 앉았다. 오준근이 힘들어하는 오한결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인수봉을 오를까 생각해 봤는데, 한결이 체력으론 무리겠네…….”

오한결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 인수봉이요? 거긴 더 힘든 코스인가요……?”

“간단하게 암벽등반이라고 생각하면 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한결이 대답했다.

“아……. 절대로. 안 됩니다.”

오한결이 오이를 하나를 아삭 씹으며 북한산을 검색해봤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봉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이라고 불린다는 설명과 함께 인수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었다.

‘험난한 코스이긴 한데…….’

오한결은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도 체력적으로 무척 힘이 들 텐데, 오히려 얼굴은 몹시 평온해 보였다. 평소에 혼자 오르던 이 길을 아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기쁨일까. 오한결은 힘든 코스를 가고픈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들과 함께 힘든 코스를 완주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렇다면 이렇게 쳐져 있을 때가 아니구나.

오한결이 기분 좋게 외쳤다.

“아버지, 출발하시죠!”

“좋지! 출발!”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침 숨소리.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체력의 한계를 극복한 두 사람은 드디어 백운대 정상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넓은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체력이 바닥난 오한결도 슬그머니 바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오한결은 눈 앞에 펼쳐진 서울 전망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서울 시내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신비한 경험이었다. 오준근이 곁에 앉고서 초콜릿을 슬며시 건넸다.

“어때? 이렇게 오니까 너무 좋지.”

“네,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네요.”

갑자기 오준근이 오한결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어색함에 몸이 얼어버린 오한결에게 씨익 미소를 지은 그가 고개를 돌려 서울 전망을 바라봤다.

“힘든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이렇게 멋진 보상이 생기는 거야.”

오준근이 잠시 침묵 후 말을 이었다.

“요즘 한결이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너무 기쁘구나. 아들의 노력이 이제야 빛을 보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죄송해요. 그동안 못난 모습 보여서.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만 보여드릴게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오준근이 고개를 돌려 오한결을 바라봤다.

“그래서 말인데, 때론 한결이가 이미 인생의 오르막을 다 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단다.”

오한결은 아버지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이러는 걸까. 설마, 눈치를 채신 건가…….

“아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 가족이란 그런 존재인 거야. 네가 가족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갈 필요는 없어.”

“아버지.”

“응.”

“세상에 운이 엄청 좋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게 무슨 뜻이니?”

“멋진 삶을 살아 볼 수 있도록 한 번의 삶의 기회가 더 있는 거죠.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의 오르막길을 다 올라가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남들보다 높이 올라간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있겠죠. 그뿐이에요.”

“……이해가 안 가는구나.”

“제가 운이 좋다는 얘깁니다. 하하.”

오준근은 아들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아들의 말에 내포된 단단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의 말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긍정적 단어면 충분했다.

오준근은 오한결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 * *

다음 날, 오한결이 아트화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노을과 최무열이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한결을 발견한 노을이 반갑게 소리쳤다.

“어서 와! 한결 작가님.”

오한결이 테이블에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 자주 오네. 오늘은 또 어떤 일로…….”

노을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뭐야! 우리도 엄연히 초대받은 손님이라고!”

“초대?”

홍철수 사장과 홍미숙이 음료수와 쿠키를 가지고 부엌에서 나오다가 오한결을 발견했다.

“한결 학생 왔구나. 선물로 받은 전통차인데, 시원할 때 먹으면 아주 맛있어. 어여, 들어요.”

홍미숙이 노을과 최무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가게에 젊은 친구들이 많으니까. 분위기가 너무 좋다. 호호.”

최무열이 쿠키를 아삭아삭 씹으며 말했다.

“화신벽화 사무실에 비하면 여긴 완전 미술관 같아요. 여기 자주 놀러 와도 돼요?”

노을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홍미숙이 벽화 알바생들의 귀여운 모습에 흥겨워 대답했다.

“자주 초대할게. 내가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

“오~ 예!”

노을과 최무열이 환호성을 지르자 오한결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홍철수 사장이 오한결 옆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

“신태진 회장은 만나 봤어?”

“네, 재밌으신 분이더라고요.”

회장이라는 말에 모두의 이목이 오한결에게 집중됐다.

“그분이 왜 부른 거야?”

오한결이 대수롭지 않은 듯 전통차를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그림을 부탁하던데요.”

“!!”

최무열이 흥분한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대박! 이건 거의 ‘메디치 가문’의 예술가 후원 비슷한 건가? 세계적인 기업 회장에게 작품을 의뢰받다니. 한결 형님. 이제 명일그룹 후원 작가 되는 거예요? 대박…….”

오한결이 손을 뻗어 최무열의 볼을 꼬집었다.

“으악, 형님 아파요.”

“무열아, 메디치 가문이라니. 농담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건 오바야.”

노을이 조심스레 물었다.

“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메디치가 뭐야?”

최무열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중세시대 때 미켈란젤로를 후원한 유명한 가문 말이야.”

최무열의 말에 노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켈란젤로를 후원할 정도면 돈이 엄청 많았나 보네.”

“응, 그들이 막대한 부를 예술가에게 쏟아부어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최무열의 말에 노을이 놀라며 물었다.

“너 되게 자세히 알고 있다, 대단한걸?”

“지난 학기 수업에서 공부 좀 했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대.”

“어머! 엄청나구나. 그럼 한결 작가님도 한국의 메디치 가문인 명일그룹에게 후원을 받는 건가? 호호.”

노을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오한결도 주변 사람들의 설레발이 나쁘지는 않았다. 모두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까.

신이 난 최무열이 메디치 가문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아트화랑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낯익은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오한결 작가님!!”

홍철수 사장이 놀라서 물었다.

“김일중 사장.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엄청난 소식을 갖고 왔죠. 들으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으하하하!”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일중 사장을 바라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중남일보’에 명일그룹 신태진 회장 인터뷰가 떴어!”

휴대폰 화면에 해당 기사를 보여주고는 김일중 사장이 방방 뛰며 말했다.

“기자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직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천재 예술가 오모 씨에게 신태진 회장이 그림을 부탁했다는 내용이야. 오모 씨가 세계 무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내용도 있어. 세상에! 아, 어지러워. 너무 흥분했나 봐…….”

“오모 씨라면…….”

“당연히 오한결 작가님이지!!”

“진짜 메디치 가문을 만난 건가……. 대박.”

오한결은 김일중 사장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낚아채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분명 자신은 그림을 그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신태진 회장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작가를 압박해서 작품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인상을 찌푸리던 오한결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여기 있는 오모 씨는 제가 아닙니다.”

“!!”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오한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분명히 거절했거든요.”

“!!”

* * *

고급 세단이 웅장한 한옥 건물 앞에 멈추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차 뒷문을 열고는 신태진 회장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피곤한 얼굴의 신태진 회장이 직원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넨 후 집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현미가 신태진 회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여보, 수고 많았어요.”

“어이구, 배고파 죽겠네. 바로 식사 가능할까?”

“그럼요. 아주머니께서 오늘 당신 좋아하는 한우 갈비 해 주셨어요.”

신태진 회장이 부엌에서 아주머니를 발견하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맛있는 식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겁지겁 입에 갈비를 넣는 신태진 회장에게 이현미가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체합니다.”

“배가 너무 고팠어. 오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거든.”

이현미가 수저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 기사 때문이군요. 당신 같지 않았어요. 평소 모든 일에 신중하신 양반이. 갑자기 그런 인터뷰를 하시다니요.”

급히 물을 들이켠 신태진 회장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어. 보통 예술가가 아니더라고.”

이현미가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미술관장도 했잖아요. 그 작가가 누군지 말씀 주시면 제가 좀 알아볼게요. 신인 작가를 지원하실 거면 방법은 많아요. 제가 직접 면접을 봐도 되고요.”

신태진 회장이 몹시 놀랐다.

“안 돼. 절대로! 오한결 작가에게 면접이라니…….”

“음, 오한결 작가…….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외국에서 공부한 작가인가요?”

신태진 회장이 이현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여보, 우리가 감히 오한결 작가를 평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벅찰지도 모르지.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궁금하군요. 당신이 그렇게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이현미의 말에 신태진 회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가슴 뛰는 일이 생겼어. 당신은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현미도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럴게요.”

* * *

똑. 똑. 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리자 오한결이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박선희의 얼굴이 보였다.

“아들, 얘기 좀 할까?”

박선희가 오한결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주위을 둘러봤다. 이젤과 각종 그림 도구들이 가득했고 최근 오한결이 그린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색채>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무엇보다 한쪽 구석에 산처럼 쌓인 오한결의 습작들이 눈길을 끌었다.

“한결이가 정말 많은 연습을 했구나.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게 된 이유가 있었어.”

오한결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습작들은 미숙해서 부끄러울 정도예요.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으니까, 저렇게 쌓아 놓고 있어요.”

박선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버리다니. 소중한 그림들을. 지금의 한결이를 만든 작품이니 잘 보관하도록 해. 알겠니?”

“……네.”

박선희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고는 오한결의 책상을 바라봤다. 상당한 양의 책들이 위태롭게 쌓여 있어 살짝 툭 건들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한 모습이었다.

“독서를 이렇게 많이 하는 줄 이제 알았네. 어머, 정말 엄청나구나.”

“계속 공부해야죠.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 곧 예술의 원천이 되거든요.”

“확실히 달라졌네. 멋있다. 우리 아들.”

“…….”

오한결은 변화를 언급하는 어머니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치 비밀을 들켜버린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한결이의 변화를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

“그럼요. 당연하죠.”

“아버지도 한결이의 달라진 모습에 무척 흐뭇하고 계셔. 한편으론 걱정되기도 하단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저를 믿어주세요. 엄마.”

박선희는 오한결의 눈을 바라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모습. 어떻게 어머니가 아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변화 뒤에 숨겨진 그림자가 있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기우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한결아, 너는 훌륭한 예술가가 될 거다.”

“엄마, 지금 제게 1순위는 그게 아니에요.”

“……그럼?”

“가족. 1순위는 가족입니다.”

오한결의 말에서 사무치는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박선희는 오한결의 말에 뿌듯하면서도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박선희가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오한결이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꼬옥 안아줬다.

“그래, 고생 많았다.”

박선희는 아들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시간을 초월해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진실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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